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버트 그레이프
피터 헤지스 지음, 강수정 옮김 / 막내집게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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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따분하고도 지루한, 그야말로 희망이라는 건 아예 찾아볼 수 없을것만 같은 마을 엔도라의 식품점 점원 길버트 그레이프.  답답하고 무기력한 시간을 보내는 길버트에게도 꿈은 있었다. 단지 그 꿈을 향해 다가가지 못한다는 것뿐. 어느날 눈앞에 나타난 베키라는 소녀로 인하여 그가 다가가는 꿈의 세계는 어떤 모양을 하고 있었을까?  모든 것을 포기해버린 채 살아가는 길버트의 가족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슴이 먼저 답답해져왔다. 책장을 찢어서라도 그들을 그곳으로부터 탈출시켜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이 그곳을 떠난다면 어디로 가야만 하는 것일까? 겨우 탈출했다고 생각했었던 길버트의 작은누나 제니스와 형 래리조차도 완벽한 탈출을 꿈꾸며 살아간다고 느꼈던 그 순간에 탈출만이 최선책이 아님을 알게 되어버렸다.

이 소설이 영화화되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 그리고 이 책을 손에 잡고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던 순간 나는 오래전의 영화 <포레스트 검프>가 생각났다. 아이큐가 75라던 포레스트가 단 하나의 소질이었던 달리기로 인하여 스쳐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과 웃음을 선사해주었던 영화. 어쩌면 이 책을 쓴 사람 역시 길버트 그레이프라는 청년을 통하여 우리에게 희망이란 메세지를 전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음대로 되는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는 곳에서, 오로지 떠나고 싶다는 느낌만을 전해주는 가족들 곁에서,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지옥같다고 생각하는 한 사람의 깊은 아픔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것들을 알아채기까지는 좀 오래 걸린듯 하다. 이런 류의 글을 읽다보면 왠지 가슴이 답답해져오는 것을 어쩌지 못하는 까닭이다. 내 속을 훤히 드러내는 것만 같아서 알 수 없는 두려움마져 느끼게 된다. 떠나고 싶고, 벗어나고 싶은 게 현실일까? 도무지 만족할 수 없는 게 나의 시간들일까? 떠날 수 없고,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무조건적인 일탈을 꿈꾸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둘은 아닐것이다.

혼자서는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이제는 더이상 어쩌지 못할 정도로 살이 찐 길버트의 엄마. 엄마가 움직일때마다 마루가 휘어진다는 그 설정이 내게는 너무나도 잔인하게 다가왔다. 모두를 버리고 망연히 목을 메어버린 남편에 대한 원망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어버렸던 것일까? 오래 살지는 못할거라던 지적장애아인 막내 어니가 열여덟번째 생일을 맞이하는 것을 보고싶을 뿐이라고 외쳐대던 그녀는 마음속에서 아직 떠나보내지 못한 남편을 향해 쉴새없이 원망을 퍼붓고 있었지. 자신으로부터의 빚장을 내려버려 아무도 들어오지도 못하게 만들어버린 그 엄마가 곁에 남은 아이들에게는 어쩌면 안스럽게도 보였을 것이고 한편으로는 엄청 화가 났을 것이다. 이 집구석이 너무 너무 싫다고 외쳐대던 동생 엘렌에게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너만 그런건 아니라고 말하던 길버트의 그 가슴속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이제는 떠나야겠다고 옷가지를 정리하던 동생에게 말없이 아버지의 사진을 건네주던 누나 에이미는 가슴속에 무엇을 품고 살아냈던 것일까?

베키.. 그녀는 정말 길버트의 말처럼 천사였을까? 아니 내게는 이 책을 쓰고 있는 저자의 모습처럼 느껴졌다. 누군가의 가슴속에서 무엇이 자라고 있는지를 알아챈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만큼의 관심과 배려가 함께하지 않고서는 있을수 없는 일이다. 계속 웃었다.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그런 웃음이었다. "아무도 네가 마지막으로 울었던 게 언젠지 기억하지 못해."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222쪽)  자신의 속내를 감추고 살아가는 사람이 어디 길버트 뿐일까마는  베키의 말을 통해 나는 나 스스로에게 조금씩의 최면을 걸기 시작했다. 길버트처럼 한걸음씩 빛을 향해 다가가고 싶었다. 누군가 손을 내밀어 빛으로 인도해주고 싶어하는 그 순간에... 울지 못하는 사람만큼 힘겨운 사람이 있을까? 그런 의문점을 찍어본다. 그 울음으로 인하여 자신이 무너져내릴까봐 차마 울지도 못한 채 바위같은 응어리를, 자신을 향한 원망을 안고 살아간다는 건 참으로 지독하고 잔인한 일임이 분명한데도 차마 내려놓지 못하는 그 무거움이라니.

