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겔 스트리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5
V.S. 네이폴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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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2011.11.21  

 

  차멀미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나에게는 나름의 장점(?)이 되기도 한다. 나는 지난 3년간 네이버 블로그에 나만의 미술공부를 연재해오면서 소설책을 거의 접하지 못했었다. 다행이도 늘 벼르기만 하던 문제를 등하교 시간(대략 3시간이 조금 넘는다.)을 쪼개 해결하자는 계획이 지난 학기에는 꽤 잘 실천되었던 것 같았다. 소설에 잘 집중하지 못하던 예전과는 달리 솔제니친도, 쿳시도, 위화도, 그리고 카프카, 레싱, 흐라발, 사라마구도 한 권 씩 다시 읽었고, 나이폴의 <미겔 스트리트>도 그 중 한 권이었다. 개인적 취향 탓인지, ‘재미’로만 점수를 매겼을 때는 <미겔 스트리트>가 단연 으뜸이었다. 기억에 오래 남는 것도 당연할 수밖에 없다. 사실 글이라는 것은 동일한 주제의식을 담고 있더라도 “어떻게 표현되는가?”로써 현격한 수용의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엄밀히 따지자면 ‘재미’ 역시 글의 큰 요소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나이폴의 <미겔 스트리트>는 그냥 재미있는 소설이 아니다. 희극도 아니다. 블랙코미디이다. 독자들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읽었을 때는 이 소설의 단 한 대목도 독자들을 웃길 수 없을 것이다. 나이폴의 능력은 여기에 있다. 독자들을 트리니다드의 한복판에 떨어뜨려놓은 뒤, “그들(소설 속 인물들)처럼” 생각하게 만든다. 조금 과장된 표현이긴 하나, 독서의 호흡이 유난히 긴 독자라면 책을 덮은 뒤 “여기는 어디이지?”하며 깜짝 놀랄 수도 있다. 

  나이폴은 심각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들여다보면 그건 분명 심각하게 다뤄져야 할 일들이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아무도 그것이 심각한 줄 모른다는 것, 즉 “그걸 다뤄야 한다는 의식”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트리니다드 사람들은 재미있게 살고, 때론 격정적이며, 루머에 따라 이리저리 휩쓸리면서도 전해 오는 기준이 없는 자유에 기댄 자기 확신은 있어 줏대 없다는 소리는 듣지 않을지 모른다. 쉽게 말해 그냥 이러니 저러니 사는 것이다. 소설에서도 그런 이들이 등장한다. 자신의 가족을 패면서도 “원래 그랬어.”라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인물은 물론이고, 공부 잘 하는 이를 시기하면서도 공부를 잘 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가진 인물도 있다. 이들의 판단은 우리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도 보인다. 하지만 트리니다드에서는 ‘인간’을 찾아볼 수 없다. 요즘 유행하는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은 ‘실종’되었다. 나이폴은 그런 트리니다드의 1930~40년대의 삶을 그렸다. 

  별로 어렵지 않으니, 축구에 비유해보자. 흑인들은 운동신경이 유독 좋다. 때문에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축구를 시작해 재능이 있으면 유럽 구단들의 스카우팅 제의를 받는다. 그래서 돈을 벌어 부자가 된다. 만약 재능을 놓고 보자면 아프리카는 축구 선진국들로 넘쳐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축구는 개인이 하는 운동이 아니다. 팀을 구성하는 선수들과 재원을 대주는 구단주와 협찬 기업들, 구단을 감독하는 이사진들, 그리고 팀을 응원하는 팬들과 광고업계가 공존하는 하나의 세계이다. 이 세계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단합을 할 정신적 ‘응결점’이 있어야 한다. 역사도 필요하다. 때문에 유독 아프리카 국가들이 국제대회에 나가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로 전문가들은 “흑인들은 단결심이 없다.”는, 가히 인종차별’로 이어질 수 있는 진단을 내놓곤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온라인 댓글들을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조차 그런 생각을 빈번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목도할 수 있다. 이것은 더 나아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래서 안 돼.”라는 자기비하적 발언으로도 이어지곤 하는데, “일제가 우리의 근대화를 도와줬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일부 국민들의 생각도 이와 유사한 논리를 갖고 있다. 이런 생각들의 스펙트럼은 큰 편차 없이 하나로 모아진다. 바로 열등감이다. 

  요컨대 <미겔 스트리트>에 나오는 모든 이들은 열등감을 갖고 있다. 특히 미국식으로 변해가는 인물들의 행동에서 우리는 “Give me Chocolate”라는 영어는 알았다는 우리나라 전후(戰後) (그들은 이미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가 되었지만) 어린 아이들의 역사를 돌이켜보며 <미겔 스트리트>와 우리가 일견 닮은 점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도 그러한 면이 있다. 소위 욕된 말로 “양놈, 양년”이라는 표현으로 타민족의 경시하는 태도가 있는 반면, 스스로 한국적 자부심을 벗어던지고 “이깟 나라”라는 표현을 쓰는 이들도 있다. 전자는 너무 격양되어 극우로 빠져나가기 일쑤인 민족주의자이며, 후자는 근본 없는 이국주의자이다. ‘우리’라는 말은 극도의 공감, 혹은 경멸이 가득 담긴 어조로 얼마든지 옷을 갈아입을 수 있다. 

  이 책을 덮으면 “나는 무언가를 이유 없이 맹목적으로 비난하거나 옹호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해 “나에게 판단기준은 무엇인가?”라는 내적 성찰에 이르는 고된 여정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렇다. 아니, 이것이 사실일 것이다. 만약 이 여정을 시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미겔 스트리트>에 등장하는 ‘도덕적 쾌락’, 쉽게 말해 ‘알코올중독자’와 별반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중독자들은 도덕적 계약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최대한 올바른 방법을 사회적 계획안에 새겨 넣기 위해 구성원들은 수많은 고민과 자기반성을 해야 하고, 그를 위해서는 판단기준을 설정해야 한다. 우리에게 있는 기준 중에는 지금 사용하지 못해 버려야 할 것들과 앞으로 사용해야 할 것들이 있으며, 지속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것들도 있다. 만약 이 판단을 타인에게 유보한다면 우리는 뭔가 얻어 탄 편안함을 당장이야 느낄 수는 있겠지만 만에 하나 우리 스스로가 판단해야 하는 상황 앞에서는 회피할 기회나 도피할 장소를 궁리할 수밖에 없는 난처함에 빠지게 된다. 남을 때리거나, 술을 마시거나, 심지어 누굴 죽이거나.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이폴은 분명 트리니다드의 역사를 말해준다. 픽션이 가미되긴 했지만 명백한 역사의 한복판이고, 그가 직접 보고 느낀 바이다. 그것을 소위 “‘영국물’을 먹었다.”는 작가가 비판적 시선을 통해 “그대로 노출”시킨 것일 뿐이다. 그러나 소름끼치게도 우리의 상황과 그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다. 겉으로 봤을 때, 그들은 대개 흑인이고, 우리는 대개 한국인이다. 그들과 우리 사이의 심미안과 도덕의식의 차이도 분명 존재하리라. 하지만 그 차이가 “막 식민지에서 탈피해 아무런 민족의식과 전통도 없고,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는 그들”과 “세계 11대 강국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는 우리”의 차이여야 할, 소위 ‘낙후된 곳’과 ‘문명화된 곳’ 사이의 차이라고 흔히 인식되어야 할 어마어마한 차이가 아니라는 점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래서 <미겔 스트리트>를 일컬어 ‘블랙코미디’라 부르게 되는 것이다. 문명 우월론은 따위 언급하지 않겠다. 나는 그런 차별적 발언, 우생학적 발언을 삼가는 것이 진리라 여긴다. 하지만 돌아보기에 우리가 “우리는 다르다.”라고 자부하는 사회의 일면에서 “대체 뭐가 다른데?”라고 반문할 수 있는 점이 많다는 것이 못내 안타까워진다. 고칠 것이 많은 사회 앞에서 비판적 시선을 견지해야 하는 것이 모름지기 ‘배운 자’의 도리임은 알지만 이 사회를 끝까지 믿고 싶어 하는 것은 내가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라는 자연스러운 점, 그 사실의 생리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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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1 15: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22 16: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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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2011.11.21
 


