면도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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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이 어느새 200권을 넘는가 싶더니 서머싯 몸의 <면도날>이 벌써 214권이다. 제법 두툼한 책을 부여잡고 읽기 전에 습관처럼 제목과 표지를 훑어보았다. 날이 선 느낌의 제목과 사색에 잠긴 사람. 이 사람이 에드워드 뷰러인가. 그를 모르지만, 책을 덮고 나자 작품 속에 녹아있는 인물처럼 느껴진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으리라.  

 작가 서머싯 몸은 이 책에서 작중화자로 분한다. 소설이 아닌듯하지만 결국은 소설이면서 동시에 이야기를 끌어가지만, 중심인물이기 보다 그들을 엮어주는 이야기꾼이다. 작가인 그의 주변인물을 통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상태를 꾸밈없고 순수하게 보여준다. 엘리엇, 래리, 이사벨, 그레이, 소피, 수잔을 통해 다양한 삶의 관점을 지켜보자니 지루할 틈 없이 술술 책장이 넘어갔다. 

 그중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인물 래리에게 관심이 갔다. 스무 살이 채 되기도 전에 비행기 조종사로 전쟁(세계 1차대전)에 참여하지만 돌아오고 나서 많은 부분이 변해버린다. 약혼자 이사벨은 래리를 사랑하지만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래리의 세계는 이제 전쟁 전후로 크게 나뉘었으며 내면으로 자꾸만 깊이 들어간다. 성공이 보장된 화려한 삶과 직업을 버리고 자신만의 물음의 답을 찾고자 파리로 건너가고 이후 여러 곳을 떠돌아다닌다. 이사벨과 그레이, 소피는 모두 친구지만 이들의 삶은 너무도 다르다. 래리는 소위 말하는 현실적이지 않은 선택을 하고 좋게 말하면 여행이지만 실상 길에서의 삶을 선택한다. 마지 조지 오웰의 자전소설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에서처럼 노숙자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다르게 보면 수행자였다.  

 몽상가처럼 보이는 래리, 화려한 삶과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원하는 이사벨과 그레이, 감수성 예민한 시를 쓰던 소녀에서 만신창이로 전락한 소피. 그리고 이사벨의 삼촌인 엘리엇은 품위유지와 사교계를 주축으로 언제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인물이다. 마지막으로 수잔은 래리와 재미있는 인연으로 얽힌 사람인데 어려운 환경에서 살기 위해 무엇이든 행했고 이후 꿈을 이룬다. 등장인물이 많지만 이들은 모두 친구, 가족 등으로 씨실과 날실처럼 겹쳐지고 나뉘기도 한다.  

 거기에 세계 1차대전 후의 상황, 미국의 경제발전 도약, 유럽의 화려한 파티와 사교문화와 예술 등이 배경이라 한 편의 영화를 보는듯하다. (이미 두 번이나 영화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들의 삶을 따라가는 긴 여정이 길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이다. 특히나 래리와 이사벨의 극명한 대조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겹쳐진다. 안주하려는 자와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길을 나선 자. 래리는 전쟁에서 상처를 받았지만, 그것은 당시의 혼란기를 사는 사람들 모두의 공통점이었다. 무언가 잃어버린듯한 공허함을 채우고자 혼란과 방황의 경계에서 선택하는 방식이 달랐을 뿐이다.   

 한 사람의 삶에 대한 구원만이 아닌 그 시대를 그리고 이 시대를 사는 모든 이들의 구원에 대한 이야기로 느껴진다. 그래서 나를 비롯한 모두에게 묻고 싶어졌다. '당신은 당신의 삶을 진정으로 원하는 방식으로 살고 있습니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 한마디뿐입니다. 정답은 없다는 사실 말입니다. 다만, 구원의 방식이 다를 뿐입니다.' 서머싯 몸이 70세 전후로 출판한 <면도날>은 노장 작가의 원숙한 시선이 가득 묻어난다. 찐득찐득하게 무더운 여름 한 권의 책을 선택하라면 이 책도 목록에 넣어두면 좋을 거 같다.  

 

면도칼의 날카로운 칼날을 넘어서기는 어렵나니.
그러므로 현자가 이르노니, 구원으로 가는 길 역시 어려우니라. 

-카타 우파니샤드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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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위의 작업실
김갑수 지음, 김상민 그림, 김선규 사진 / 푸른숲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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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김갑수가 문화평론가라는 사실은 알아도 시인이라는 건 미처 몰랐다. 그러나 독특하고 재미있는 사람 같아 보인다는 생각은 했는데 역시 맞았다. 예전에 <TV, 책을 말하다>에서 보는 그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자신만의 확고한 세계와 생각 속에서 살 거 같은 그런 사람이 풍기는 아우라는 가까이 가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법이다. 