"너는 우울해 보였어.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으니까. 너는 감정을 드러낼 때가 멋있거든."
"너는 스스로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해. 너 자신을 좋아하질 않아. 심지어 너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려고 하지도 않아."
"너 자신으로부터 그렇게 도망치려고 애쓰는데, 나한테서는 얼마나 빨리 도망치겠니." (359쪽) 


이십대의 어느날을 기억해낸다. 누군가가 내게 이렇게 물었었지. 지금 원하는게 있느냐고. 지금 가장 갖고 싶은게 무엇이냐고. 그때 나는 아마도 이런 대답을 했을 것이다. 사람이요! 내 대답에 그 사람이 박장대소를 하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 그럼 나를 가지면 되겠네? 그렇게 해줄수 있나요? 다시 물었더니 그 사람이 동그랗게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었다. 내가 필요한 사람이 되어줄 수 있다면 나는 정말 행복할텐데요.. 나를 알아주는 사람, 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나의 눈을 통해서 알아챌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줄 수 있나요? 내가 되물었을 때 그 사람의 웃음이 사라지던 그 순간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베키같은 그런 사람을 우리는 누구나 꿈꾸고 원하며 살아가지 않을까? 나 역시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하며.  늘 그게 그거같은, 그날이 그날같은 밋밋한 삶속에서 자극과 동시에 도움이 되어주는 그런 손길이 있다면... 아니 어쩌면 그런 사람이 주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것은 아닐까?  우리는 아니 나는 내가 보고싶은 것만 보고 내가 좋은 것만 느끼며 살아가려하는 까닭인지도 모를 일이다.

"너는 자신과 너무 동떨어져 있어" 
"감정. 길버트, 사람이라면 그게 있어야 해"
"넌 오래전에 감정을 느끼는 걸 그만뒀어.........."

"그래, 그건.... 왜냐하면 그건 음, 내가 살려고 기를 쓰기 때문이야. 모르겠어?"
"나도 느껴! 나도 감정이 있는 사람이라고!" (322쪽)

 살려고 기를 쓰기 때문이라던 길버트의 외침소리가 지금까지도 이렇게 귀에 들려오는 것 같다. 살려고 기를 쓰기에 우리가 잃어버린 아니 포기해버린 것들이 얼만큼이나 될까? 자신마져 속이며 살아가야하는 세상이 너무 처절할 뿐이다. 아무도 그렇게 살라고 말한 것도 아닌데... 이곳을 떠나 자유로워지는 꿈, 아니면 자기만 그대로 남아 있고 가족들은 전부 다른 사람들로 바뀐 그런 꿈.. 그런 꿈만이 길버트의 꿈이었을까? 아닐 것이다. 같이 자라고 같이 공부했던 친구의 모습을 보면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친구의 성공을 보면서 일찍 떠나버리지 못했던 것에 대해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길버트는 최선을 다했다. 시간이, 그를 스쳐가던 모든 시간들이 그를 조롱하며 제멋대로 흘러가버렸지만 그에게는 마음속에서 차마 버릴 수 없었던 그 무엇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토록 묵묵히 참아냈을 것이다. 베키는 단지 그 참아냄에 대하여 도를 넘으면 안되는거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마침내 그 거대한 몸을 이끌고 자신의 방, 자신의 침대로 올라가 잠이 든 엄마는 끝내 세상속으로 돌아오지 않았지만 길버트는 원망하지 않았다. 잘났든 못났든 그 사람의 삶을 향하여 손가락질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엄마의 그 오랜 아픔을 타인들로부터 지켜주고 싶어했던 길버트의 그 속내를 짚어본다. 마지막에 타올랐던 그 불길은 엄마의 아픔을 보호해줌과 동시에 남겨져야 할 그들 여섯남매의 희망 또한 보호해주리라. 다시 시작될 그들의 삶에 대하여 화이팅을 외쳐본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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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정말 사랑할 수 있을까
루이스 레안테 지음, 김수진 옮김 / 작가정신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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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너를 정말 사랑했을까>... 차라리 나는 이렇게 묻고 싶었었다. 그토록 열망했던 사람들이 서로를 곁에 두고서도 느끼지 못하는 그 순간이 너무 안타까웠던 탓이었을까? 하지만 나는 이내 <너를 정말 사랑할 수 있을까>라고 다시 고쳐 묻는다. 어쩌면 그들의 사랑은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되어지는 것일테니까.  그녀는 정말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이미 지나간 것들로부터 탈피를 끝마친 채 새로운 모습만을 안아든 두사람. 과연 그들에게 새로운 사랑의 기회가 다시 찾아와 못 다 이루었던 지난날의 사랑을 다시 채워갈 수 있을까?  하지만 저자는 그들의 사랑을 독자에게 맡겨버리고 끝내 알려주지 않는다.

