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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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우리가 흔히 하는 질문중에 이런게 있다. "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면 어느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 , "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뭘 하고 싶어? "  그런데 이 책은 그것을 뛰어넘은 채 당신의 시간이 거꾸로 간다면 어떻겠느냐고 묻고 있다. 한번 생각해본다. 정말 나의 시간이 거꾸로 간다면 어떨까? 내가 살고 있는 이 싯점부터 다시 거꾸로 돌아간다면 어떨까? 부정도 긍정도 하지 못한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길을 고스란히 되돌려 거꾸로 가야한다면 그것은 반대일것이고 무언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길을 선택해서 거꾸로 돌아간다면 그것은 딱히 싫지만도 않은 것 같다. 사람이 자신이 살아가야 할 삶의 여정을 선택할 수 있다면 이런 생각도 고민도 하지 않겠지 싶다. 그런데 나는 이쯤에서 저런 기발한(?) 제목을 불러올 수 있는 생각이 왜 들었을까 궁금해진다.

F.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를 빼놓고 작가에 대해 알고 있는게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망설임없이 말할 수 있는 답이 있기는 할까? 이 책을 만나고서야 나는 피츠제럴드라는 사람의 이력에 대한 궁금증을 온전히 풀게 되었다. 이 책속에서 만날 수 있는 젊은 시절의 방황이라거나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허탈함,  마음처럼 되지 않는 냉혹한 현실에 대한 공허함등이 실제적으로 작가가 겪었던 일과 일치한다는 것이 일단은 놀랍다. 너무나 세속적이면서도 너무나 현실적이었던 그의 생활패턴과 삶의 여정이 왠지 낯설지 않게 다가온다. 아내 젤다 피츠제럴드와의 만남과 이별 그리고 결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나 결혼생활이 그에게 가져다 준 빈곤의 나락속에는 헤어날 수 없는 인간의 욕심과 허영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아 서글프기도 하지만 말이다.

첫작품으로 등장하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서 벤자민 버튼이 살아냈던 시간들이 황당하게만 보여지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자신의 인생이 끝나야 할 싯점에서 태어나 태어나야 할 싯점에서 죽는다는 것은 살아보지 않고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벤자민 버튼의 시간들이 그리 당혹스럽게만 보여지지 않는 것은 아마도 그가 살아냈던 젊은 시절의 욕망때문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사람은 누구나 변화에 반응하게 되어 있다. 그러니 그 변화에 대처해나가는 벤자민 버튼의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이야기 한편으로 자신의 삶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되는 계기를 갖을 수 있다는 건 어쩌면 행복한 일이다. (요즘 한창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는 동명의 영화는 벤자민 버튼의 이야기를 어떻게 만들어냈을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책속의 작품들중에서 젊은시절의 방황과 거기에 따른 책임을 보여주었던 <젤리빈>,  자신의 욕심을 버린 후에야 제대로 된 사랑을 만나게 된다는 메세지가 보여지던 <낙타 엉덩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꿈꿔봄직한 부에 대한 환상의 세계를 그려주었던 <리츠칼튼 호텔만 한 다이아몬드>, 사랑의 허망함속에서도 끝내는 그 사랑의 끈을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 인간의 내적 외로움을 알게 해 주었던 <행복의 잔해>를 통해 전해지던 메세지의 여운은 참 괜찮았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작가에 대해 혹은 작품에 대해 그다지 큰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습작노트처럼 보였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하나의 작품이 나오기 위한 구상정도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의 말미에 붙어 작품에 대한 생각을 달리 할 수 있게 도와주었던  작가의 말이나 옮긴이의 말, 작가연보가 너무나도 고맙다. 또한 편집해준 출판사에도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작품의 연이은 실패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 그리고 아내 젤다의 병으로 절망에 빠진 피츠제럴드가 회복 불가능한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할리우드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는 등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그가 이 책을 통해 보여주고 싶어했던 것들은 참으로 많아 보였다. 힘겨웠던 작가의 여정이 그대로 녹아든 듯한 느낌을 전해주기도 했고... '재즈시대의 이야기'들이라고 평했던 옮긴이의 말은 차치하고라도 피츠제럴드와 젤다 피츠제럴드가 실제적인 생활속에서 보여주었다던 파격과 방종한 기행이 그 시대적인 정신세계를 그대로 반영한 듯하여 남겨지는 여운이 씁쓸하기도 하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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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00
허균 지음, 김탁환 엮음, 백범영 그림 / 민음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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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젼
됴션국셰둉대왕즉위십오연의홍희문밧긔한재상이잇스되셩은홍이요명은문이니위인이쳥염강직하여덩망이거록하니당셰의영웅이라일직용문의올나벼살이할림의쳐하엿더니명망이됴졍의읏듬되매....