  나에게는 되도록 지키고자 하는 한 가지 원칙이 있다. 책을 접할 때, 저자에 대해 미리 알고 들어가지 말자는 것이다. 때문에 책날개가 별도의 커버에 붙어 있고, 그곳에 저자소개가 있는 책이라면 보통 뒷날개에 있는 해당 출판사의 여러 추천도서목록들만 (나중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살짝 옮겨 적어놓고, 커버는 버린다. 책 읽을 때 거추장스럽게 덜렁거린다는 이유도 분명 있지만 나는 독서에 앞서 되도록 저자에 대한 편견이 없는 ‘나’를 책과 대면시키도록 노력하는 편이다. 하지만 모든 노력이 성공하진 못한다. 제목에서부터 “나는 이런 사람이고, 저런 생각을 지지하여 요런 내용을 썼고, 결론은 고로 이렇소.”라고 말하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또한 일단 한 번 접한 작가의 성향은 쉽게 잊히지 않기 때문에 그 작가의 책을 연이어 읽을 때에는 위의 노력이 거의 시도조차 되지 않는다. 하지만 글 자체로만 판단하려는 시도가 올바른 것이라 배워온 나에게 저자소개와 서문은 항상 맨 마지막에 접해야 하는 정보 즈음이 된다. 브랜드 이름만 보고 옷을 사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그런 까닭에서일까? ‘홍세화’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몰랐고, ‘한겨레’가 어떤 성향의 언론인지도 몰랐을 때, 내가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를 읽고 받은 충격은 그야말로 “뺨을 한 대 얻어맞고도 기분이 상쾌해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나를 냅다 던져버렸다. 내 앞가림도 하기 힘들고, 사회를 포용하고자, 혹은 판단하고자 하는 능력 자체가 부족했던 탓에 홍세화氏가 한국과 프랑스 사회를 비교하며 펼쳐놓은 예리한 통찰력은 사실 내겐 언감생심이었다. 물론 나에게 어떤 문화집단 사이를 비교할 만한 판단능력이나 경험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 달이 조금 안 되는 기간이었지만 고등학생 무렵, 나는 시드니대학교 기숙사에 머물며 낯선 문화를 온몸으로 느껴본 적이 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다행이도 “짧았기 때문”에 나는 그들의 문화에 중화되지 않을 수 있었다. 외국에 나가야 우리나라의 위상이 보인다는 것은 예삿일이었고, 당시 득세하던 백호주의, 풀어 쓰자면 ‘백인 호주사람 우월주위’의 냉담한 시선 탓에 상처받은 것은 지금도 외상(外傷)으로 남아 있다. 나는 그 때 “우리나라 사람들은 안 그런데.”라는, 정에 이끌린 판단을 하는 우를 범했고, 한국에 돌아와 훗날 홍세화氏, 진중권氏, 박노자氏, 그리고 강준만氏의 신랄한 책을 읽었을 때에 그 ‘우’가 무엇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 때 이후로 나는 ‘민족’이라는 단어를 도타운 정보다는 회의적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물론 ‘민족’은 좋은 단어이다. 그러나 극우주의자들의 ‘민족’이라는 단어는 결코 올바른 개념을 갖고 있지 않다.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에서도 언급된 극우주의자들의 득세가, 발매로부터 10년은 더 지난 어제 KBS 다큐멘터리를 통해 다시 한 번 문제시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대체로 어떤 시기와 상황에 ‘민족’이라는 단어를 제멋대로 꺼내놓을 수 있는지, 우리가 얼마나 큰 오류를 범할 수 있는지를 상기시켜주기에 충분했다. 나치와 파쇼는 사실상 히틀러처럼 “우리민족의 결정적 순간”에 나타나 이 상황을 타개할 방책이 있다며 민족적 이데올로기를 잘 선전할 수 있는 달변가만 있다면 언제든지 정권을 장악할 수 있는 단계에 와 있다. 어제 방영된 KBS 다큐멘터리는 그런 보고서들이 최근 폭발적으로 늘어났다는 사실과 함께 이 문제가 어느 정도 위험수준에 돌입했다는 잠정적 해석을 내놓았다. 전문가들의 진단처럼 정말 세계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중일까?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각종 전쟁과 내전, 사회주의의 몰락과 신자유주의의 타락이 벌어졌고, 다시금 제 2차 세계대전 이전의 상황으로 내몰리는 듯하며, 극우주의와 전체주의가 각 국가의 불편한 경제상황 속을 비집고 나오려는 중이다. 지젝은 월가 시위대들 앞에서 한 연설을 통해 그의 ‘극강 공산주의’를 재차 주장하며, 실패한 사회주의의 전략이 아닌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써 사회주의가 다시금 세계의 조류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여전히 ‘월가’는 건재하다. 신자유주의는 “신자유주의로써” 사람들을 모으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돈이 그러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강요와 억압을 받는 피해자로써의 삶을 살면서도 저항할 수 없는 까닭은 “원칙이 있는데 지켜지지 않는다.”라는 회의적 평화주의 때문이다. 반면, 극우주의와 전체주의는 분명한 타겟과 방법을 지닌 명확한 행동을 한다. 히틀러가 다시 등장한다면 그가 이길 수밖에 없는 까닭이 바로 이것이다. 나는 이런 진단들을 여러 칼럼을 통해 읽어봤다. 독일에서 최초의 공화정이 실패하고, 온갖 정당들이 루머와 자기고집으로 집권하려고 했을 때, 그 때 나치가 나오지 않았던가. “독일인의, 독일인에 의한, 독일인을 위한”, 아니 “독일인만의” 움직임이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도, 다시 말해 극우주의자들이 나치를 반복하려고 한다는 거센 비난이 독일 사회 전면에서 제기되면서도 그들의 활동은 현 정권 내에서 유지되고 있다. 자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천하의 고집쟁이가 극우주의를 만나, 만약 노르웨이의 참혹한 총기난사 사건을 훨씬 뛰어넘는 계획을 세운다고 한다면 오늘날 ‘평화로운’ 사람들이 그 앞에서 어떤 저항을 해볼 수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대원칙에 입각한 판단을 견지하며 우리의 문화를 다른 나라의 문화와 비교함으로써 상대론적인 입장에서 우리의 부족한 점과 잘못된 점을 고쳐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는 그런 면에 있어서 매우 탁월한 책이다. 박노자氏의 <당신들의 대한민국>은 “한국의 바깥에서 들어온 사람이 한국 안에서 한국을 바라본 시선(그럼에도 그는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잘 안다는 점에 있어서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과 자기반성의 기회를 줬다.)”이라면 홍세화氏의 이 책은 “한국에서 타국으로 나간 사람이 한국 바깥에서 한국을 바라본 시선”이다. 그런데 두 책은 많은 부분에서 일치를 보인다. 다시 말해 “모로 봐도” 한국사회와 문화에는 우리가 자부하는 것 자체마저도 비난받을 수 있는 일련의 잘못된 코드, 혹은 DNA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홍세화氏는 특유의 명료한 문장과 신랄한 주장, 그리고 되도록 양비론을 지양하는 태도로써 독자들이 ‘쎄느강’과 ‘한강’ 사이의 균형 잡힌 시각을 갖도록 독려한다. ‘쎄느강’을 마냥 칭찬하는 글이 아니라는 점은 책의 곳곳에서 살펴볼 수 있다. 때문에 만약 그가 프랑스인들에 대한 비판적인 글을 쓴다면, 비유컨대 그 글은 프랑스인들이 읽은 ‘박노자氏의 책’이 된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홍세화氏는 프랑스문화에서 본받을 것들을 추출해서 이 책을 엮었다. 겨냥된 독자가 한국인일 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프랑스의 긍정적인 면들이 우리 사회의 병폐를 치료할 약이 될 것이라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가령 이런 것들이다. 개성에 대해 잘못 인식하고 있는 사회, “어떤 돈인가? 어떤 권력인가?”에서 ‘어떤’이 자주 생략되는 사회, 사람이 아닌 직분을 만나는 사회, 토론문화가 퇴보된 사회(우리나라 정치인들 토론회 하는 것을 한 번 보라. 이따금 대학생 토론대회라고 방영하는 케이블방송의 TV토론회를 보라. 그러나 정작 창피한 것은 나 자신도 토론의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해본 적은 거의 없고, 배운 기억도 없다. 이 점에 있어서 홍세화氏는 프랑스 방송편성에 대해 언급한 것이 있는데, 예능 프로그램을 줄이고 토론 프로그램을 살린다고 한다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권리’와 ‘인권’ 등을 주장하며 반대하겠지만 토론 프로그램의 활성화는 분명 좋은 토양을 만들어줄 수 있으리라 생각해본다.), 잘못된 언어생활과 ‘언어’의 수능화로 점차 떨어지는 한글사랑, 그럼에도 영어 공용어화론이 정말 심각하게 논의될 수 있었던 사회, 언론의 양비론과 부족한 윤리의식, 상(賞)이 갖는 권력의 재확인, 똘레랑스가 부족한 사회, 좌우편향이 심해 지진이 일어나는 사회, 세대 간 공유되는 인식이 현저히 부족한 사회. 

  작금의 수치스러운 세태들이 괜스레 오늘날 사회 이곳저곳에서 비판받고 있는 것은 사실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며,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라고 묻는 것을 실례라고 여기기까지 한다. 이러니 토론이 없고, 윽박지름만 있으며, 안철수 교수가 말한 “문제인식의 공유”는 세대 간의 차이, 좌우의 차이, 혹은 강남과 강북, 대학교 이름, 아니면 지역 간 차이로 도저히 시도조차 되지 못한다. 이것이 구태의연한 문제제기일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이 문제들이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는 심각성에 대해 추호의 고찰도 해보지 않은 이들이다.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가 출판된 때가 20세기였다는 것을 고려해 봐도 우리 사회는 뭔가 나아지고 있는데, 대부분의 것들은 그대로 있는, 쉽게 말해 사람은 같은데 옷만 바꿔 입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체질이 변화한 것이 아니라, 세계의 정치적, 외교적, 경제적, 혹은 기술적 조류에 맞춰 “트렌디한 것”을 마치 ‘선도’하는 나라인 것처럼 잘못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잘못된 인식’을 지적하면 민족주의자들이 가만히 있지 않는다. 사회개혁을 시도하려는 이에게 “빨갱이!”라고 소리치며 목덜미를 후려친 할머니가 어디 이 나라에 단 한 명이겠는가? 전쟁을 일으키자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고, 인권을 부마로 삼아 자신이 원하는 바를 타인의 인권은 전혀 생각지도 않고 지나치는, 나귀를 탄 양반 같은 이들도 있다. 

  몇 년 만의 재독인데도 여전히 나 자신은 그대로이고, 문제제기는커녕 뭘 하느라 그리 바쁘고 어지러웠는지 돌아보게 되는 책이 있다. 홍세화氏의 책도 그런 책 중 하나이다. 지식을 소유하게 하는 책들은 누구라도 쉽게 읽을 수 있을 것이지만 의식을 견지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은 홍세화氏의 글에서 “그래서 어쩔 건데?”라는 회의적 인식이나, 혹은 여전한 편향적 인식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 

  아침에 머리를 빗고 나갔는데 도저히 오늘 나의 머리 스타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친구에게 물어본다. “오늘 머리 괜찮아?” 그러면 친구는 “괜찮아.”, “앞머리가 조금 이상해.”, “왁스를 너무 많이 바른 것 아니야?” 등등 의견을 말해준다. 이 의견은 우리의 행동방향을 정해준다. 남이 좋다고 하니 하루를 당당하게 살든지, 아니면 어디가 이상하다면 화장실에 가서 열심히 손질해본다. 조언과 수정은 일상에서 빈번하게 일어난다. 