몬세... 아무것도 부족함없이 지내던 그녀에게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사랑. 사랑이라는 이름은 열아홉살 철없던 그녀에게 있어 너무도 아름다웠고 황홀했다. 과감한 일탈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소중하게 안고 다니던 책들을 쓰레기통속으로 던져버릴 수 있게 만들었던 그 첫사랑의 설레임은 끝내 너무도 아픈 기억이 되어 그녀에게서 떠나갔지만 오랜 세월이 흘러가버린 어느날 느닷없이 빛바랜 사진 한장으로 되돌아온다. 그 사진 한장으로 인하여 남편과의 이혼을 앞둔, 열아홉의 딸을 교통사고로 잃어버린 힘겨운 자신의 현실을 잊은 채 옛사랑을 다시 갈망하게 되는 그녀... 그가 살아있다! 죽었다고, 이미 이 세상에는 없는 사람이라고 인정했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있음을 전해주었던 사진 한장이 그녀의 돌이킬 수 없는 여행의 시작을 예고한다. 그 사람이 나를 기억할 수 있을까? 내가 그사람을 다시 만난다면 알아볼 수 있을까?

사하라를 배경으로 했던 소설들이 책장을 넘기듯이 하나둘씩 내 기억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미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의 한토막들이 넘겨지는 책장위에 오버랩 되어왔다. 어린시절 함께 사랑했으나 소년은 전쟁터로 떠나버리고 그 소년을 기다리던 소녀가 숙녀로 변해가는 과정속에서도, 끝내 첫사랑을 놓치지 않은 채 그 사랑이 머물렀던 흔적들을 찾아다니며 수소문하던 여정을 그렸던 어떤 영화를 생각한다. 어딘가에 그가 살아있다는 자신의  알 수 없는 그 느낌하나만을 믿은 채 시작되어졌지만, 끝내는 첫사랑을 찾아내어 기억을 잃어버린 채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그 사랑에게 다가가던 그녀의 여린 치맛자락이 바람이 흔들리고 있었지... 우리의 주인공 몬세 역시 열아홉살의 첫사랑 산티아고를 찾아 사하라로 떠나지만 예기치 못했던 상황들이 그녀를 生과 死의 갈림길에 놓이게 했었다. 너무나 많은 세월이 지나가버려 서로를 곁에 두고서도 알아보지 못하는 두사람의 그 애절함은 이미 마음과 육체가 불구가 되었어도 끝내 놓칠 수 없었던 몬세에 대한 산티아고의 사랑을 속깊이 그려주고 있었던 마지막 장면에서 더욱 절절하기만 하다. 이미 오래전에 잃어버렸을 기억을 다시 불러내는 휘파람소리라니! 마치도 영화를 보고 있는듯한 그 장면이 오래도록 내 상상을 자극했다.

사하라가 스페인의 마지막 식민지였던가? 그 전쟁을 고스란히 떠안은채 살아가야 했던 서민들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참혹하기만 하다.  그 참상이 그들의 종교적인 이념과 맞물려 내게는 너무도 비참한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었다. 스페인 최후의 식민지 서사하라를 둘러싸고 사하라인들과 스페인, 모로코, 모리타니아가 영토 분쟁을 벌였고, 스페인과 모리타니아가 그곳에서 완전히 철수하고 물러났지만, 모로코와 폴리사리오 인민해방전선 간의 영토 분쟁은 삼십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나니 그들의 삶이 어쩌면 저리도 아프게 느껴지던지...

너무나도 사랑했던 몬세를 만나 보지도 못한채 지원병이 되어 그 전쟁속으로 뛰어들었던 산티아고는 과연 어떤 심정이었을까? 수도없이 전화를 했지만 단 한번도 목소리를 듣지 못했고, 수도없이 편지를 썼지만 단 한번도 답장을 받아볼 수 없었던 산티아고의 절박함이 절절하게 다가온다. 세상 모든것이 그녀였으나 세상 모든것이 고통으로 산화되었을 그 순간들.. 아주 사소한 오해로 인하여 순간의 감정을 이겨내지 못했던 그 이별이 그들에게 남긴 것은 너무도 커다란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전쟁속에서 산티아고에게 다시 찾아 온 또하나의 사랑은 그에게는 하나의 버팀목이 되어주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낯설었지만 왠지 모를 친근감을 느꼈던 사하라인들의 그 우직함에 마음이 움직여, 그들과의 끈끈한 유대감을 쌓아가며 서서히 사하라인이 되어가던 산티아고.. 전쟁의 혼란을 틈타 병영을 이탈했던 그가 사하라인들의 생활속에 동화되어가는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끝내는 그들의 탈출을 돕던 중 폭격에 맞아 팔을 잃어버리긴 했지만 말이다.