책 뒷편의 글을 옮겨본다. 아래아를 사용해야 할 곳에서 쓰지 못했으니 물론 제대로 옮긴것은 아니다. 처음으로 보게 된 홍길동전의 영인본이라 한다. 책의 설명에 따르자면 영인본은 행갈이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하는 우종서(右縱書)....라고 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뒷장부터 거꾸로 읽어올라오는 게 마냥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한번 읽어보자는 마음에 몇장 넘겨보았지만 영 쉽지가 않다. 아마도 현대적인 글맞춤법에 익숙해진 탓이리라 여겨진다. 이 책속에서 만날 수 있는 홍길동전은 세가지나 된다. 그 하나는 홍길동전 완판이요, 또하나는 홍길동전 경판이요, 마지막 하나가 바로 홍길동젼 영인본이다. 거기다 완벽한 보너스까지 곁들여져 있다. 허균이라는 작가 연보가 그것이요, 김탁환님의 작품 해설까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니.... 홍길동전이라고 하면 바로 이 말부터 생각난다. 서자로 태어난 홍길동의 배경이 아마도 가장 큰 주제로 여겨지는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가장 강렬한 메세지를 전해주었던 대목이지 싶어서 그렇기도 하다. 그런데 나는 부끄럽게도 이 책을 통하여 새로운 사실을 더 알게 되었다. 홍길동이 서자로 태어나 그 서러움을 달래지 못하고 집을 떠나 의적이 되었다는 내용이야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겠지만 제도로 옮겨가는 이야기나 울동을 죽이고 백씨처녀와 조씨처녀를 부인으로 맞이하는 이야기, 율도국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 이 책을 통해 자세히 알게 되었으니 정말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완판을 읽고 다시 경판을 읽으면서도 못내 그 점이 아쉬웠다. 그래서 연거푸 두번을 읽어야 했으니... 정말 새롭게 다가온 홍길동전이 아니었나 싶다.

이 책에서는 시대적인 오류라 칭했던 장길산.. 그 <장길산>을 신문연재소설로 보다가 다시 책으로 나왔을 때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주저없이 다시 <장길산>을 읽었던 그 때가 생각나는 것은 아마도 홍길동에 대해 너무도 몰랐던 미안함 때문이기도 한듯 하다. 천하게 태어난 장길산이나 서자로 태어난 홍길동이나 처지는 비슷하겠지만서도 두 사람을 표현한 대목들은 너무도 달랐다. 둔갑술에 축지법까지 쓰는 홍길동을 보면서 조금은 현실적이지 못하다 생각을 했었는데 의외로 홍길동이 만들어진 인물이 아니라 연산군 시절 실존 인물인 도적떼의 두령 홍길동이었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었다는 게 나를 너무도 허탈하게 만들기도 했다. 또한 율도국이란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허균의 관념에 대해 알게 되니 너무도 새롭기만 했다.