 그런 사람의 작업실을 엿본다는 사실은 흥미롭고 기대되는 일이었다. 역시나 박학다식한 저자답게 글 속에 많은 것들이 들어 있고 연상이 되었다. 물론 전문적이거나 지나치게 깊숙하게 들어가는 건 아니다. 그런데도 문학부터 음악, 커피, 오디오 등 실로 많은 부분이 크로스 오버 된다. 그리고 무엇하나 적당히 하는 법이 없어서 기가 막혔다. 물만 적시는 수준이 아니라 풍덩 들어가 깊숙하게 잠수를 해버릴 지경이다.  

 내가 참을 수 없는 게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한 가지가 바로 나만의 공간이다. 이 부분이 해결되지 않으면 될 때까지 찾아나선다.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그래서 언제나 나만의 비밀공간이 있었다. 집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이 공간에 들어박혀 몇 시간을 보낼 때가 행복했다. 물론 저자의 지하공간인 줄라이홀처럼 완벽한 요새수준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는 집보다 줄라이홀에 머무는 시간이 많다. 이곳은 오리지널 LP만 3만장이다. 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볶는 등의 일을 하며 하루를 보낸다. 그런데도 시간이 없어서 불만인 사람이다. 바리스타용 앞치마에 레이스 셔츠, 두건형 모자까지 복장을 갖추고 홀로 커피를 마시는 모습을 떠올리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저자에겐 미안하지만 나도 이 부분에선 웃을 수밖에 없었다.  

 클래식 음악 이야기도 그렇고 이 사람 정말이지 재미있게 산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에서 성공하거나 돈을 많이 버는 사람보다 부러운 사람은 바로 이런 부류다. 약간의 질투와 호기심을 자극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책을 읽는 동안 사람들과 약간 떨어진 자신만의 공간에 있지만, 사람들 속에서 사는 저자가 부러웠다. 게다가 이 책은 따분한 구석이 조금도 없다. 그의 입담이랄까. 말발이라고 해야 하나. 말발과 글발이 장난 아니다. 두서없는 거 같은데 듣다 보면 이해가 또 간다는 게 말이다. 뜬금없이 아무튼 세상은 넓고 괴짜는 많다는 생각도 든다. 

 누구나 근사한 자신만의 공간을 꿈꾼다. 책으로 둘러싸인 혹은 LP나 CD, 빈티지 우드 스피커 라디오, 클래식한 가구들 등등. 그러나 더욱 중요한 건 공간의 크기나 물건이 아니라 자신이 진정 몰두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그곳이라면 다소 어울리지 않을 거 같은 조합이 모여 있어도 그만의 독특함으로 자리 잡을 테니까.  

 책을 덮어도 갓 볶은 원두 향이 코를 간질이는 듯하다. 좋아하는 향이 가득한 곳에서 뒹글 거리기만 해도 안락함을 느낄 거 같다. 모두가 자신만의 공간인 작업실을 꿈꾸지만 말고 직접 만들라고 저자는 말한다.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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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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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 겪는 절망 중 이겨내지 못할 것은 없다는 말을 흔히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위로를 위해 나온 말이 아닐까. 그렇게라도 믿지 않으면 여지없이 무너질 테니까.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 과거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쭉. 그런 과정에서 절망을 겪으며 분노하고 몸과 마음이 으스러져도 기어이 진실에 접근한다. 과연 진실과 마주할 만큼 강한지 자문하면서 말이다. 비록 그것이 쓰디쓰고 소름끼치도록 무시무시해도 누군가는 그 문을 향해 돌진하고 다른 누군가는 주저한다.  

 작가 공지영은 신문에서 한 줄의 기사를 보며 <도가니>를 쓰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끝까지 글을 쓰면서 상당히 힘들었다고 고백한다. 펜으로 진실을 써가며 많이도 아파서 여러 번 마음을 다잡았을 작가의 모습이 절로 떠오른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 강한 파급력을 전해준 작가에게 감사한다. 그 고단한 여정에 간접적으로 동참하게 되자 나도 작가처럼 힘이 들었다.  