  문제는 그것이 ‘사회’라는 수준에서는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런지는 우리가 대개 아파트 위층에는 누가 살고, 그 이웃의 아들딸은 몇 살이고, 집주인의 직업은 무엇인지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무관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가 뭔가를 고치기 위해서는 사회를 허상이 아닌 ‘실체’로써 대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그것에 대해 충분히 생각하고, 그 생각을 나눠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게끔 하는 토론문화가 정착되어야 한다. 물론 이 공간에 이 생각을 적어놓는다고 해서 내가 누군가와 활발한 토론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제 절반 남은 대학생활 중 얼마나 많은 건강한 토론을 할 수 있는지 의문이며, 특히 어느 부분에 관심을 가져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는 상태, 내가 그런 선상에 서 있다는 것은 변함이 없는 듯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선상에 서 있다.”는 것을 뚜렷하게 재확인했다는 것이고, 홍세화氏의 책이 많은 독려를 해줬다는 것이다. 프랑스인들과 같은 역량, 용기, 그리고 집요함을 갖고자 하는 바람이야말로 ‘행동하는 지성’의 유일한 꿈이라는 것을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었다고 할까. 마땅히 곁에 둬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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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트로피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창희 옮김 / 세종연구원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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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19
 


  내가 ‘리프킨’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어렴풋하게나마 기억해보건대 고등학생 때였다. 친하게 지내던 여학생 중 한 명이 “리프킨의 책 같은 걸 읽고 싶어. <소유의 종말> 같은 책 말이야.”라고 말하며 자신이 사회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 적이 있다. 무슨 대화가 오고 간 중이었는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나는 멋도 모르고 맞장구를 쳐줬었다. 고등학생 때는 대개 그렇다. 막연한 관심으로부터 여러 가능성을 찾고, 자신이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는 대학생이 되면 대개 깨닫게 된다. 지대한 관심을 애초부터 가졌던 이들은 강의 토론시간에 낭중지추가 된다. 다른 학생들이 어느 정도 위화감을 갖는 것도 사실이다. 전공과목도 제대로 이수하지 못하며 쩔쩔 매던 나는 함께 다니던 너덧 명의 친구들과 함께 “걔는 아마 사회학 전공일 거야.”라며 혀를 내두르곤 했다. 우리가 다룰 문제가 아니라는 소극적인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대단히 안이한 태도였다. 

  제대 후, 약간의 두려움과 함께 뭐든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을 때, 나는 그동안 소홀히 했던 문제들에 관심을 조금씩 갖기 시작했다. 다시 읽은 진중권, 박노자의 책이 마중물이 되었고, 보다 거시적 시각들이 필요했을 때에는 우연히도 교내 독서경시대회에 나가겠다고 벼렸던 것이 도움이 되 <자유론>과 같은 원칙적 고전을 읽을 수도 있었다. 다른 하나는 교수의 추천으로 읽은 책이었는데, 사실 추천이라기보다는 “맹렬한 비판과 비추” 탓에 호기심을 갖고 읽은 것이라 해야 옳은 표현일 것이다. 그건 리프킨의 <엔트로피>였다. 

  따지고 보면 리프킨은 훌륭한 저자가 아니다. 중복되는 표현이 책의 절반을 차지할 것 같은, 어찌 보면 괜한 내용 부풀리기를 위해 비슷한 주제를 가진 내용을 챕터별로 나눈 것 같은 면도 없지 않았다. 쉽게 쓰고자 한 그의 전략이 오히려 적절한 예시에 대한 그 나름의 코멘트를 가볍게 보이게 한 면도 있었다. 하지만 통독한 사람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명확하게 기억할 수밖에 없는데, 이 점에서 리프킨은 성공한 저자가 되었다. 그리고 내가 이 책을 읽을 수밖에 없었던, 교수의 ‘비추’의 근거는 리프킨의 글쓰기에 있지 않다. 

  과학에 정통한 이들 중 대부분은 리프킨이 과학 법칙인 ‘엔트로피(Entropy)’를 사회과학에 적용하려고 한 시도 자체가 그른 것이며, “자연은 인간에게 이러저러하게 행동하라고 충고하지 않는다.”는 자연중립의 원칙에도 위배되는 자의적 해석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교수는 “타분야의 사람이 자신이 전공하지도 않은 분야에 대해 책을 쓰고자 할 때는 엄청난 양의 공부를 해야 함을 상기시키는 책”이라며 한 권의 과학 도서를 위해 300여 권의 예비독서를 한 빌 브라이슨의 노력과 비교하며 리프킨의 안이한 태도를 비꼬기도 했는데, 그 강의를 들었을 때만 해도 나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그 날 집에 돌아와 강의 리뷰를 썼던 기억에 오늘 그것을 다시 읽어보니 나 역시 리프킨을 (그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주 신랄하게 비꼰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읽지도 않고 비판한다는 것은 또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가 말이다. 

  교수의 말처럼 엔트로피 법칙을 사회로 끌어온다는 것이, 문학으로 지차면 일단 ‘비유의 오류’를 범한 셈인 것은 분명하다. 사회과학의 통계에 대해 회의를 갖는 사람들은 대개 “통계를 산출할 대상 집단의 수가 터무니없이 적다.”는 것에서 비판의 근거를 찾는데, 리프킨의 <엔트로피>도 이러한 비판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가령 이렇다. 사회과학계에서 엔트로피가 포함된 열역학 법칙을 그들의 분야에 가져다 쓰기 위한 시도는 1960~70년대에 거의 세계적인 붐으로 일어난 바 있다고 한다. ‘엔트로피’라는 개념 자체가 질서와 무질서의 척도이기 때문에 사회과학자들 입장에서는 “이걸 사회에 적용시켜보면 인간 사회의 여러 현상들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던 것이다. 과학자들은 여기에 몇 가지 오류가 있다고 주장했다. 

  첫째, 인간은 ‘투영의 동물’이다. 떨어지는 낙엽에서 저무는 인생을 논하는 오래된 문학적 관습은 인간이 주변 사물을 자기중심적으로 대하는 경향이 있음을 입증하는 좋은 예시일 것이다. 하지만 뉴턴 이래 지금까지 과학자들이 밝혀온 바에 따르자면 자연법칙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법이 없다. 그것은 우주에 걸친 법으로써 존재할 뿐이다. 인간의 삶을 ‘법화(法化)’시키는 원칙으로써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아마 이 점이 <엔트로피>의 가장 큰 오류일 것인데, 인간의 집단인 사회는 열역학에서 다루는 통계집단인 분자보다 훨씬 작다. 사회과학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로 내세우는 통계가 다룰 수 있는 최대의 숫자는 고작 70억이다. 반면, 열역학에서 다루는 분자집단은 천문학적인 표본을 대상으로 한다. 간단한 예로 커피머신에서 나오는 종이컵 하나에 들어갈 수 있는 물의 최대량에는 대략 10의 23승이나 되는 물 분자들이 존재한다. 10의 23승이라는 숫자는 태양이 초당 발산하는 에너지를 kw로 환산했을 때나 볼 수 있는 어마어마한 숫자이다. 인간들을 물 분자 정도 크기로 줄여 컵에 담는다면 물이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얄팍하게 깔릴 것이다. (70억은 10의 9승이다.) 열역학에서 다루는 규모는 최소한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이 정도의 규모는 되어야 엔트로피의 법칙을 적용할 수 있다. 사회과학의 통계가 열역학의 법칙을 사용하면 이런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평형’이라는 문제가 있다. 평형이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겉으로는 변화가 없는 상태”이다. (열역학의 첫 번째 법칙은 열적 평형이다. 평형은 ‘equilibrium’으로 보통 균형, 즉 ‘balance’로 오역되곤 하는데, 균형은 좌우의 개념이 있어야하는데 반해 평형은 그렇지 않다는 큰 차이가 있다.) 가령, 컵 속의 물을 보자. 컵 속에는 H2O라는 물 분자가 앞서 말한 것처럼 10의 23승개나 들어 있다. 물이 증발한다는 것만 예외로 하면 겉으로 보기에 이들은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 같다. 아니, 증발하지 않는 조건을 만들기 위해 외부에서 관찰이 가능한 ‘닫힌계(clossed system : 물질의 소통이 불가능하지만 외부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의 수조를 만들어 그 안에 물을 넣었다고 하자. 여전히 겉으로 보기에 물은 아무런 변화가 없다. 하지만 실제 물속에서는 어마어마한 변화들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물 분자는 끊임없이 돌아다닌다. 분자끼리 부딪혀 서로 수소나 산소 원자를 바꿔치기도 하고, 물 분자 입장에서는 마치 우주와도 같을 수조 안을 우주선처럼 열심히 떠돌아다니기도 한다. 이를 일컬어 “겉으로 보기에는 변화가 없으나, 내부는 활발한 상태”라는 뜻의 ‘동적 평형(dynamic equilibrium)’이라고 한다. 열역학에서 다루는 시스템들은 대단히 어지럽게 움직이는 내부를 가졌으나, 결국 육안으로는 평형을 이루고 있는, 즉 이모저모 다 따져 봐도 평형인 것들이다.  

  사회과학자들의 입장에서는 불행하게도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사회과학이 어려운 것이겠으나) ‘사회’라는 것은 육안으로 봐도 끝없이 변화가 일어나는 상태이다. 지난 봄, 서울 지하철역 보관함에 폭탄을 넣어두는 이가 있었는가 하면 당시 시리아에서는 연일 끔찍한 폭력적 탄압이 계속되어 무고한 시민들이 주검으로 거리에 나뒹굴고 있고 있었다. 인류는 지금까지 대략 천 여 개 안팎의 전쟁을 겪어왔으며, ‘지구’라는 것도 모자라 지금은 ‘제 2의 지구’를 찾기 위해 몇 개의 도구를 손으로 삼아 우주공간에 내보내고 있다. 인간의 사회는 결코 평형 상태를 이룰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과학에서는 엔트로피의 평형 개념을 무시한 채 인간 사회의 질서와 무질서의 척도로 엔트로피의 개념을 사용한다. 이런 점들이 <엔트로피>의 ‘불성립’을 주장하는 여러 과학자들의 과학적 근거이다.   

  사회과학적 주장은 정확한 근거에 입각해야 하기 때문에 위의 주장들은 분명 <엔트로피>를 읽을 미래의 독자들, 혹은 읽었던 독자들이 생각해봐야 하는 명제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책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까닭은 과연 무엇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리프킨이 하고자 하는 말이 분명했고, 그것은 전(全)지구적 차원의 각성을 호소하는 글이었으며, 사람들이 열역학을 대체로 잘 몰랐기 때문이다. 이 쯤 되면 우리는 그가 과연 무슨 말을 하고자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을 열역학 법칙의 사회과학 적용을 끝까지 고수했던 것인지 궁금해 할 수밖에 없다. 그의 메시지에는 총체적인 시대의 경고가 들어 있다. 과학자들의 주장을 들어봤으니, 이번에는 리프킨의 주장을 들어봐야 할 차례이다.