사실 이렇다하게 특별한 것이 없었던 소재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알 수 없는 끌림을 느끼게 해 주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책을 읽으며 동시에 영화를 한편 보고 있는듯한 착각이 들기도 했다. 정말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도 없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그녀가 정말 그를 다시 사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색바랜 사진같이 오래되어버린 그들의 사랑이지만 다시 시작되어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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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피행
시노다 세츠코 지음, 김성은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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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탈이었을까? 아니 단순히 일탈이라고하기엔 너무도 가슴이 아프다. 잠시 떠났을뿐이라고 말하기에는 그녀의 가슴속 우물이 너무 깊기만 하다. 무엇이 그녀를 저토록 무모한 도피행을 감행하게 했을까?  무엇이 그녀를 그토록까지 깊은 서글픔에 빠지게 했을까? 아내라는 이유로, 엄마라는 이유로 살아가야 하는 여자에게는 살아가면서, 세월의 무게를 더해가면서 왜 나자신에 대한 감정이 삭혀져야만 할까?  이 책속에서 듣는 말들이 곧바로 내게 가시가 되어 박혀버린다. "엄마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 엄마가 사회생활을 해본 적이나 있어?", "엄마는 맨날 집에서 일만 하니까..."  그랬지, 엄마는 잘 알지도 못하고 맨날 집에서 일만 했지.. 하지만 누구를 위해서였을까? 커가는 아이들이 가슴속에서 하나둘씩 떠나려 발버둥칠때마다 상처를 감싸쥐고 우는 건 엄마였는데... 엄마에게 감히 따지지 마라, 누가 그렇게 살라고 했느냐고.

늙은 개 포포가 그만 옆집아이의 목을 물어 죽게 만들고, 어찌되었든간에 그 죽음을 불러왔던 원인을 외면해버린 채 그것이 느닷없는 사회적 이슈로 떠올라 모든 이들의 시선이 원망스럽게 다가설 때, 단순히 늙은 개 포포를 좀 더 살리기 위해서 그녀가 야밤에 도주를 결행했던 건 아니었으리라.. 그 늙은 개 포포에게는 9년이라는 기한을 다 채우고도 기약되어진 시간이 단 1,2년에 불과했었다. 모든 원망을 뒤로하고 안락사를 시킬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남편의 통장과 인감을 훔쳐 도피하던 그녀를 보면서 나는 내내 좌불안석이었다. 이 세상이 그렇게 그녀를 내버려둘 것 같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운이 좋았던 것일까? 트럭기사들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끝내는 예정되어지지 않았던 장소까지 도피하게 되고 어느새 새로운 둥지를 틀게 되니 말이다. 어찌되었든 그렇게라도 둥지를 틀게되는 그녀의 도피행을 보면서 내심 안심이 되었다. 안타깝지만 그녀의 말처럼 그녀와 포포에게는 앞으로의 일은 없을테니까...

남편을 위해 시간을 버렸고, 커가는 아이들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모두 써버렸던 그녀에게 남은거라곤 '주부'라는 이름의 껍데기뿐이다. "혼자 사는 게 살벌할 때도 있지만 가족에게 둘러싸여 있는데도 고독한 건 더 살벌해요" 사정이 있어 다른 곳에 살 수 없는 인간만이 정착하는 곳, 영혼의 영역.. 하지만 모두가 그곳을 전원주택이라고 부르는 곳에 그녀가 떠밀리듯이 들어왔을 때 이웃집 남자 쓰쓰미는 그렇게 말했었다. 자신이 세를 내고 빌렸던 그곳에서 그야말로 아들집에는 있을 자리가 없었던, 그랬기에 자살할 수 밖에 없었던 할머니가 살았다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굳이 그녀가 그곳을 떠나지 않고 눌러 살았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이미 그녀에게도 자살한 할머니처럼 돌아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어느날 문득 그녀를 찾아왔던 것은 평온...이라는 거였다. 자신만의 영역에서 아무것에도 쫓기지 않고 자신과 맞닥뜨릴 수 있는 시간을 가질수 있다는 것, 자기 자신에 대하여 다시한번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에 대하여..

익숙해져 있던 것들을 모두 버렸다. 남편도 아이들도... 나에겐 가족이 없다고 담담하게 말하던 그녀, 타에코의 가슴속에서 서서히 자라나던 평온함이 뿌리를 내릴 즈음, 급격하게 노화가 시작되는 포포.. 그녀의 마지막 거처가 너무도 안스러웠다. 마지막 거처에 와서 둥지를 틀기 전까지는 그녀와 포포는 별개의 의미였지만 그 둥지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동안 그들은 하나가 되어갔다. 늙고 병든 포포처럼 죽어가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그래, 세상인심이 그렇지 뭐.. 했다. 그럴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일테니...  함께 있다는 그 느낌하나만으로도, 체온과 눈길만으로도 소리없는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그녀 타에코와 포포. 사람은 사람의 마음을 배신하지만 개는 배신하지 않아요... 쓰러진 그녀를 병원으로 이송해놓고 쓰쓰미가 불러모았던 그녀의 가족들은 과연 그녀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수술을 받고 이미 1,2년밖에는 살 수 없는 아내였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를 그렇게까지 되도록 내버려둔 남편에 대하여 배신감을 느껴야 했다. 쓰쓰미의 예감처럼 어쩌면 그남자는 그녀를 떠나보낸 후의 자신의 삶을 설계중이었을것이다. 참 씁쓸했다. 그녀를 향한 애잔함이 더 깊어지고 말았다.