얼마전에 읽었던 <라오찬이야기>가 떠오른다. 중국의 견책소설이라던 소설.. 우리나라의 사회소설이라고 일컬어진다는 홍길동전에도 비틀어진 조선 사회에 대한 비판과 탐관오리들에 대한 원망, 숭불정책이 나은 잘못된 승려들의 비리등 많은 것이 담겨져 있다. 어디 홍길동전뿐이겠는가? 찾아보자면 이 책처럼 서자를 차별하는 것이라거나 고관대작들의 횡포라거나 조정의 일을 보는 벼슬아치들의 무능함, 무사안일주의에 대한 것등 조선시대의 어긋난 사회상을 그리고 있는 소설은 참 많을 것이다. 백성의 입장에서 그런 문제들을 비판하고 풀어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사회소설이 보여주는 또하나의 매력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고전을 읽고 싶다는 욕심으로 평소 민음사에서 출판되어지는 세계문학전집을 눈여겨 보았었는데 이번에 홍길동전이 나왔다는 소리에 내심 반갑기도 했다. 제대로 된 우리의 고전 또한 만나고 싶다는 욕심이 앞섰던 까닭에 주저없이 홍길동전을 택하게 되었다.  원본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이렇게 쉽게 풀어쓴 우리의 고전을 많이 만나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민음사에서 앞으로 우리의 고전도 많이 보여준다고 하니 참 좋은 일이지 싶다. 다음 작품을 기대해 본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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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 환상문학전집 11
필립 K. 딕 지음, 이선주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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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드 러너>.. 내가 이 영화를 보았던가? 찾아보니 보긴 보았던 것 같다. 그런데 왜 남아있는 느낌이 없지? 다시 생각해보니 약간의 느낌은 남아 있다. 마지막 장면이었던 것 같다. 건물의 옥상에서 떨어지려고 하는 남자를 위에 서서 바라보고 있는 또 한사람의 눈동자. 그 눈동자속의 흔들림. 어느 순간 매달려있던 사람을 들어 올리고 떨어져내리던 장면.. 아하, 바로 그 영화였군! 그제사 생각이 난다. 평균수명을 늘릴 수 없다는 것이 그에게는 하나의 절망이었을 것이다. 기대했던 것에 대하여 더 이상의 희망을 갖지 못할 때 살아야 할 이유도 함께 사라져 버렸다. 사이보그였지만 결코 사이보그가 아니었던 그의 존재가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것은 왜일까? 그들만의 의지가 있었고, 그들만의 희망이 있었으면 그에 따른 그들만의 깊은 절망이 있었다. 그렇게 살아있었음에도 그들은 사이보그였다. 아니 사이보그일 수 밖에 없었다.

단지 <블레이드 러너>라는 영화의 원작이었기에 이 책을 선택했던 건 아니었다. SF적인 요소가 너무 짙게 깔린 내용들은 솔직히 황당하기도 하고 읽을때마다 당혹스러운 느낌을 전해주었던 까닭에 잘 선택하지 않는 편이다. 그럼에도 이 책에 관심이 갔던 것은 영화가 미처 그려내지 못한 것들을 책을 통해 만나보고 싶다는 욕심이 앞섰던 것일게다. 다행스럽게도 우려했던 것만큼 당혹스럽지도 않았고 황당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주인공 릭 데커드는 현상금 사냥꾼이다. 인간들속에 숨어사는 혹은 문제가 있는 기계인간 안드로이드를 처리해주는 댓가로 돈을 받는 사람. 그의 꿈은 진짜양을 사는 것이다. 어느날 아침 안드로이드에게 당해버린 그의 선배를 대신 해 여섯명의 안드로이드를 없애라는 임무를 부여받으며 이야기는 시작되어진다. 

핵전쟁의 후유증속에서 감정조절기를 이용해야만 제대로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 세상은 온통 먼지와 쓰레기 투성이다. 인간들 사이에 숨어 들었던 안드로이들은 하나 둘씩 릭의 손에 제거되지만 그들이 하나씩 사라져갈 때마다 릭의 가슴속에는 작은 울림이 생겨난다. 그들이 과연 이렇게 죽어야 옳은가! 나는 과연 저들을 이렇게 죽여도 되는 것인가! 인간의 고뇌, 그리고 안드로이드의 고뇌.. 아무런 차이점도 느껴지지 않는 고뇌의 함정속에서 무언가 알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던 것이 오직 릭 하나뿐이었을까? 책을 읽다보니 문득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 <토탈리콜>의 장면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탈출에 성공한 그들에게 찾아왔던 맑은 공기와 자유.. 인간의 기억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이야 흔한 소재일뿐이니 그리 새삼스럽진 않지만 (화성을 탈출한 안드로이들에게도 이식되어진 기억은 있었다)  이 책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감정이입기나 영화 <토탈리콜>에서 보여주었던 공기정화기가 안고 있는 의미는 상당히 크게 다가온다. 