 이야기의 시작은 주인공이 무진이라는 안개도시로 내려오면서 시작된다. 무진이라는 지명을 듣자마자 김승옥의 <무진기행>이 생각났는데 역시 안개의 무진이 맞았다. 해무(海霧)에 쌓인 알 수 없는 낯선 소도시의 자애학원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끔찍했다. 교장 등 학교 관계자들은 그들의 학생을 성폭행한다. 그리고 교사에게도 반말을 쓰고 청각장애아들이 모인 학교지만 수화를 할 줄 아는 교사조차도 없다. 자애학원은 안개에 쌓인 세상에서 고립된 하나의 왕국이었다. 교장이라는 세습된 폭군 같은 왕과 그에게 굽실거리는 간신배들인 쌍둥이 행정실장과 생활지도사를 포함해서 실세력들은 아이들을 상대로 입에 담기에도 부끄러운 행동을 한다. 그리고 이들의 만행을 알면서도 눈감아주는 힘없는 월급쟁이들과 학생들의 편에 있지만 역시 힘없는 선생님들이 아슬아슬하게 존재하는 공간이다. 사회의 축소판과 다름없는 이곳에서 강인호는 괴로워한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무언가를 깨 내려면 누군가는 다치고 잃을 각오를 해야만 행동으로 옮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거대한 싸움이 시작된다. 강인호와 서유진은 아이들의 참다운 자유와 삶을 위해 자애학원이라는 권력과 돈으로 점철된 집단과 승부를 겨룬다. 그러나 지역사회라 이들과 연관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이며 사람들은 변화를 거부한다. 경찰, 교육청, 시청 등 어디 하나 이들의 손이 뻗치지 않는 곳이 없다. 이들의 더러운 공생관계라 하겠다. 법정영화 등을 보면 억울하게 당하는 사람은 언제나 진실과 무관하게 힘없는 자들이 대부분이다. 아마 현실도 그렇지 않을까. 그래서 이 책을 읽다 보면 여러 번 현실과 너무도 똑같이 그려내서 절망하고 분노하게 된다. 과연 진실이란 존재하는지의 의문과 진실이 반드시 승리하는 게 아니라는 걸 한 번 더 느껴야만 했다. 서유진의 말처럼 그야말로 "이 무슨 미친…… 광란의 도가니야?"  

여기서 진실을 말하면 들어준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아니잖아요. 우리가 아니라 저 선생님들이 거짓말을 하는데 아무도 막아주지 않잖아요. 여기도 자애학교랑 똑같잖아요. (209쪽.) 

진실은 말이야. 그걸 지키려고 누군가 몸을 던질 때 비로소 일어나 제 힘을 내는 거야. 우리가 그걸 하찮게 여기고 힘이 없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정말 힘을 잃어. (211쪽.) 

세상 같은 거 바꾸고 싶은 마음, 아버지 돌아가시면서 다 접었어요. 난 그들이 나를 바꾸지 못하게 하려고 싸우는 거예요. (257쪽.) 

 이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말들이다. 진실을 말해도 들어주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외로운 싸움을 해야만 하는 아이들과 사람들을 지켜보는 일이란 괴로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신문 기사 한 줄에서 시작된 이 여정의 끝은 그다지 절망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끝없이 동참하는 독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책에서의 이야기는 희망적이었다. 서유진의 말처럼 진 것만은 아니었다. 아이들은 자애학원을 떠나 오히려 편안한 상태로 지내며 자신을 소중히 하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사실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반복되는 수많은 부조리 앞에서 굴복하지 않고 오늘도 싸우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도가니라는 말은 보통 광란의 도가니니 하는 식으로 비유된다. 그러나 저자는 중첩된 의미를 둔 거 같다. 미친 광란의 도가니와 또 하나의 도가니는 그릇을 말하는 것 같다. 도가니탕에 쓰이는 그런 그릇 말이다. 단단하고 끓고 나서도 오래도록 지속되는 열기를 지닌 그 무엇……. 우리도 오래도록 이 열기를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절망과 분노를 맛본 만큼 그곳에서 찾아 헤매던 빛 한줄기를 찾을 때까지 말이다.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리지 말고 뚫고 나와야 한다는 걸 다시금 깨닫게 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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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서아 가비 - 사랑보다 지독하다
김탁환 지음 / 살림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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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서아 가비>라는 제목을 듣자마자 머리에서 번쩍이는 게 있었다. 책장에서 문예지를 죄다 꺼내 기억이 맞는지 확인하기 시작한다. 몇 권을 뒤적인 끝에 드디어 찾았다! 2007년 <한국문학> 여름호였다. 김탁환의 <노서아 가비>가 실려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도 읽으면서 독특하고 흡입력 있는 글이었다. 그래서 작가의 이름은 잊어버렸어도 제목만은 잊을 수 없었다. 사실 김탁환이란 이름은 이후에 많이 듣게 되었는데 이렇게 그의 첫 작품을 만날 줄 몰랐다. 이제야 알았지만, 작가는 2006년 겨울부터 작품구상을 시작했다고 한다. 