묵은지처럼 시어빠진 후에야 꺼내어 보게되는 여자의 시간들, 아니 주부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의 시간들... 그 시간들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누가 그렇게 살라고 했느냐고 되물어올 수도 있겠지만 누가 그렇게 살라하지 않아도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 주부라는 울타리일테니 어찌하랴... 작금의 현실을 바라볼 때 많이 달라져가고 있다고 느껴지지만 그래도 아직은 그 울타리가 견고하게 보이는 것을... 선진국이든 후진국이든 남편과 주부는 뗄래야 뗄수 없다. 아이와 주부 역시 도저히 떼어낼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설혹 꿈을  키우기 위해서, 아니면 그저 주부로써 지내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져서 자신만의 삶을 살수 있는 맞벌이를 한다고해도 그 주부라는 울타리를 벗어날 수는 없다. 고무줄처럼 늘여진 그 울타리안에서 모든 일이 진행되어지는 것일테니 말이다. 묵은지처럼 시어빠진 시간이라해도 맛있게 나눠 먹을 수 있는 그런 존재를 주부는 갖고 싶었을게다. 그녀, 타에코의 가슴속 깊디 깊은 우물에서 끌어올려진 그 시간들이 너무도 서글프다.

이 작품속에서 만나는 타에코의 도피행은 단순히 그녀 하나만의 문제는 아닌듯 보여진다. 주부라면 정말 공감할 수 있는 부분들이 너무나도 많다. 아니 어쩌면 타에코처럼 살아가고 있는 주부들도 많을 것이고, 타에코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주부들도 많을 것 같다. 소통의 부재가 오직 한곳뿐일까? 함께 있으되 서로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함께 있으되 서로의 마음을 알려고조차 하지 않는 소통의 부재... 문득 일전에 읽었던 책의 한귀절이 떠오른다.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사랑이라던...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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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빈곤대국 아메리카 르포 빈곤대국 아메리카 1
츠츠미 미카 지음, 고정아 옮김 / 문학수첩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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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미국... 세계를 쥐고 흔든다는 나라.. 어찌보면 모든 것의 시작일것처럼도 느껴지는 나라.. 웬만한 개도국이라면 그들의 길을 따라 걸어가지 않을까 싶은 그런... 그런 나라에 한번쯤은 가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참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읽으면서 요즘의 중국을 떠올려보게 된다. 메이드 인 차이나의 굴욕에 대하여, 그리고 그와 똑같은 상황을 겪어냈을 메이드 인 코리아에 대하여.. 그랬던 우리도 지금은 값비싼 임금앞에 무너져 많은 것들을 빼앗기고 있다는 말을 심심찮게 보고 듣게 된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었듯이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이 대한민국으로 찾아오는 타국인들의 삶을 매스컴을 통해 바라볼 때마다 지구촌이라는 단어앞에 무안해지곤 했었던 기억도 있다. 무엇이 우리들에게 이처럼 가혹한 현실을 만들라하는가!

책을 읽으면서도 가슴 한쪽에서 스멀거리는 분노를 어쩌지 못한 채 애를 태워야 했다. 힘없는 나라 약소국의 서러움이겠거니 생각하면서 저들의 이해득실앞에 무너져가는 우리의 아이들이 떠올랐던 까닭이다. 비만아 대책... 결국 저들의 이윤만을 따지는 시장원리에 멍들던 기업들이 희생양을 찾아 저소득층이나 개도국으로 방향전환을 했다는 것은 그리 놀랄일도 아니겠지만 그런 것들을 너무도 무책임하게 저항감없이 받아들이는 입장에 대해서는 개탄해마지 않을수가 없다는 말이다.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미국이란 나라, 아니 이윤을 추구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것들이 가혹하리만치 냉정하기만 하다. 평균 개인소득이 하위에 속하는 저소득층의 자녀들에게 실시되는 무료.할인 급식제도의 잘못된 점들에 대하여 정부가 책임지기를 꺼려한 채 외면해버렸다는 사실조차도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건 정말 슬픈일이 아닐수가 없다.

이 책속에서 만날 수 있는 주제를 나름대로 대략 기억해보자면 서글프게도 우리의 현실과 맞닥뜨려지는 점들이 참으로 많다.  푸드편을 보자면 이렇다. 빈곤이 만들어낸 비만이라거나  왜 빈곤층의 아이들에게 비만아들이 더 많은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책을 읽다보면 남의 이야기만도 아닌것 같다.  패스트푸드제품에 찌들어가는 지금의 우리 아이들에 대해 생각해보라는, 아프리만치 따끔한 질책처럼도 느껴지니 말이다.  그토록 잘산다는 선진국의 대표급인 미국이라는 나라에서조차 기아에 허덕이는 국민들이 점점 늘어간다는 것은 모순일까? 아니 단지 우리가 모르고 있는 저들의 모습일 뿐일게다.