  <엔트로피> 초판이 나온 해가 1980년이다. 리프킨은 당시를 ‘기계의 시대’라 정의했다. 기계론적 세계관이 인류의 사고를 점령했을 때, 서양에서는 비약적인 기술발전이 이뤄졌었다. 그 결과 ‘운동하는 물체’만을 고려한 편향적 발전이 “인간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를 묻는 오늘날 사람들에게 맹렬한 비난을 받는지도 모르겠다. 기계론적 세계관을 완성한 이는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뉴턴이며, 이것을 국가의 패러다임에 적용한 이는 로크, 그리고 경제를 설명할 때 사용한 이가 아담 스미스이다. 로크는 “개인 생산물이 늘어나면 사회의 부도 늘어난다.”는 이른바 ‘트릭클-다운(trickle-Down)’을 주장하며 부의 총량이 증가하는 것에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도록 했다. 아담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을 강조하여 경제에서 도덕성을 제거하는데 일조했고, 실용주의 경제사관을 건축했다. 리프킨은 이들을 ‘근대의 적’으로 지목한다. 

  열역학 법칙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워낙 난이도가 높기 때문에 이곳에 일일이 게재할 사항은 못 되는 것 같아 리프킨이 왜 엔트로피를 이용해 사회를 설명하고자 했는지에 대해 적는 것이 적절할 듯하다. 열역학 법칙이란, 쉽게 말해 우주 에너지의 총량은 일정한데, 엔트로피의 총량, 즉 무질서의 총량은 계속 증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를 바꿔 말하면 이해하기 편할 것이다. 에너지는 인간이 창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유한하며, 형태만 변화한다. 인간이 에너지를 사용한다는 것은 유용한 에너지를 무용한 에너지로 만드는, 즉 ‘오염’을 뜻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 다음 세대들은 우리보다 더 ‘오염된’, 즉 “에너지가 적은” 세상을 살게 된다. 로크는 이렇게 말했다. “자연이 보다 빨리 변형되면 진보도 더욱 빨라질 것이고, 세계는 더욱 질서 있게 되며, 따라서 시간은 절약된다.” 리프킨은 이러한 사고방식을 일갈한다. 

  리차드 윌킨슨은 그의 저서 <Poverty and Progress>에서 “구하기 쉬운 원료에서 어려운 원료로 넘어감에 따라 인간은 점점 더 복잡한 처리 및 생산기술을 이용해야 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에너지 발전사를 통시적으로 들여다봤을 때 얻을 수 있는 결론이다. 가령, 리프킨이 예시로 든 것처럼 나무를 원료로 사용했을 무렵, 석탄을 이용했을 무렵, 그리고 원전에서 석유를 뽑아내는 지금을 서로 비교해보면 인류는 점점 수집하기 어려운 자원을 이용하며, 그로 인해 새로운 기술을 필요로 하고, 또 다른 에너지를 그곳에 쏟아 붓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기술적 발전이 마치 진보를 이루는 것처럼 광고되어도 정작 근로자 계급은 그들이 공장에서 만드는 양모로 된 옷을 전혀 입지 못한다는, “누구를 위한 발전인가?”를 묻게 되는 현상을 낳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리프킨은 엥겔스의 <The Condition of the Working Class in England>를 참조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는 그보다 더 큰 문제를 자크 엘룰(Jacques Ellul)의 <The Technological Society>의 내용 발췌를 통해 알려준다. “역사를 들여다보면 모든 기술은 당초부터 예측불가능한 2차 효과를 품고 있다. 2차 효과는 차라리 기술 없이 지내는 것보다 더 끔찍한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 엘룰의 주장이다. 

  에너지 대란이 점차 현실화되고, 우리나라 국민들도 갈수록 높아지는 유류세를 심각하게 걱정하고 있는 상황이라 그런지 최근 KBS는 우리나라의 해외 원전 개발 사업의 ‘자랑스러운’ 청사진을 다큐멘터리로 방영해준 적이 있다. 중국에 비하면 한참 뒤쳐져 있지만 언젠가는 목표치에 근접할 것이라는 잠재적 국가경쟁력의 선전인 셈이었다. 한편, 중국, 러시아, 베네수엘라 등 국제 에너지 세력판도의 변화도 시시각각 보도되고 있으며, 이로써 급속하게 줄어들고 있는 지구의 자원에 대한 전 세계적인 공포감이 확산되어 있다. 각 나라들의 ‘덩치’는 점점 커지고 있는데 비해 사용가능한 자원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최악의 상황이 가까워지자 예년보다 많은 양을 생산했는데도 왠지 수확을 덜한 것 같은, 이른바 ‘수확체감현상’이 일어나고 있고, 미국이 이 현상의 가장 큰 피해국이라 알려졌다. 다국적 기업과 엄청난 규모의 중앙정부관료 체제를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는 ‘슈퍼 아메리카’의 맹점이 치부를 드러낸 것이다. 리프킨은 이렇게 말했다. “지구상에 미국이 또 하나 있다면 지구는 지탱할 수 없다. 우리 뒤에 오는 사람들은 우리보다 더 가난한 상태에서 삶을 시작해야 한다.” 

  인간이 발명하고 개발한 것들이 새로운 미래를 약속하는 광고를 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발의 이면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화학비료와 현대식 화장실의 상관관계(질소화합물과 관련이 있다.)에 대해서 알고 있는 이들은 별로 없다. 새로운 에너지 생산을 위해 어마어마한 돈이 드는데도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새 에너지가 나오나보다.”고 생각할 뿐, 에너지 생산에 투입되는 막대한 자금이 결국 자유시장의 전체적인 물가를 인상시킨다는 경제의 메커니즘은 이해하지 못한다. 원자력 발전소의 발전량과 거의 24시간 가동을 중단하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에 현혹된 사람들은 발전소를 돌리는 돈이 우리의 주머니에서 빠져나가고 있다는 감춰진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리프킨은 “결국 가장 큰 부담을 지는 것은 납세자이다.”고 단언한다. 

  이런 방식으로 수송, 도시화, 군대, 교육, 컴퓨터, 보건 등 각 분야의 엄청난 수준이 ‘낭비’와 ‘오염’을 고발하는 리프킨의 주장은 1980년에 이미 제기된 것이지만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의 풍요로운 ‘정신적 삶’을 방해하는 심각한 요인들로 실체화되어 있다. 리프킨이 로마를 예로 든 도시화 비판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그는 로마 제국이 식민지 사업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 당시 인구 100만에 육박하는 도시 하나를 유지하기 위해 타지의 노동력과 자본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리고 당시의 로마는 오늘날 뉴욕, 파리, 런던 등 세계 주요도시들에 비유된다. “로마와 마찬가지로 현대 도시들은 인근 지역의 에너지 환경이 갖고 있는 생산용량을 훨씬 초과해버렸기 때문에 일단 국내 및 해외의 에너지 기반이 한계에 달하면 붕괴할 가능성이 크다.” 얼마 전, ‘I♡NY’이라는 테마로 방영한 KBS의 한 다큐멘터리가 갑자기 기억났다. 뉴욕의 신화를 설명한 영상이었는데, 리프킨의 주장을 듣고 보니 저 거인이 얼마나 많은 식량을 빼앗아 먹었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뉴욕 사람들은 별로 개의치 않을 것이다. 서울이라고 사정이 다를까. 

  한 학자(Herman Daly)는 위의 문제점을 낳은 서양식 발전 모델이 지구의 미래를 황량한 사막으로 만들어버릴 것이라고 하며 이렇게 말했다. “현재 세계 인구의 6%밖에 안 되는 미국인들이 세계 광물자원의 약 1/3을 소비하고 있다. 그리고 세계 모든 사람들이 미국의 생활수준에 도달하려 애쓰고 있다. 자원 생산량이 현대재로라면 미국과 동일한 생활수준을 누리게 되는 것은 세계 인구의 18%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82%에게는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을 것이다.” 오래되지 않은 기억으로, 나는 미국인들이 햄버거를 먹지 않으면 세계의 기아인구 10억 명이 하루 세 끼를 챙겨먹을 수 있다는 충격적인 비유를 듣고 경악을 금치 못한 적이 있었다. 이는 에너지 독점이다. 리프킨은 이러한 독점이 엔트로피의 법칙 내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결국 현재의 사고 개념을 바꾸지 않는다면 인류는 자원이 0이 될 때까지 남은 자원을 가지고 “있는 자들의 전쟁”을 치룰 것이며, 기아 인구는 지속적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했다. 당시는 태양 에너지가 인기를 얻고 있던 때였으므로 리프킨은 그것이 대안이 되리라 기대하는 사람들에게도 인식의 변화를 촉구했는데, 그것은 태양 에너지를 사용가능한 에너지로 전환하는 기술이 보유한 효율이 지극히 낮다는 것에 근거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원자력 발전소가 가장 운용대비 효율이 좋지만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인해 세계의 인식이 바뀌면서 독일은 자국 내 모든 원전을 폐쇄하겠다고 했고(하지만 독일의 경우는 특별하다. 우리나라는 원전 폐쇄의 트렌드를 따라갈 대체 에너지 개발이 부족하나, 독일은 북아프리카와 스페인 등지의 땅을 구입해 태양열 발전소를 직접 세워 그것을 자국으로 끌어들이는 기술까지 보유하고 있으며, 그 외에 여러 대체 에너지가 언제나 사용될 수 있는 상황이다.), 프랑스는 가장 원전의존률이 높음에도 트렌드에 맞춰 정치적 전략들이 제기되는 곳이다. 지금껏 태양열 에너지로 소위 ‘재미를 본’ 나라는 없다. 미국은 화력 발전소의 천국이고, 중국은 사상 최대의 원전 보유국이 될 야망을 꿈꾸고 있다. 이와 같은 시대에 리프킨의 ‘전 인류적 호소’는 사실상 힘을 잃은 듯하다. 

  리프킨이 제시한 대안들, 아니 ‘혁신’들의 실효성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그만큼 원칙적이라는 뜻이고, 이는 다시 말해 우리가 원칙에서 너무 많이 벗어나 있는 상태라는 참담한 현실을 씁쓸하게 되짚어볼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도시인구의 전면적 감소와 농촌의 활성화, 민주적 기업조직, 재생불가능한 자원의 소비 최소화, 세계 인구의 큰 감소(이 부분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불성설이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등이 리프킨의 대안이었다. 기계론적 세계관이 남긴 최악의 유물들을 거둬내기 위해 필요한 고통과 희생의 방안들은 이 정도의 무모함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대안들은 그가 내리고 싶었던 최종적인 결론이 아니다. 