아주 먼 미래의 이야기일까?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리 먼 미래의 이야기처럼 느껴지지가 않는다. 지금 이 지구촌을 다스리며 살아가고 있는 인간이란 존재가 어쩌면 환상을 꿈꾸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되먹지 못한 생각이 자꾸만 든다. 릭의 레이저총에서 빛이 뿜어져 나올때마다 먼지처럼 풀썩 내려앉는 안드로이드의 모습이 어쩌면 우리 인간의 미래는 아닐까 하는, 정말 SF적인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이미 인간다움이 없어져버리고 생명체다운 생명체들이 없어져버린 상황, 진짜 동물을 키우고 있는 사람들이 존경의 대상이 되는 세상속에서 과연 누가 사이보그인가를 묻고 싶었고, 과연 누가 누구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묻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던 책... 이 책의 제목처럼 정말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꿀까? 인간이 진짜양을 키우는 것과는 다른 의미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한장 한장 책장을 넘길 때마다 다음 장면들이 기대가 되었다. 그러면 안되는 줄 알면서도 안드로이드와 하룻밤을 지내는 릭의 감정이 파도처럼 일렁거릴 때 과연 그가 선택할 마지막은 무엇일까 궁금했다. 하지만 그의 감정선은 그냥 꾸물거리기만 했을 뿐 어떤 것도 만들어내지 못한 것 같다. 인간이니까, 마지막까지 살아남아야 할 인간이었기에 그럴 수 밖에는 없었던 것일까?  뒷심부족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잘 달려갔다고 생각했는데 결승선에는 끊어야 할 테이프가 없었다. 그의 방황을 통하여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내가 찾아내지 못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어찌되었든 오랜만에 재미있게 읽었던 SF소설이었다. 그런데 우리의 후손들은 정말 화성에서 살아볼 수 있을까?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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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의 비망록
주제 사라마구 지음, 최인자 외 옮김 / 해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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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자면 잘 모르겠다. 주제 사라마구라는 이름하나만으로 독자를 끌어모을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임엔 분명하지만 조금의 내용파악조차 하지 못했던 건 누구도 탓할일이 아니다. 수도원의 비리를 파헤치고자 했던 걸까? 딱히 그런 것만도 아닌 듯 하다. 종교적인 이념에 허를 찌르는 그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 딱히 그런 것도 아닌 듯 하다. 그렇다면 이 책의 소개글처럼 감동적이고 매력적이고 진실한 러브스토리를 들려주고 싶었던 것일까? 그랬다면 아마도 내가 느끼지 못했던 것일게다. 비망록이란 단어의 뜻을 빌려서 이야기를 하자고 말한다면 우리의, 아니 책속에서 살아야 했던 그들 모두의 일상 자체가 비망록에 속한다. 우리 모두가 잊으면 안되는, 잊어서는 안되는 사소한 것들의 비망록...

<눈 먼 자들의 도시>를 통해서 주제 사라마구라는 작가를 알게 되었다. <눈 먼 자들의 도시>가 나에게 주었던 그 놀라움에 대해서는 두말 할 나위가 없겠다.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하여 그토록이나 신랄하게 파헤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놀라웠었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저 편안한 느낌으로 이어지던 문장들이 놀라웠었다. 그래서 나는 주저없이 선택했었다 <눈 뜬 자들의 도시>를.. 눈을 뜨고 있던 사람들이 눈을 잃어버린 채 겪어내야 했던 일상들과 그 잃어버린 눈을 되찾고 다시 눈 뜬 자들이 되어 살아내야 할 그들의 일상이 궁금했었던 까닭이다. 어쩌면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전작의 느낌을 이 책속에서도 만날 수 있을거라고 기대했었던 것은 온전한 나의 욕심이었을지 모르겠다. 이 책을 무릎위에 올려놓고 책장을 넘기기 시작하면서부터 작자와 나의 힘겨루기는 시작되어진 것일게다. 이제까지 접해보았던 그의 책과는 왠지 다른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는 당혹스러움 앞에서 나의 발걸음이 자꾸만 서성거려야 했기에..