얼마전 미국을 강타했던 뉴올리언스의 재난을 기억한다. 그 이재민들이 지금은 고향땅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버려졌다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세계에서 제일 비싼 의료비로 인하여 중류층이 몰락해가고 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병원이 하나의 주식회사처럼 운영되어가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서 정말 이해하기가 힘들었지만 저자의 날카로운 지적앞에서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수가 없었다. 균형적인 식사와 운동, 수면으로 충분히 지켜낼 수 있는 건강마져도 의료비가 너무 비싼 나머지 건강보조제에 의존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은 그야말로 씁쓸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국가가 도와주지 않으니 아프면 병원가서 치료할 엄두조차내지 못한다는 그들.. 그 건강보조식품의 폐해가 날로 늘어만가고 있다는 데 우리는 어떤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너무하다싶을 정도로 건강보조식품을 대하는 우리의 강박관념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국가시스템이나 사회적인 구조가 그들과 똑같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보여지는 결과가 비슷한 걸 보면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저들을 닮아가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까닭일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무서웠던 것은 바로 교육에 대한 문제였다. 전쟁마져도 민영화되어가는 저들의 속셈을 보면서 왠지 소름이 돋기도 했다. 학자금 대출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저들의 젊은이들이 이제 더이상은 오갈데가 없어 부당 징병 정책의 희생양이 되어야 하고, 대학을 졸업하여 졸업장을 받았다한들 제대로 된 일자리하나 구하기가 너무도 힘겹다는 저들의 젊은이들.. 하지만 그것은 저들만의 문제는 아닐것이다. 지금 우리의 젊은이들조차도 어쩌면 그 절차를 밟아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경제적인 어려움에서 탈출하고자 혹은 좀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군인이 되어야만 했던 젊은이들이 결국은 병자가 되고 낙오자가 되고 노숙자가 되어 처음보다 못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그 밑바닥에는 저들을 보살피고 이끌어주어야 할 국가의 어긋난 시스템들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말앞에서는 정말 할 말이 없었다.  어쩌면 우리라고해서 저렇게 되지 말란 법도 없지 싶었던 때문이다.  민영화라는 틀에  맞추기 위해 두리번거리는 우리의 국가적 시스템도 모른척 할 수 없었던 때문이다. 카드빚에 허덕이는 우리의 젊은이들만을 탓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민영화된 전쟁’.. 세계 여러나라의 근로 빈곤층들이 지탱해나가고 있다는 전쟁의 현실.. 저 밑바닥에 숨어 자신의 실체는 드러내지 않은 채 하나의 기업이라는 이름만을 내세워 힘없고 돈없는 세계의 빈곤층들을 겨냥하여 끝도없이 유혹의 손길을 내미는 저들의 악마적인 모습.. 그 악마가 내미는 손을 잡지 않을 수 없는 그들의 서러움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싶었다. 사람의 목숨을 파리만도 못하게 여긴다는 저들의 웃음뒤에 숨어 버린 나라의 이해타산적인 비굴함을 어이할까.. 개인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정말 괜찮은 일자리가 있는데 말이죠” “이것은 전쟁이 아니라 파견이라는 순수한 비즈니스입니다” 일하고 싶지만 일자리가 없고 겨우겨우 풀칠해가며 살아가고 있는 전 세계의 빈곤층을 향한 저들의 비열함앞에서는 억울하면 출세하라던 말이 떠올라 내심 한숨을 내쉬게 된다.  책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하나의 거대한 눈길.. 1984라는 소설속의 빅브라더.. 참으로 무서운 현실앞에서 무엇을 탓하고 무엇을 원망하랴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또 왜일까?  어느 누구도 이런 세상을 만들라고 등떠밀지 않았을거라는 사실이다. 테러보다 무서운 민영화라는 말을 들으면서 앞으로 더 힘겨운 세상을 살아내야 할 우리의 아이들을 어이할까 싶었다.