  “궁극적인 도덕률이란 가능한 한 에너지를 적게 쓰는 것이다.”라는 구절에서 독자들은 리프킨의 호소문이 아주 실현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깨닫는다.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 배우는 ‘근검절약’이라는 말이 우리에게는 절실한 실천적 대안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리프킨이 경계했던 낙관주의자들, 즉 “진보를 막을 수는 없다.”는 사람들이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찬란한’ 모습을 상상하며 오늘도 전기와 물을 낭비하고 사치와 오염을 일삼고 있다. 이 책이 시대의 경종을 울려 많은 이들의 손에 들려졌었지만 종소리는 얼마나 오래 울리고 있었는지, 되돌아보게 되는, 창피함과 곤혹스러움에 한숨을 쉬게 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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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대한민국 1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2011.11.18
 


  주요 석학들이 늘 하는 말처럼 비판의 글들은 모름지기 주제에 대해 언제나 성실한 태도를 지녀야 한다. 일부 집단의 이익을 대원칙인 도덕의 비호를 받는다고 설명하거나, 혹은 그것을 사익에 가져다대는 글들은 예리한 독자들의 비난을 피하지 못한다. 마땅한 대안이 없는 경우에는 문제를 긁어 애써 부스럼으로 만들기보다는 문제를 그대로 직시하도록 유도해야 하는데, 요즘 일부 칼럼들은 ‘공격과 방어’라는 단순한 메커니즘을 갖고 가볍게 던져지는 듯하다. 이런 글들은 대원칙을 훼손시킨다. 가령, 최근 정치관련 칼럼들은 ‘좌파 실종’이라는 전 세계적인 현상 앞에서 마땅한 대안을 찾아내는 힘을 잃었는데, 그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상대방을 지나치게 비판하는 경향을 갖는다. 읽는 이에게 회의감을 주며, 그들은 대안의 실종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여 대안의 텃밭인 대원칙에 대해 조금씩 불신을 보낸다는 것이다. 

  비판의 글이 가져야 할 또 하나 중요한 성질은 시의적절한 문제들을 수면 위로 띄워 그것들에 독자들이 관심과 애정을 갖도록 하는 것, 즉 ‘공감성’이다. 이는 대체적으로 잘 지켜지는 듯하며, 여러 문제들을 향해 지속적으로 관심 가질 것을 요구하는 글들이 많다. 특히 우리가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이주민에 대해 ‘보편인권’을 호소하는 글들과 여러 포럼들이 개최돼 근본적인 각성을 촉구하는 최근의 흐름은 매우 건강하다. 물론 칼럼과 포럼들이 실제 국민들의 행동에 즉각적인 변화를 형성할 수는 없겠지만 SNS과 블로그 등 자유로운 소통의 기반을 통해 인식의 변화가 서서히 일어나리라 기대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비판의 글 특유의 차갑거나 뜨거운 분위기를 얼마간 사람의 ‘지적 체온’이 익숙한 온도로 유지시키는 위트가 들어 있으면 좋다. 특히 비유에 위트가 숨어 있으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인데, 비유에 대해서는 장정일의 지젝 관련 서평 중 서문을 인용해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어떤 사람이 무엇에 정통했는지 아닌지는, 보기(일례·example)를 만들거나 제시하는 능력으로 드러난다. 흔히 자기 혼자서는 알겠는데 남에게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은, 그가 아직 보기를 만들거나 들 수 있을 만큼 알지 못해서다. 대저 무엇을 안다는 사람이 보기를 실어 나르거나 만드는 일에 능하다는 것은, 역사상 위대한 스승이 모두 비유에 능했다는 것으로 증명된다. 어떤 명제나 논리든, 보기를 만들거나 들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알고 있는 게 아니다.” 

  위의 자격을 갖춘 비판의 글들은 지식인들을 ‘행동하는 양심’으로 탈바꿈시켜준다. 이 양심들은 구멍 난 사회의 옷을 꿰매어주고, 불붙은 뒷산의 화마를 진압해주며, 수술 도구도 없이 사람들의 지병을 서서히 치료해준다. 그런 점에서 일부 뜻있는 이들은 좋은 비판의 글들을 접해보기를 염원하는데, 나는 박노자氏(그의 조언대로 이제 타인을 언급할 때마다 뒤에 氏를 붙이는 것을 생활화해보고자 이렇게 적어본다.)의 <당신들의 대한민국>이야말로 시대의 반성을 도출한다는 점에서 몇 세대에 걸쳐 읽혀야 할 고전이 아닐까 생각해봤다. 초판 1쇄가 찍힌 지 이제 갓 10년이 되가는 책(올해 크리스마스이브이면 딱 10년이 된다.)을 일컬어 ‘고전’이라 부르면 터무니없는 소리라 하겠지만 이 책은 다소 특별한 점이 있다. 

  박노자氏는 외국인이었다. (얼마 전 그의 블로그에 들어가 보니 진보신당 입당을 위해 원서를 쓰려고 했는데, 주민등록번호가 없다는 그의 ‘교포 귀화인’이라는 특이한 신분이 현실적으로 많은 짐이 된다는 술회를 읽은 적이 있다.)  ‘당신들의 대한민국’이라는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겠지만 이 책은 ‘제 3자’가 봤을 때, “한국이 왜 이렇지?”라고 생각되었던 부정적 측면들을 우리의 오래된 낡은 서랍에서 굳이 꺼내어 펼쳐 보인 책이다. 한국인도 충분히 쓸 수 있는 책이겠지만 이상하게도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장터에 내놓을 만큼 ‘상도(商道)’를 모르는 사람들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잘 안 팔리는 것은 둘째 치고, 왜 이런 물건을 장에 내놓았느냐고 쏘아붙이는 사람들을 두려워한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치부를 만인 앞에 드러낼 용기를 가진 이들이 적을뿐더러, 그것을 드러냈다고 한들 “그래서 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라는 회의적인 질문들에 답할 마땅한 대안을 스스로 찾아내기 무척 어려웠다는 것이다. 일단 스스로의 단점을 찾아내는 것부터가 늘 어렵다. 

  예로부터 두 사람이 싸우면 둘과 전혀 상관없는, 즉 제 3자가 싸움을 조율해주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라 했다. 객관이 도움이 되는 때는 많다. 박노자氏는 한국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내면서도 “반성하라.”고 말한다. 여기에 우리가 반응하는 모습은 크게 두 가지일 것이다. 고개를 숙이고 깊이 생각해보거나, 혹은 오만에 찬 부정을 하며 쳐다보지도 않는 것. 둘 중 하나에 ‘양심’이라는 것이 있다면 저울은 어디를 향해 자신의 고개를 기울여줄까? 생각해보지 않아도 되니, 나는 부족한 식견으로나마 이 책이 시대의 고전이 되었으면 하고 바랐던 것이다. 

  책은 크게 세 가지 챕터(3, 4부는 주제상 하나로 묶어도 됨직 하나 분량 상 둘로 나눈 것으로 보인다.)로 구성되어 있으나, 그것들을 통해 박노자氏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사람이 사람 대하는 법에서부터 잘못되었다.”로 귀결되지 않나 싶다. 세부적인 내용을 파고드는 박노자氏의 예리한 눈은 우리가 보지 못했던, 혹은 보더라도 기억해내고 싶지 않았던 것들을 보여주는데, 우리의 작위적 인식은 대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그리고 ‘우리’라는 강력한 정서로부터 거의 무의식적으로 발생하는 듯하다. 

  원인 중 하나는 한국의 현대성을 극찬한 공교육이다. 교육은 EBS의 모토대로 백년지계(百年之計)이며, ‘바른 사람’, ‘행동하는 지성’, 그리고 ‘함께 가는 사회’를 만드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스승 그 자체이다. 하지만 그것이 악용되면 ‘세뇌’라는 불명예스러운 말로 불린다. 박정희에 대한 우리의 전근대적 생각이 그러하다. 나는 군생활 중 한 후임이 박정희의 숭배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사람을 다시 보게 되었는데, 한 번은 그와 함께 야간 보초를 설 기회가 있어 “왜 박정희를 좋아하느냐?”라고 물어봤다. 그러자 그는 경제개발과 베트남전쟁파병을 예로 들며 (경계근무 중에 물론 말을 하면 안 되지만) 몇 십 분이고 작은 소리로 열변을 토했다. 그의 열변에는 자긍심이 가득했다. 전 세대로부터 마치 ‘거룩한 성물(聖物)’이라도 물려받은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어째서 베트남전쟁파병을 통해 대외적인 폭력을 보란 듯이 행한 우리나라의 ‘일제식 군국주의’가 찬양되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나는 딱히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어리석게도 역사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이었다. 

  칼럼과 역사책들의 도움을 얻어,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들의 대한민국>의 설명을 읽고, 박노자氏의 표현대로 ‘일그러진 현대성’이 어디서부터 발원되었는지 알게 된 나는 얼마 전 박근혜 전 대표의 박정희 동상 방문을 두고 한 트위테리언이 “국민을 위한 정치를 논하며 조용히 숨어 있는 ‘공주’가 진정 국민을 위한다면 동상을 찾지 말았어야 했다.”고 강력한 비난의 글을 올린 이유를 드디어 이해할 수 있었다. 

  가장 살에 와 닿는 공감은 ‘아직도 폭력이 충만한 사회’를 통해 박노자氏가 우리나라 군대의 현실과 제대한 예비군들이 겪는 외상에 대해 비판한 부분이었다. 어제 집안 제사가 있어 친척들이 모였을 때, 내년이면 신검을 받고 군대에 갈 준비를 해야 하는 사촌동생에게 나는 “할 수 있으면 군대에 가지 않는 것이 좋다.”고 조언해줬다. 겸손하고 현명한 자는 2년이라는, 혹자들이 ‘쓸데없는 시간’이라고 말하는 긴 시간 속에서도 많은 것을 배우겠고, 때문에 그것을 변으로 삼아 핑계 대는 것은 호소력이 없겠지만 무엇보다도 우려되는 것은 내가 직접 겪고, 내가 일면 배웠던 일명 ‘갈굼’이라는 폭력에 사촌동생이 물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군대는 사회와 완전 별개인 집단이어야 하는 것이 그들의 관행이 입대자를 물들여 병장 즈음 돼서 제대할 때에는 사람의 인성을 거의 180도 변화시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다 그렇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대체적으로 군필자들은 그들 나름의 ‘패거리 정신’을 갖고 있다. 정신적 고통을 견뎌 어떤 인격적 승화를 이루기라도 한 것처럼 목에 힘을 주며 술잔을 기울이곤 하는데, 이 얼마나 쓸데없는 행위란 말인가. 