"당신의 이름이 무엇인가요?" 마녀재판의 현장속에서  외팔이 발타자르와 남과 다른 능력을 가진 마녀의 딸 블리문다의 만남이 우연이 아닌 필연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주앙 5세와 마리아 아나 왕비에게 아이를 갖게 해 주겠노라고 신처럼 약속을 내려주던 수도사의 그 오만함은 또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마침내 아이는 태어나고 그렇게하여 '마프라'라는 소도시에 수도원 건립을 위한 일들이 착수된다. 그 고된 노역의 현장 하나 하나가 비망록으로 남겨진다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었다. 인원보충을 위하여 아니 완공날짜를 앞당기기 위하여 징집되어지는 남자들의 가정은 깨어지고 그들의 행복은 거기서 종지부를 찍어야 했다. 일 할 수 있는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발에는 족쇄가 채워져야 했고 그들의 손목에는 죄인처럼 오라를 지워야만 했다. 누굴 위해서였을까? 새로 태어난, 그야말로 얼굴도 한번 본 적 없는 공주를 위해서였을까? 하지만 그 피상적인 존재를 앞세운 종교적인 이념과 권력 남용의 허세를 놓치면 안될 것 같다. 완성을 앞둔 수도원으로 옮겨진 수도사들의 조각상을 보면서 블리문다는 이렇게 중얼거렸었다. 나는 그들이 좌대에서 내려와 우리처럼 인간이라면 좋겠어요. 조각상하고 대화할 수는 없기 때문이에요. 발타자르가 대답했었다. 어쩌면 그들끼리만 있을 때에는 서로 이야기를 나눌지도 모르지(576쪽)... 참 허탈하다. 누가 누구를 구원하는가!

날으는 기구 파사롤라를 떠오르게 하기 위하여 인간의 의지를 모으기 시작하는 블리문다. 배고픈 상태에서만 모든 것들의 영혼을 볼 수 있다는 블리문다를 위하여 날마다 그녀의 뒤를 따라다니던 발타자르. 기이한 그들의 모습이 하나의 전설처럼 퍼져나갈 때 드디어 파사롤라는 떠올려진다. 그리고 그것은 곧바로 성령이 되었다. 하지만 그 성령은 곧 사라져버리고 인간의 나약한 가슴속에서 작은 파동으로 기억되어진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그 파사롤라가 다시 떠올려졌을 때 블리문다와 발타자르에게 이별이 찾아왔다는 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아주 오랜 시간을 이 책과 싸워야 했다. 진실하고 매력적이라던 발타자르와 블리문다의 그 신비로운 사랑을 느끼지 못했던 까닭이었을까? 지루했고 답답했고 꽉 막힌 동굴속에 갇혀버린 듯한 그 느낌을 지울수가 없다.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그토록이나 나를 힘겹게 했던 것일까? 되짚어보면 우리가 살아내야 할 모든 것들이 비망록이다. 중요한 것은 실제적인 것이 아닐까 싶다. 너무나도 피상적인 존재, 만나고 싶어도 만나지지 않는 그런 존재에 스스로 얽매인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올무를 그가 끊어주고 싶어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징집되어져 어쩌면 죽을수도 있었던 그 처절한 노동의 현장속에서 그들이 무엇을 위하여 땀과 피를 흘려야 했는가를 다시 생각해야만 할 것 같다. 파사롤라라는 기계를 통하여 인간의 의지가 가지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책에서 묻고 있었던 것처럼 나 역시도 묻고 싶다. 정말 인간의 의지는 하늘에 맞닿을 수 있는 것일까?  하루하루가 역사를 이루는 작은 조각이라는 말이 불현듯 떠오른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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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요나라 사요나라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노블마인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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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해질 것 같았습니다... 안녕...  그녀와 나, 피해자와 가해자. 하지만 누가 피해자고 누가 가해자인지. 그리고 행복해질 것 같았기에 안녕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던 그녀. 아무렇지도 않게 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사이는 아니었다. 집단성폭행.. 16년전의 기억에 발목을 묶인 채 어느곳으로도 도망치지 못했던 그녀와 내가 그렇게 만나 행복해질 것 같았던 순간을 맞이하기까지 그녀는 피해자였고 나는 가해자였다. 내가 떠나면, 내가 없어져 버리면, 내가 그의 눈앞에서 사라져버리면 그가 행복하게 잘 살 것만 같아서, 그를 용서하게 되는 게 싫었던 여자가 어느날 문득 안녕이라는 단 한마디 말만 남긴 채 그의 곁을 떠나갔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찾아낼 겁니다. 아직은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이니까요... 무슨 인연이었기에 그들은 그토록이나 힘겨운 싸움을 해야만 했었는지 알 수 없다. 서로의 불행을 핥아주며 그렇게 살았던 몇개월의 시간조차도 그들에게는 허락되어질 수 없었나 보다. 용서할 수 없었으나 끝내는 용서할 수 밖에 없었던 그녀 나쓰미와 나 슌스케의 이야기.

