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서아 가비 - 사랑보다 지독하다
김탁환 지음 / 살림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노서아 가비>라는 제목을 듣자마자 머리에서 번쩍이는 게 있었다. 책장에서 문예지를 죄다 꺼내 기억이 맞는지 확인하기 시작한다. 몇 권을 뒤적인 끝에 드디어 찾았다! 2007년 <한국문학> 여름호였다. 김탁환의 <노서아 가비>가 실려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도 읽으면서 독특하고 흡입력 있는 글이었다. 그래서 작가의 이름은 잊어버렸어도 제목만은 잊을 수 없었다. 사실 김탁환이란 이름은 이후에 많이 듣게 되었는데 이렇게 그의 첫 작품을 만날 줄 몰랐다. 이제야 알았지만, 작가는 2006년 겨울부터 작품구상을 시작했다고 한다. 

 러시안 커피라는 의미의 제목. 그리고 커피색의 책표지와 책장 안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커피 그림이 인상적이다. 게다가 목차까지 커피는__다라는 식으로 연결된다. 모든 주어는 커피로 시작된다. 예로 첫사랑이다, 두근두근 기대다, 흔들림이다.. 이런식이다. 재미있는 건 이런식으로 연결해도 어색함이 없다는 사실이다. 감성을 건드리는 카피와 편집이라 하겠다. 물론 커피 마니아가 아니더라도 삽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절로 커피 향이 떠올라 맛있는 커피 한 잔이 그리워진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김탁환이라는 작가의 독특함이다. 

 개화기 유쾌 사기극을 쓰고 싶었다는 소망을 이룬 것이다. 실제 사건인 고종의 커피에 아편을 넣은 인물 김홍륙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며 작가는 구체적인 줄거리에 상상력을 덧달았다. 이렇게 유쾌하고 속도감 있는 전개를 오랜만에 만났다. 그래서 잠을 줄이며 읽은 책이다. 간만에 소설의 매력에 흠뻑 취했다. 몰입하기에 더할 나위 없었다. 소재도 신선할뿐더러 출간 즉시 영화화 결정이란 말을 이해하고도 남았다. 이것이 팩션의 매력이며 가능성이라 생각한다. 

 주인공 따냐는 역관인 아버지가 노서아 가비를 마시는 것을 보며 또 여러 나라의 말을 배우며 자랐다. 이후 아버지는 청나라 수행 길에 하사품을 훔쳐 달아나다 죽었다는 누명을 쓰게 되고 이후부터 따냐의 안락한 삶은 정지한다. 조국을 떠나 러시아까지 흘러가서 다양한 길 위의 삶을 살게 된 파란만장한 여인이 된다. 그리고 사랑이라 믿은 유일한 남자 이반과의 만남과 음모 등이 얽히고설켜서 진행은 급물살을 탄다. 그리고 후반부의 반전까지 정말이지 숨 가쁘다. 

 역사적 배경을 적절히 배치하여 당시 상황이 곳곳에서 드러나는데 흥미로운 건 역시나 고종이 커피를 좋아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따냐로 불리게 된 비운의 주인공이자 유쾌한 사기꾼과 고종은 커피라는 매개체로 연결된다. 고종의 바리스타이자 티타임의 친구가 된 것이다. 쓰고 검은 액체가 주는 향과 맛으로 마음을 달래기도 하고 나누기도 한다. 그래서 상황이 어수선하고 절박해도 이런 시간은 소중하고 정지한듯한 느림으로 다가온다.  

 이 한 작품만으로도 충분히 국내문학에서 김탁환이 차지하는 위치는 돋보인다. 이 밖에도 읽지 못했지만 리심이나 방각본살인사건 등의 줄거리와 소재 또한 훌륭하다. 팩션과 역사는 구별해야 하지만 역사의 사라진 공간을 재창조해낸다는 점에서 가치 있다. 그래서 이 작가를 앞으로 지켜보고자 한다. 문학적 가치라는 것은 깊이 있고 무거운 것만이 아니다. 자신만의 개성으로 역사를 돌아보고 재조합하는 힘이 있는 것도 재능이라 하겠다. 올여름 시원한 한국소설 한 편을 찾는다면 <노서아 가비>를 추천한다. 다만, 재미있게 즐기며 읽을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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