  ‘역사 속의 교훈들’이라는 조그마한 제목의 글에서는 얻는 바가 많았고, 개인적으로는 최근 읽은 기사와 칼럼들 중 여기에 보태어 생각할 것들이 있어 귀중한 부분이 되었다. 평소 ‘보편인권’이라는 대제(大題)를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으나, 근래 들어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을 통해 어떤 실천적 대안(대안이라고 할 것까지 있겠는가 싶지만)을 고려해볼 수 있는지 고민하던 차에 어제 <한겨레> 신문에서 ‘2011 아시아 미래포럼’의 논의 내용들을 소개해 준 대목에 눈길이 가게 되었다. 그 중 나는 ‘이주민에 대한 방송보도 패러다임’을 눈여겨봤는데, 복기해보자면 이렇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의 아시아판 전 편집장이었던 패트릭 스미스가 말하기를 “아시아 국가들이 여러 문화적 다양성을 수용할 자세가 돼 있는지 모르겠다. 일단 언론사부터 편집인에서 기자들까지 스스로를 교육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왜 이런 말이 나왔을까? 강명구 서울대 언론정보대학 교수가 적절한 답을 준 것 같은데, 그는 “국내 언론은 한류에 대해 ‘어떻게 하면 더 확대하고 돈을 벌 수 있을까’ 하는 식으로만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를 넓혀 생각해보면 상업성에 물든 언론들이 중립적 감각을 잃고, 사람들이 별 관심 없어 하는 인권의 문제를 소홀히 한다는 명확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요즘 한류에 유독 열광한다. 나르시스를 보는 듯하다. 나도 얼마 전 BBC 홈페이지에 들어갔다가 메인 화면에 한류열풍관련 기사가 게재된 것을 보고 뿌듯해하긴 했고, 한류와 관련된 다큐멘터리들을 여럿 리뷰하기도 했는데, 박노자氏는 이미 이를 예측했는지 10년 전에 지금의 ‘환상’이 갖는 위험성을 지적했다. 얼마나 위험한지는 ‘미등록 체류자 인권’이라는, 김창보氏의 오피니언을 읽으면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사람의 생명을 좌지우지하기도 한다. 

  또 하나는 역시 최근 들어 문제가 된 교과서 집필 누락 사건인데, 이는 사태가 대단히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름조차 거론하기 싫은 한 국회의원이 안철수 교수에 대한 정치적 반격을 위해 안 교수가 언급되어 있던 교과서의 내용을 삭제했다는 기사는 사실 빙산의 일각이고, 정말 중요한 것은 5.18 민주화운동과 6월 민주화항쟁의 내용을 앞으로는 교과서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소식이다. (다행이도 이 글을 쓸 무렵과는 달리 최근 교과부는 상기 내용들을 누락시키지 않도록 조치했다.)이에 대해 김상곤 경기도교육감은 “잘못된 교과서 집필기준은 검열이며, 정권의 입맛에 맞는 교과서를 만드는 것은 헌법적 가치를 훼손하는 행위이다. 교과부가 대표적인 민주화 운동의 사례를 집필기준에서 뺐다. 강요된 집필기준에 따른 자기검열과 교과부 검정을 거쳐야하는 위기에 놓였다.”며 열을 올렸다. 나는 이미 교과과정 중 배운 내용이고, 그와 관련된 여러 다큐멘터리들이 공영방송을 통해 충분히 방영되어 왔음을 알고 있던 터라,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같은 생각일 것이지만 “어떻게 그걸 뺄 생각을 다했지?”라는 경악스러운 질문을 허공에다 던져버릴 수밖에 없는 슬픔을 느끼게 되었다. 이런 국가가 어떻게 타국의 역사왜곡을 민족의 힘으로써 저지하고 비판할 수 있겠는가. 

  인류의 역사는 분명 도덕에 입각해 그 대원칙에 준하는 진보를 이룩해야 함이 옳다. 그를 위해 우리는 환상에서 깨어나야 하고, 겸손해져야 하며, 주변을 돌아봐야 하는데, 우리가 2002년 월드컵을 응원하며 내뱉었던 “대한민국!”이라는 응원구호가 실은 우리 나름의 ‘우리식 환상’을 뒷받침하는 탄탄하면서도 강력한 초석이었다는 사실은, 그럼에도 믿기 힘들어진다. 우리가 가지고 있던 부패가 실은 자긍심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긍심을 잃으면 민족적 열망과 추진력도 사라지리라 누구나 예상하기 때문에 부패를 자긍심을 통해 기꺼이 가려왔던 것이 현실이라고 박노자氏는 말한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도덕적 원칙이 있으나, 서해교전 시 우리나라의 막강한 화력에 격침당해 물귀신이 된 북한 병사들의 목숨은 목숨이 아니냐는 그의 말은 열렬한 ‘대한민국 국민’에게 오해를 살 수도 있는 발언이다. 하지만 고쳐 생각해보면 백 번 옳고 바른 말이다. 이렇게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우리라고 과연 백의민족 속에 감춰진 폭력과 부당함을 부정할 수 있을까. 

  그의 추궁은 이어지는 장에서도 계속된다. 대학생들이면 누구나 공감할 ‘퇴폐한 상아탑’으로써의 대학, 특권집단으로써의 대학, 그리고 여기에 하나 더해 기업으로써의 대학도 비난을 받고, ‘우리’라는 감수성 짙은 담론을 통해 은폐되어 온 사건들이 드러나며, 국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특히 이 부분에 있어서는 1999년 8월의 ‘도의원이 인터걸 사업’이라는 <중앙일보>보도를 인용하고 있는데, 수치스럽기 이를 데가 없는 사건이었다.) 하고, 미국 등 우방을 위해서라면 역시 국민을 우롱하는 정부의 행태도 파헤쳐진다. 마지막으로 바트자갈의 비극적인 사건(불법체류자를 착취한 영세 자본가들의 행태이다.)은 우리나라의 소름 돋는 ‘인종 서열주의’를 보여준다. 

  얼마 전, 프랑스에서 통과된 차도르 착용 금지 법안이 세계적인 논쟁으로 떠올랐을 때, 각 유럽의 극우파들은 자국의 경제사정도 좋지 않은데 귀화한 외국인이나 외국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아간다는 단순한 민족주의적 원리로 심지어 ‘피부색 다른 사람들’을 살해하기도 한 최악의 사건들이 연이어 보도된 적이 있었다. 그나마 우리나라는 민족주의의 색이 옅은 것인지는 몰라도 이 비열한 사건의 발생지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시선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심리학계의 이론에 빗대어 생각해보건대, 우리의 냉혈안적인 시선이 “나는 불법체류자다.”라고 국내 체류 외국인들이 스스로를 각인시키도록 유도하는 것은 아닌지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위의 칼럼 소개로 하나 짤막하게 대신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얼마 전 한 외국인 노동자가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고 숨지는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다. 대체법안이 나왔는데, 그 법의 보호자는 ‘미취학 아동’뿐이었다고 한다. 

  중국의 현대적 지성을 상징하는 루쉰이 <광인일기(狂人日記)>에 이런 구절을 적었고, 박노자氏가 그것을 서문과 뒤편 책날개에 옮겼다. <광일일기> 소제목 ‘9’의 인용구이다.
  “자신은 사람을 잡아먹으려 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잡아먹히는 건 두려워서 모두들 지극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서로 상대의 얼굴을 몰래 훔쳐본다.
  루쉰이 하고픈 말은 이은 소제목 ‘10’의 한 부분에 교묘히 숨겨져 있다.
  “사람을 잡아먹는 인간은 사람을 잡아먹지 않는 인간에 비해 얼마나 부끄러운 존재입니까? 이것은 아마도 벌레가 원숭이에 비해 부끄러운 것과는 도저히 비교도 안 될 만큼 부끄러운 일일 겁니다.” 

  박노자氏는 이것이 한국의 현대사회가 지닌 모습이라고 했다. 대가 렘브란트가 한국의 초상화를 그려줬다면, 우리는 어떤 걸작을 보며 가슴 아파할 수밖에 없었을까. 다양성과 평등을 외치며 어딘가 사회의 각박함을 일거에 소멸시킬 수 있는 방법의 물꼬가 있으리라 기대하지만 여전히 좋은 일은 간혹 나오고, 좋은 사람들은 강호에 숨어 소리 없는 선행을 베풀고 있다. 나를 포함한 우리 대부분은 인생을 옭아매는 여러 부차적 ‘주체’들에 휩쓸려 다니는 ‘객체’가 되어 가고 있고, 판단력은 흐려져 정치하는 이들이 국민을 쉽게 우롱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여전히 이 나라의 자긍심을 믿어 도처에서 일어나는 악행들을 무의식적으로 회피하며, 그것이 우리를 공격하기에 이르면 당황스러워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럴 무렵에 박노자氏는 한국에 들어왔다. 그가 타지에서 책과 사상을 통해 사랑하던 조그마한 나라의 실제 모습은 달랐다. 뼈아픈 역사 속에서 신음하다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그동안 우리가 누구를 죽여 왔는지 알지도 못하는 잠재적 살인자였다는 것을, 그도 믿고 싶어 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단한 용기로 적힌 책이라, 곁에 두고 오래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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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론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43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서병훈 옮김 / 책세상 / 200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2011.11.15
 


  얼마간 읽을거리들을 쌓아놓고 보니, 최근 들어 나의 주제가 ‘인간’으로 좁혀져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대략 일곱 권인데, 새벽을 꼬박 새는 부지런을 떨면 몰라도 다음 주까지 일일이 정리하며 통독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러한 주제들은 독서의 씨줄과 날줄을 제법 촘촘히 해주니, ‘가슴이 뜨거워지는’ 이 책들에게 기대를 해봄직도 하다. 조만간 읽을 책이란 (재독까지 포함하여) 홍세화의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한겨레신문사, 1999), 노암 촘스키의 <촘스키, 세상의 물음에 답하다>(시대의창, 2005),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시대의창, 2002), 강준만의 <입시전쟁 잔혹사>(인물과사상사, 2009),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한겨레신문사, 2001), 진중권의 <호모 코레아니쿠스>(웅진, 2007), 장하준의 <나쁜 사마리아인들>(부키, 2007)이다. 