저자 후기에서 말하고 있듯이 중요한 것은 그 적을 결코 잘못 알아서는 안 되는 것 이라던 말이 가슴을 찌른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말도 있지만 겉으로 보여지는 번지르르함보다는 그 속에 내재되어져 있는 성질을 알아내려고 노력하는 것만이 살 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국가적 시스템에 손발이 묶인 채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는 미디어의 역할에 대해서도 저자는 아프게 꼬집고 있다.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인간이 '생명'이 아니라 '상품'으로 취급되어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결코 입을 다물고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책장을 덮기전 저자가 말하고 있는 뼈아픈 결론을 여기에 옮겨 적으며 다시한번 기억해 두고자 한다. 그 가슴아픔에 대하여... /아이비생각

무지나 무관심은 '바꾸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공포를 낳고, 언젠가는 무력감이 되어 우리의 힘을 뺏는다. 눈을 감고 입을 다문다면 우리는 패할 것이다. 그리고 어른들이 스스로 무대에서 내려왔을 때가 아이들에게 있어서 절망의 시작이 된다. 현상이 괴로울수록 우리는 시험당한다....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차세대에게 건네줄 수 있는 것은 한없이 귀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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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포리스트 카터 지음, 조경숙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0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제나 자기가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쌓아두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어. 그러고도 또 남의 걸 빼앗아오고 싶어하지. 그러니 전쟁이 일어나고 ... 그리고나면 조금이라도 자기 몫을 늘리기 위한 기나긴 협상이 시작되지. 자기가 먼저 깃발을 꽂았기 때문에 그럴 권리가 있다고 하지.. 하지만 그들도 자연의 이치를 바꿀 수는 없어... 할아버지가 작은나무에게 들려주었던 저 이야기속에는 지금의 세상을 만들어가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그런데 나는 가끔씩 의문점이 생기곤 한다. 종종 다큐멘터리라는 공간속에서 보여지는 사람들의 모습때문이다. 그들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과 함께 숨쉬고, 자연속에서 자연이 주는 것만을 받아 먹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들에게는 그들 나름대로의 사회도 있고, 그들 나름대로의 규칙도 있고, 그들 나름대로의 질서도 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은 그들에게도 모두 있다는 말이다. 굳이 없는 것을 이야기하자면 우리가 감히 문명이라고 말하는 그런 것들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토록 아름답게 살아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이 책은 그다지 많은 기대를 하지 않고 선택했던 책이었다. 그저 그런 자기 계발서류의 이야기겠거니 생각했었다. 그랬던 내가 작은나무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을 흘려야 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책속의 소년 작은나무에게  너무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작은나무의 발소리와 눈길을 따라 자연속에서 생활하다보면 우리가 정말 얼마나 커다란 잘못을 저지르며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 다시한번 돌이켜 보게 된다. 보편적이라 할 수 있는 우리의 관념으로 본다면 사생아라는 테두리에 갇혀 너무도 힘겨운 시간들을 버텨내야 했을 작은나무가 체로키족인 할머니 할아버지를 따라 숲으로 간 건 너무나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할아버지를 따라 산에 올라 어두워지는 밤하늘에 하나둘씩 별들을 그리며 잠이 들 준비를 하는 산과 아침을 깨우며 벌겋게 솟아오르는 태양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던 작은나무는 그야말로 축복받은 아이였다.

사람들은 누구나 두개의 마음을 갖고 있단다. 하나의 마음은 몸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꾸려가는 마음이어서 몸을 위해 잠자리나 먹을 것 따위를 마련할 때 써야하니 자기 몸이 살아가려면 누구나 이 마음을 가져야 하지..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런것들과는 전혀 관계없는 또 다른 마음이 있단다. 영혼의 마음이지. 만약 몸을 꾸려가는 마음이 욕심을 부리고 다른 사람을 해칠 생각을 한다면 그 영혼의 마음은 점점 졸아들어서 작아지게 되지. 영혼의 마음을 잃게 되면 그런 사람들은 살아 있어도 죽은 사람이 되고 말아.. 상대를 이해하는 데 마음을 쓰면서 영혼의 마음을 더 크고 강하게 만들라던 할머니의 교육. 욕심을 부리지 않아야 비로소 이해라는 것을 할 수 있으니 이해와 사랑은 당연히 같은 것이라고 가르쳐주셨던 할머니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는 작은나무가 아닌 내 마음속을 아프도록 깊게 각인이 되었다. 영혼의 마음이 밤톨만큼 작아지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살아 있어도 죽은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너무도 귀한 가르침 앞에서 나는 숙연해졌었다. 우리가 살면서 우리 곁을 스쳐지나는 계절들을 온전히 느끼면서 살아가는 순간이 얼만큼이나 될까? 그 한순간마다 함께 호흡하고 함께 느낄 수 있는 감정은 또 얼만큼이나 갖고 살아가는 것일까?  단순히 계절만이 아니라 우리곁에서 함께 숨쉬고 살아가는 이웃들에 대해 얼만큼이나 제대로 사랑하고 이해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단순히 살기에 바빠서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도 미안하고 죄스럽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통해 작은나무에게로 전해지는 자연의 속삭임을 한번쯤은 온전하게 나도 느껴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났다.