 러시안 커피라는 의미의 제목. 그리고 커피색의 책표지와 책장 안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커피 그림이 인상적이다. 게다가 목차까지 커피는__다라는 식으로 연결된다. 모든 주어는 커피로 시작된다. 예로 첫사랑이다, 두근두근 기대다, 흔들림이다.. 이런식이다. 재미있는 건 이런식으로 연결해도 어색함이 없다는 사실이다. 감성을 건드리는 카피와 편집이라 하겠다. 물론 커피 마니아가 아니더라도 삽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절로 커피 향이 떠올라 맛있는 커피 한 잔이 그리워진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김탁환이라는 작가의 독특함이다. 

 개화기 유쾌 사기극을 쓰고 싶었다는 소망을 이룬 것이다. 실제 사건인 고종의 커피에 아편을 넣은 인물 김홍륙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며 작가는 구체적인 줄거리에 상상력을 덧달았다. 이렇게 유쾌하고 속도감 있는 전개를 오랜만에 만났다. 그래서 잠을 줄이며 읽은 책이다. 간만에 소설의 매력에 흠뻑 취했다. 몰입하기에 더할 나위 없었다. 소재도 신선할뿐더러 출간 즉시 영화화 결정이란 말을 이해하고도 남았다. 이것이 팩션의 매력이며 가능성이라 생각한다. 

 주인공 따냐는 역관인 아버지가 노서아 가비를 마시는 것을 보며 또 여러 나라의 말을 배우며 자랐다. 이후 아버지는 청나라 수행 길에 하사품을 훔쳐 달아나다 죽었다는 누명을 쓰게 되고 이후부터 따냐의 안락한 삶은 정지한다. 조국을 떠나 러시아까지 흘러가서 다양한 길 위의 삶을 살게 된 파란만장한 여인이 된다. 그리고 사랑이라 믿은 유일한 남자 이반과의 만남과 음모 등이 얽히고설켜서 진행은 급물살을 탄다. 그리고 후반부의 반전까지 정말이지 숨 가쁘다. 

 역사적 배경을 적절히 배치하여 당시 상황이 곳곳에서 드러나는데 흥미로운 건 역시나 고종이 커피를 좋아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따냐로 불리게 된 비운의 주인공이자 유쾌한 사기꾼과 고종은 커피라는 매개체로 연결된다. 고종의 바리스타이자 티타임의 친구가 된 것이다. 쓰고 검은 액체가 주는 향과 맛으로 마음을 달래기도 하고 나누기도 한다. 그래서 상황이 어수선하고 절박해도 이런 시간은 소중하고 정지한듯한 느림으로 다가온다.  

 이 한 작품만으로도 충분히 국내문학에서 김탁환이 차지하는 위치는 돋보인다. 이 밖에도 읽지 못했지만 리심이나 방각본살인사건 등의 줄거리와 소재 또한 훌륭하다. 팩션과 역사는 구별해야 하지만 역사의 사라진 공간을 재창조해낸다는 점에서 가치 있다. 그래서 이 작가를 앞으로 지켜보고자 한다. 문학적 가치라는 것은 깊이 있고 무거운 것만이 아니다. 자신만의 개성으로 역사를 돌아보고 재조합하는 힘이 있는 것도 재능이라 하겠다. 올여름 시원한 한국소설 한 편을 찾는다면 <노서아 가비>를 추천한다. 다만, 재미있게 즐기며 읽을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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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해록 : 조선 선비가 본 드넓은 아시아 샘깊은 오늘고전 10
방현희 지음, 김태헌 그림 / 알마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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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류의 기록이 세계의 기록으로 남다. 

 표해록(漂海錄)이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바다에서 표류했던 기록을 담은 책이다. 표류하니까 어린 시절에 읽은 <15 소년 표류기>가 떠오른다. 목숨을 담보로 망망대해에 던져진 사람들의 목표는 하나로 집결된다. 바로 살고자 하는 것인데 저자 최부는 그뿐 아니라 반드시 돌아가야 할 이유가 있었다. 제주도에서 근무하던 중 부친상을 당해 전남 나주로 배를 타고 가다 표류하게 되었던 것이다. 유교를 숭상하던 당시 조선이었던 것도 배경이지만 이를 떠나 부모를 향한 극진한 마음이야 모두가 매한가지일 것이다.  