  그에 앞서 지난 여름방학을 틈타 천천히 읽었던 존 스튜어트 밀(1806~1873)의 <자유론>(책세상, 2005)을 재차 읽었다. 후에 그의 <공리주의>도 접해야겠다고 벼렸기 때문(<자유론>에서 밀이 개인의 차원을 사회와 대비하여 서술했다면 <공리주의>는 사회윤리이다.)에 언젠가는 재독하고자 한 터였다. 미리 정리해놓은 바가 있어 읽기에 큰 불편은 없었지만 그의 고민이 담긴 문장은 곱씹고 넘어가야 하는 것들이 많아 여러 번 접한다 해도 술술 읽히진 않는다. 그러나 아주 얇은 책인데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무려 한 세기도 더 된 이 책의 위력은 우리를 고개 숙이게 만든다. 

  숙원은 먹지 않을 홍어처럼 그저 삭혀지고만 있는 것일까. 나는 대중들이 그들의 삶에서 돌파구를 찾기 위해 전전긍긍하듯 이 시대가 분명 변하고 있으며, 그것이 어떠한 방향으로 ‘행동’되는지 확고한 관심을 가져야한다고 직감하기 시작했다. 유명 저자들과 논객들의 말마따나 지금의 세계는 분명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사유의 포석을 밀의 <자유론>에 두고자 했다. 결국 나머지 일곱 권의 책이 하고자 하는 말은 그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으리란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자유의 진정한 의미가 원칙(그런데 이것이 과연 흔히 말하듯 고리타분한 것일까?)적으로 무엇인지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는 직관도 한 몫을 했다. 때문에 이번 독서는 조금 길게 복기해본다. 마치 차서한 사람마냥 조바심 내며 읽었던 이번 여름의 기억이 아쉬웠기 때문이리라. 

  밀에게 있어 자유는 “인간은 자기 보호를 위해 타인의 행동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으나, 다른 이유로는 불가하다.”는 말로 일축된다. 복기해보건대, 이것은 그가 말한 효율(utility는 곧 항구적 이익(permanent interest)과 같은 개념이다.)이 도출되는 원리이다. 쉽게 말해 “남에게 참견하기 위해서는 나의 참견이 반드시 남에게 유익해야 한다.”는 win-win의 원리이다. 바꿔서, 이렇게 말해볼 수 있다. “내가 하는 일이다. 이 일은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경우에 사회는 간섭하면 안 된다. 권리와 의무가 동시에 포함되어 있는 명제로부터 밀은 ‘인간 자유의 기본 영역’이라며 세 가지의 경우를 언급한다. 그 전에 그는 “우리의 육체나 정신, 영혼의 건강을 보위하는 최고의 적임자는 누구인가?”라고 우리에게 묻는다. 그리고 “바로 각 개인이다.”라고 못 박는다. 이것이 논의의 출발점이다. 

  세 가지 기본 영역 중 첫 번째는 ‘내면적 의식’, 즉 속마음이다. 많은 이들이 역사를 회상하며 전제정치의 획일성 앞에서 치를 떤다. 오웰의 소설 <1984>는 “빅 브라더가 당신을 주시하고 있다.”라는 구절로 독자들을 옭아맨다. 이러한 역사가 바람직하지 않음을 인지하고 있는 이들은 많다. 하지만 정작 우리 사회에서 의사표현의 자유는 얼마만큼 허락되는가를 물으면 결코 긍정적인 답변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드니 로베르가 쓴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시대의창, 2002)의 서문에 적절한 예시가 나와 있다. 프랑스인들에게는 아마 아주 유명할 것인데, 1970년대 말, 리옹 대학의 프랑스문학과 교수 포리송이 나치옹호발언을 했다가 옷을 벗게 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촘스키는 ‘표현의 자유’를 옹호했다. 그러자 프랑스인들은 촘스키를 나치주의자라고 비난했다. 해명이 필요했던 촘스키는 자유가 무엇인지 프랑스인들에게 일러줬는데, 로베르에 따르자면 그 해명은 “나는 당신이 쓴 글을 혐오한다. 그러나 당신의 생각을 표현할 권리를 당신에게 보장해 주기 위해 나는 기꺼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한 볼테르의 유명한 경구를 연상시키는 글이었다고 한다. 이는 밀이 말한 ‘자유’이다. 

  표현할 자유가 있다면 우리가 뭘 좋아하고 바라는지도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또한 결사의 자유도 갖는다. 무려 150년 전의 이야기이지만 밀은 “사회가 설정한 성공 기준에 맞게 살도록 강하게 종용받고 있는” 당시 상황에 대해 개탄을 마지않았다. 우리는 ‘성공 기준’이 무엇인지 암암리에 알고 있으며, 젊은이들은 그 기준에 최대한 가까이 가기 위해 수많은 스펙을 쌓으려고 노력한다. 리글리가 <나쁜 사회>에서 말한 ‘마태 효과(Matthew Effect)’의 희생양이 되지 않으려는 생존의 투쟁인 것이다. 전체적으로 조망한다면, 여러 가능성을 갖고 있는 이 사회가 일종의 강제수용소와도 같다는 항간의 판단은 틀린 말이 아니다. 개그콘서트(KBS)의 한 코너에서 모녀의 대화가 주목을 끈 적이 있다. 사윗감으로 어떤 사람이 마음에 드는지 묻는 딸에게 어머니는 “너만 좋아해주는 남자면 좋지.”라고 운을 뗀 뒤, 속마음을 드러낸다. 둘째 아들에, 대기업 직원이나 공무원, 키는 183cm에, 얼굴은 이병헌. 밀의 바람과는 달리 우리의 육체나 정신, 영혼의 건강을 보위하는 최고의 적임자는 다름 아닌 사회이다. 다수의 횡포(tyranny of the majority)가 개인의 숨통을 죄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과연 왜 그런가?”라 묻는 것을 두려워하고, 혹 묻더라도 질문의 끈을 쉽게 놓아버리게 된다. 

  밀은 뭔가 말하려는 우리의 입을 잠시 막아놓는다. 그리고 두 가지 논리를 펼친다. 첫째, 만약 우리가 말하려는 의견이 진리인데 침묵을 강요당할 경우, 둘째 그 의견 중 일부만이 진리인데 역시 강압적으로 입이 틀어 막힌 경우이다. 여기서 밀은 ‘진리’라는 개념에 대해서 파헤친다. 그가 보기에 사람은 자주 오류를 범하므로 판단에 있어 진리는 있을 수 없다. “철저한 부정과 비판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그의 주장은 “확실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말하면 안 된다.”는 우리의 관습적 사고를 타파하라 호소한다. 관습적 사고란 믿음과도 같다. 루이스 월퍼트는 <믿음의 엔진>에서 그 ‘믿음’이라는 것의 실체를 고발한 적이 있다. 자유롭고 싶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통제와 압력 속에서 욕구를 이루지 못하면 점점 용기를 잃고 퇴화하게 될 것인데,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다채로운 생각에 대한 자신감을 잃고, 사회에 만연한 잘못된 믿음에 자신의 신념을 맡기게 된다. 이에 밀은 말한다. 

  “전도유망한 지성인들이 소심해져서, 비종교적 또는 비도덕적이라는 평가를 받을까 두려워하여 용감하고 씩씩하게 독립적인 생각의 날개를 펼칠 엄두를 못 내게 될 때, 도대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 다음에 이어지는 문장도 복기해야 한다. “단지 생각하는 것이 귀찮아서 기존의 올바른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덕분에 실수를 피할 수 있는 사람보다는, 적절한 공부와 준비 끝에 자기 혼자 생각하다가 실수를 저지르는 사람이 진리의 발견에 더 크게 기여한다.” 밀은 자유가 용기의 산물이라는 시각을 철저하게 옹호한다. 

  두 번째 경우, 즉 우리가 하려는, 하지만 애당초 발언을 차단당한 말이 일부만 진리일 경우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수학은 정답이 있는 학문임으로 예외라 하고, 나머지 모든 것들은 밀의 말처럼 ‘종합적 판단’으로써 결론에 다다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의 것들에는 이미 정답이 있다는 식으로 말하거나 행동, 혹은 생각하게 된다. 우리들 중 과연 충분한 토론을 거치거나 사유를 해 기존의 결론들이 합당한 것인지 고찰해본 이가 몇이나 될까. 이는 의지의 실종이기도, 혹은 각박한 삶의 피로일지도, 아니면 종용되는 기준에 합승하고자 하는 소시민적 DNA의 유전일지도 모르겠지만 이와 같은 작업을 할 최대의 적격기인 대학 생활의 대부분이 취업준비로 와전되어 있는 상황을 가장 먼저 개탄해야 할 점으로 여겨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밀의 말마따나 “확정된 결론은 깊은 잠에 빠진다.”고 하니, 오히려 튼튼한 근거를 가지고 서로 치고 박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가 건강한 것이리라. 다만 이런 풍토가 마련되기 위해서는 비방과 인신공격이 자주 토론장에 등장하는 우리의 ‘정치적 언어 속성’을 결단내야 할 것인데, 밀도 “언어폭력을 방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언급했다. 이와 관련해서는 최근 우리나라 10대들의 언어생활 중 절반이 넘는 시간이 ‘욕’으로 점철되어 있더라는 한 사회통계조사를 주목해봄직하다. 욕이 정감과 친분의 표현이라고는 하지만 본래 욕의 속성은 타인에 대한 언어적 공격에 있다. 이는 도덕률에 어긋나는 것이다. 밀은 “악의나 비방의 정도가 너무 심한 사람이나 타인의 감정에 관용적이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는, 그가 누구이고 주장하는 바가 무엇이든 관계없이, 가차 없이 비판을 가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우리나라에서 낸시랭이 비난받는 이유는 오늘날 사람들이 아직도 ‘파격’이라는 개념을 여러 위험이 도사리는, 혐오의 어느 즈음에 놓인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녀의 삶과 행동은 옐로우페이퍼들의 소위 ‘먹잇감’으로 다뤄지기 쉽다. 도발이 그녀의 전략이기 때문이다. 이에 독설로써 비아냥거리는 이들도 도발에 대한 방어를 그들의 전략으로 삼고 있다. 사실 현대예술의 신랄하며 노골적인 퍼포먼스들이 국내에 (조금 늦은 감은 있으나) 지속적으로 소개된 이후, 그것을 오판하는 이들은 그나마 많이 줄어들었다. “예술의 경계는 어디까지인가?”와 같은 종류의 학자적 성찰에서부터 시작해 그것의 가치나 사회적 효용을 묻거나, 그것으로부터 창의적 사고의 전형을 뽑아내는 서적들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 관심이 높아진 것은 자명하다. 현대미술 전시장에 들러 작품을 보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교양을 위해, 혹은 지적 호기심을 위해 그것을 찾는데, 이렇게 해서라도 우리나라의 소위 ‘식자(識者)’층들은 개념상으로나마 현대예술의 여러 특징들을 흡수하는 중이다. 하지만 국내 유명인사들 중 파격의 대명사라 불리는 낸시랭의 행동들은 항상 도마 위에 오르고, 상당한 공격을 받는다. 그렇다고 해서 이를 우리나라 특유의 보수성이 지닌 맹점이라 진단하기에도 무리는 있다. 돌이켜보건대, 이것은 세계적인 현상이다. 낸시랭 같은 이들이 비단 그녀 한 명 뿐이었던가. 그런데 밀은 이 ‘파격’을 옹호하며, 심지어 그것이 “인류에게 큰 봉사”의 역할을 한다고까지 말한다. 그가 하고픈 말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주장은 과연 우리에게 어떠한 호소력을 가지는가? 