요시다 슈이치.. [파편], [돌풍], [열대어], [7월24일 거리], [나가사키], [악인]등 그의 작품이 의외로 엄청 많았지만 그를 처음 만나게 해 주었던 <일요일들>이란 작품이 떠오른다.  현란한 수식어들을 달고 있었던 탓에 그 작품을 만나게 된 것 같지만 그많은 일요일들속에 담겨져 있던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불안한 삶의 형태들을 기억한다. 도시라는 테두리속에서 벌어지는 일상의 연속이었지만 그들 나름대로 밀고 가야할 생의 수레바퀴는 제각각의 무게를 담고 있었다고 기억되어진다. 요시다 슈이치의 문장속에는 저 밑에서부터 치고 올라와 끝내는 울컥 쏟아내버리고 싶은 그런게 있는 것 같다. 이 작품 역시 사시처럼 변해만가는 사회적인 편견을 앞에 두고서 당신들의 편견이 더 많은 아픔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절규하는 듯 하다. 제발 좀 색안경을 벗어보라고 그렇게 외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래서 덜컥 겁이 나기도 하는 순간이 갑작스럽게 찾아올 때도 있다.

아무도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 순간의 분위기가 묘하게도 그런 상황을 연출해버리고 말았다. 처음부터 그녀를 어떻게 할 생각은 없었던 거다. 일이 그렇게 되어버리고 촉망받던 운동선수로써의 생활을 접어야 했을 때까지도 그는 잊을 수 있을거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녀 역시 자신의 기억속에서 그 일이 일어났던 순간을 떼어내버릴 수 있을거라고만 믿었었다. 하지만 타인의 기억이 그와 그녀의 기억을 놓아주지 않은 채 물귀신처럼 잡고 늘어지는데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모든 것을 다 포기해버려야만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속에서 그들은 마주섰고, 운명이었다고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잔인한 느낌으로 그들의 기묘한 인연은 시작되어진다. 행복해 질 수 없다면 차라리 불행을 받아들이자고.. 

범죄소설처럼 보이기도 하고 하나의 연애소설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묘한 매력을 모른체 할 수가 없었다. 이 소설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마치도 내가 지금 그 현장을 보고  있는것만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들의 곁에서 유령처럼 따라다니는 내 모습을 발견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그들의 불행앞에서 나도 아파했다. 차마 가질 수 없었던 그들만의 행복앞에서 안타까워야 했다. 마침내는 그와 그녀일거라고 느껴지던 순간 가슴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던 그 울컥거림의 정체를 토해내고 싶었다. 불가항력적인 상황앞에서도 우리는 모두 왜 그랬느냐고, 그러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고 책망한다. 그러고나서는 그 순간이 어땠었느냐고 잔인한 호기심을 드러내고야 만다.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아니 내가 경험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 대해 잔인하게도 해부용칼을 들이대고야 마는 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또하나의 속성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아무에게도 용서받지 못했기에 나 자신조차도 용서할 수 없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의 앞에 섰을 때 그 아픔이 덜 했는지도 모르겠다. 나 자신조차도 용서할 수 없었던 그런 일이 생겨나게 했었던 원인앞에서야 그들은 후욱~ 긴 한숨을 뱉어낼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참을 수 없는 가벼움 하나가 그들의 가슴속에서 잉태되어지던 순간이 그들에게는 하나의 용서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안녕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더 이상은 당신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사랑이었다는 걸 그녀가 몰랐을까? 아니 그렇지 않기에 그는 그녀를 찾아낼거라고 말했을 것이다. 너무나도 힘겹게 만난 사랑앞에서, 행복앞에서 이제 더이상은 무너지고 싶지 않았을 게다. 너무도 안타까웠던 말 한마디, 안녕.. 안녕..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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