 제주도에서 배를 타고 나주로 가려다 결국 중국 남부 해안까지 밀려갔고 이후 중국의 강남 및 산등, 북경을 통해 조선으로 돌아오기까지 8,000여리, 135일이 걸렸다 한다. 그간 고생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해적을 만나 모든 것을 빼앗기고 목숨은 부지했으나 이후 왜구로 몰려 또 위협을 당한다. 이런 내용을 통해 당시 상황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는 것이 표해록의 기록적 특징이며 가치이다. 역사적 가치뿐 아니라 문학적 가치까지 동시에 지닌 우리의 고전을 이제나마 읽게 되어 좋은 시간이었다. 세계 3대 중국 견문록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그리고 최부의 <표해록>이다. 한 권은 서양인의 관점에서 나머지 두 권은 일본, 한국인이 쓴 책이다. 
 

:: 모든 것을 그대로 기록한 최부. 

 천신만고 끝에 조선에 돌아온 최부와 일행은 전원 모두 무사히 귀환했다. 이는 최부의 침착하고 당당한 대응도 한몫하는데 부하들의 불만 등을 선비다운 점잖은 말로 조용하지만, 통솔력을 발휘했기 때문이었다. 상황이 급박해지면 사람이 많을수록 균열이 일어나는 법이다. 하물며 43명이었으니 알만하다. 이들이 돌아오자 성종은 최부에게 있는 그대로의 것을 기록하게 하고 이것이 표해록으로 탄생된다. 날짜와 날씨는 물론 당시 상황까지 상세하게 묘사했기에 성종은 표해록의 훌륭함을 알아보고 외교문서를 보관하는 승문원에 보관하게 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왜구로 몰렸던 연유 등을 소상하게 남겨 당시 중국, 조선, 왜 등의 관계도 알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서로 언어는 다르지만 같은 한자문화권으로 필담을 나눠 의사소통을 했으며 학식이 높은 최부를 알아보고 많은 이야기를 나눈 중국인들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먹을 것을 주고 호의를 베푸는 중국인에게 최부는 감사의 답례로 시를 화답하기도 했다.  

 수차水車를 눈여겨본 최부가 만드는 법을 알고자 노력했던 것도 기억에 남는다. 농사를 주로 짓는 조선에서 가뭄 때 많은 도움이 될 것을 알았기에 관심을 쏟았던 것이다. 이후 수차를 만들어 잘 적용해 나갔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실려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최부의 지극한 마음이 임금과 어버이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백성까지 아우르는 것이었다는 좋은 본보기가 되는 부분이다. 이런 그의 강직함과 침착한 면이 높게 평가 되는 듯하다. 게다가 해적이나 동행한 이들을 통솔하는 부분도 강렬함은 없지만, 어디에도 꺾이지 않는 부드러운 당당함이 최부의 성품을 보여준다.
 

:: 고전 표해록을 읽고 나서. 

 학창시절 고전을 많이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우리의 고전은 생각보다 많이 읽지 못했다. 그래서 반성도 했다. 알마에서 나온 이 책을 읽으며 청소년을 대상으로 쓴 책인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 부분이 지나면 다듬어 쓴 소설가 방현희의 글이 이어지는데 문맥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놓치고 지나갈 수 있는 부분까지 세심하게 돌아보게 한다. 물론 그래서 교과서처럼 설명하는 느낌이 없지 않지만 친절한 해설은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당시의 기록을 소중하게 보관해 전해질 수 있다는 점에서 기록문화의 중요성이 대두된다. 그런 면에서 우리고전을 더 많이 읽어둘 필요성을 느꼈다. 선비가 점잖게 쓴 책이지만 돌아보니 참으로 흥미진진하지 않을 수 없다. 고전을 통해 당시 시대를 이해하고 지금을 돌아보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지식의 폭만 넓어지는 데서 끝나지 않고 자신의 삶에 적용하거나 깨달음을 얻는데 도움이 된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아주 오래전에도 사는 건 마찬가지였다는 사실 말이다. 상황이야 언제든 변할 수 있지만 대처하는 방식은 비슷하다.  

 표해록은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지금 읽으면 대단한 기록이라는 생각이 덜 들겠지만 최부와 시대를 따라 흘러가다 보면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 길에서 우리의 지금으로 와 닿는 것임은 분명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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