수박을 두드려볼 때 알아두어야 할 점...'팅' 소리가 나면 아직 하나도 익지 않은 것이고, '탱' 소리가 나면 지금 익고 있는 중이며, '텅' 소리가 나는 수박이라야 완전히 익은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진리가 그러하듯이 이렇게까지 해도 수박을 잘랐을 때 원하던 결과를 얻을 가능성은 항상 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작은나무는 과연 '팅','탱','텅' 소리에 얽힌 삶의 진리를 터득했을까? 그렇게까지 하고도 원하는만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이며 살아왔을까? 세상의 모든 일중에서 내가 원하는만큼의 결과를 안아들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거라는 생각을 한다. 설령 원하는만큼의 결과였다고 해도 그것에 대해 백프로 만족하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작은나무가 할머니 할아버지에게서 배우는 삶의 지혜는 욕심버리기였다. 자신에게 꼭 필요한만큼만 갖기.. 지금 필요한 것만 갖기..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기다릴 줄 아는 마음이 필요하고 아주 작은것들조차도 사랑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이기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없을게다. 하지만 자연속에서 숨을 쉬며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힘을 키워나가는 작은나무의 모습이 정말 아름답게 다가왔다.

그렇게 아름답게 커가고 있던 작은나무에게도 시련이 찾아온다. 사회라는 커다란 악마가 의무라는 올무를 작은나무의 목에 걸었던 거다. 제대로 된 교육을 시키지도 않고 아이를 혹사시키고 있다고  고아원에 수용시켜버린 것이다. 문득 할아버지와 함께 숲속에서 생활하던 하이디라는 어린 소녀를 떠올린다. 그 소녀가 숲을 떠나 문명의 그늘에 가려졌을 때처럼 그랬다면 괜찮았을까?  느닷없이 자신을 가둔 그 고아원에서조차 작은나무는 오래된 떡갈나무와 대화를 나누며 바람을 통해 자신이 있던 숲의 소식을 전해 듣지만 작은나무에게 가해지던 그 참혹한 매질의 흔적때문에 나는 기어이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만약에 작은나무가 다시 숲으로 돌아가지 못했다면 내 가슴속은 아마도 눈물바다가 되었을 것만 같다. 작은나무야 미안해!

행복했던 불행했던 계절은 바뀌고 세월은 간다. 죽음의 계절속에서 사랑했던 사람들을 하나씩 보내야 하는 아픔을 겪게 되는 작은나무가 나는 너무도 안스러웠다. 아직은 배워야 할 것이 너무도 많은데... 아직은 곁에 있어주며 안아주어야 할 사람이 필요한데... 하지만 작은나무는 많이 울지 않았다. 네가 나무들을 느끼듯이, 귀기울여 듣고 있으면 우리를 느낄 수 있을 거다. 널 기다리고 있으마. 다음번에는 틀림없이 이번보다 더 나을 거야. 모든 일이 잘될 거다... 작은나무의 곁을 떠나는 사람들이 모두 그랬다. 다음번에는 틀림없이 이번보다 더 나을거라고.. 모든 일이 다 잘될거라고.. 할머니를 보내드리고 남은 겨울을 그곳에서 보낸 작은나무는 봄이 오자 길을 떠났다. 아득히 먼 서쪽 산들 너머에 있다는 인디언 연방을 찾아서. 가면서 함께 동행했던 두마리의 개 블루보이와 리틀레드를 묻어주게 되지만 작은나무의 가슴속에는 그가 떠나왔던 숲의 모든 것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한줄기의 희망조차도 버려지지 않은 채...

가을은 죽어가는 것들을 위해 정리할 기회를 주는, 자연이 부여한 축복의 시간이다. 이렇게 정리해나갈 때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했어야 했던 온갖 일들과.... 하지 않고 내버려둔 온갖 일들이 떠오른다. 가을은 회상의 시간이며.... 또한 후회의 계절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하지 못한 일들을 했기를 바라고... 하지 못한 말들을 말했기를 바란다.... 나의 조그만 버릇중에 하나가 책을 잡으면 조급증이 인다는 것이다. 빨리 읽고 싶다는 조급함에 어떤 때는 숨도 쉬지않고 읽어내려갈 때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어떻게하면 좀 더 늦게 읽을 수 있을까 조바심이 났다. 한장 한장 넘겨지는 책장마다 왜 그리도 아쉬움이 느껴지던지... 그 아름다운 말들을 한번 더 읽고 또 읽고... 그 아름다운 문장속에 숨겨져 있는 풍경과 의미들을 조금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욕심은 또 왜 그렇게 컸었는지... 숲을 떠나 어쩔 수 없이 이 문명의 사회속으로 되돌아와야 할 작은나무에게 전해 줄 따스함 한자락을 우리가 품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작은나무가 들려주었던 그 따스함에 대해 우리가 먼훗날까지 잊지않고 간직할 수 있다면 말 그대로 살 맛나는 세상이 다시 펼쳐지지 않을까?  이 가을에 작은나무를 만난 것이 나에겐 행복이었다. 작은나무와 이야기할 수 있었던 시간들 또한 나에겐 행복이었다.  그 따스함을 내 가슴속에 영원히 간직하고 싶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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