  밀의 원칙은 이렇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각자의 개성을 다양하게 꽃피울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대중들은 어떠한가? 한 세기하고도 반세기 전의 밀이 그것을 놀라울 정도로 정확히 설명했다는 것이 나에게는 섬뜩하게 다가온다. “자신의 위치에 어울리는 것이 무엇인지, 자기와 비슷한 신분의 사람, 또는 경제적 여건이 비슷한 사람이 주로 무엇을 하는지, 자기보다 높은 위치의 사람이 즐겨하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며, 우리는 항상 인터넷을 검색하거나 지인에게 “으레 그러한 것”의 전형적인 규범들을 찾으려고 애쓴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먼 산에 있는 나무가 몇 그루나 되는가 짐작이라도 해보려는 심산으로 ‘창조’, ‘천재’, 혹은 ‘파격’에 대한 여러 일화들을 찾아 읽는데도 시간을 기꺼이 소비한다. 모순되는 두 태도 중에서 밀은 기꺼이 후자의 손을 들어준다. 그것은 “소금과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존 케이지는 일찍이 모더니즘의 업적을 일컬어 우리의 눈을 뜨게 해준 것이라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건이 좋지 않거나, 혹은 그럴 기회를 조기에 박탈당해 그런 삶은 사치일 수밖에 없는 궁핍한 상황에 놓여 있다. 문제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회에서 ‘자기 식대로(his/her own mode)’라는 문구는 아직 소원하다.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는 것일까? 밀이 보기에 그것은 교육의 확대, 교통과 통신의 발전, 상업과 제조의 발달, 그리고 여론의 성장 등에 있는데, 사실 이런 현상들은 현재 활발히 진행 중에 있으며, 우리와 뗄 수 없는 현대사회의 특징들이다. 개별자들은 똑똑해도, 그들을 모아놓고 나면 바보가 된다는 속설은 이미 기정사실화되어 있고, 현대사회는 빠르게 변화하는 와중에도 관습적 사회의 모습을 꿋꿋하게 유지하고 있다. 상황이 이러하니, 여러 가지 사회운동들이 호소하는 바의 절절함이 대중매체의 여러 소식에 가려 들리지 않고, 여성들이 “예의 그랬던 것들”을 그대로 답습하는 모종의 사회적 ‘절차’들이 인정되면서 그들 스스로의 비판, 부정, 일상의 조소, 어쩌다 한 번의 반항 등이 기성 남성들에게 저항할 무기조차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낸시랭과 같은 이가 더 낫지 않느냐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왕성한 정력, 강렬한 감정을 용납하지 않고 스스로 미약하고 허약해지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 식자들이 갖고 있는 궁극적인 멜랑콜리라는 밀의 주장이 나의 생각을 뒷받침한다. 물론 이것은 일상의 도발이며, 현실과는 요원한 말이니만큼 귀를 기울여야 하는 대목이다. 

  이어지는 글에서도 그는 지속적으로 이상적인 상황에 대해 호소한다. 개인이 이처럼 자유를 가질 권리를 추구한다면 이상적 사회의 모습은 어떻게 변할까? 밀이 말하는 이상적 사회란 “인간의 보편적인 경험이 용납하지 못하는 행동을 제외하고는, 모든 불확실한 문제에 대해 각 개인의 자유와 선택을 전적으로 존중해주는 사회”이다. 어떻게 본다면 이는 일부 반(反)종교적 성향을 지닌 이들에게 “종교가 없는 사회” 정도로 비춰질 수도 있겠지만 그건 협소한 생각일 뿐이다. 물론 그들의 생각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밀 역시 그와 비슷한 발언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너의 행동은 도덕에 어긋난다.”라는 판단의 근거가 “신에 대한 불경이기 때문이다.”라는 추론으로부터 나온다면 그것만큼이나 강력한 권한을 발휘하는 진단은 없다고 밀은 말했다. 그러나 종교가 설파한 진리 중에는 타인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그리스도교), 타인과 나로 이뤄진 사회의 그물(불교) 등 ‘자유’의 현대적 개념을 은유할 수 있는 것들이 있으므로 뭔가를 “신의 이름으로” 하고자 하는 종교적 왜곡들만 제거할 수 있다면 종교는 사실상 도덕에 호소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다. (세이건도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에서 이런 생각을 내비친 바 있다.) 

  그러나 밀의 <자유론>은 5장 ‘현실적용’에 이르러 여러 난관에 부딪힌 자유의 모습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를 보여준다. 밀이 오늘날 태어나 이 부분을 다시 쓴다면 19세기보다 훨씬 큰 장애물들을 실감했을 것이리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밀이 각 부분들, 가령 독약 판매, 국가의 주류세 인상 혹은 인하, 간음과 포주의 문제, 이혼, 여성과 자녀의 자유, 교육, 무조건적 자유, 정부 권력의 분산 등은 여전히 여러 논쟁거리들을 건드린다는 점에서 상기해봄직한데, 밀은 여전히 그가 서두에 밝혔던 자유의 관점을 굳건하게 밀고 나간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실상 교육 밖에 없다는 뉘앙스도 남겨놓는데, 이 부분에서 (다른 나라도 크게 다르진 않겠지만 유독 교육열이 높다는 이유로 살펴보자면) 우리나라의 경우는 상당한 열위에 놓여 있다. 암기식 교육의 틀에서 벗어나 필자가 초등학생이 되었을 무렵부터 서서히 ‘열린 교육’이라든지 ‘창의적 교육’과 같은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들이 실행된 바 있었고, 오늘날에는 대안교육의 긍정적 부분들이 자주 소개되면서 “내 자녀를 과연 현 교육시스템에 맡겨도 괜찮은 것일까?”라는 생각을 하는 학부모들이 많이 늘어나는 추세이다. 

  나는 교육자 집안이라는 이유로 그런 문제들을 부모님으로부터 자주 접하곤 했는데, 사실 그럼에도 문제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은 누가 봐도 자명하지 않을까 싶다. 교육의 방법이 어떻게 변화하는가는 귀추를 주목해야 하는 사항이다. 그럼에도 결론은 어떠한가? 오늘날 대학교들이 전(全)인문화 과정이 통한 대학생들의 전인화를 꾀하지만 정작 대학생들은 취업을, 고등학생들은 대학진학이나 고졸 후 취업을 목표로 하게 된다. (기업이 예비기업인을 낳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형국이다.) 패러다임이 어떻게 바뀌었든 그것이 향한 결과는 같으므로 교육을 통한 인식 향상의 질은 나아질지 몰라도 결과적 상황은 비등하다. 예부터 충분히 “자신의 입장을 정리할 수 있을 정도의 지식을 갖춘” 사람들이 이 사회에 양산되었지만 과연 그들이 어떠한 변화를 시도했는가는 미미한 흔적으로만 남아 있다. 대중이 문화전체주의에 빠져 있는 현 상황에서 우리에게 경종을 울릴만한 참신한 ‘자유의 시도’들은 대개 폄하되기 일쑤이고, 우리는 자유롭지 않을 자유(free not to be free, 이는 노예에 대해 쓰는 말이다.)를 쫓는 이상한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밀은 “최소한(any tolerable amount)의 상식”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많은 상식이 있다. 배우는 것도 많다. 하지만 ‘내면의 힘(inward forces)’은 턱없이 부족한 듯하다. 자유는 목적 그 자체로써 인간에게 행복을 주는 몇 안 되는 개념 중 하나이다. 행복을 위한 자기발전은 인간의 생명원리를 구성한다고까지 밀은 역설한다. 그리하여 그는 “배부른 돼지보다는 고민하는 소크라테스가 되어라.”는 유명한 유행어를 남겼다. 

  모든 것은 자유와 연결되어 있다. 자유를 추구하고, 자유를 누리고, 자유를 노래하고, 자유를 억압하고, 자유를 통제하며, 때론 자유를 말살시킨다. 만약 우리가 자신을 삶의 주체라고 여긴다면 우리의 자유가 강탈당하는 현장을 보고 그것에 대해 묵인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타인의 자유가 실종되는 불의한 상황에 대해서 우리는 놀라우리만치 미온한 태도를 취한다. 요컨대 ‘양심의 추락(Disgrace of conscience, 쿳시의 소설 <추락(Disgrace)>에서 인용해봤다.)’ 말이다.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들이 사회와 개인에게 요구되는지 나는 아직 질 알지 못한다. 다만 생각해보건대, 이는 대체 어느 부분 있어서 우리의 양심이 부족한가를 먼저 알아보는 고통이 선행되어야 비로소 시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반죽도 안 만들었는데, 맛있는 김치전을 어떻게 만들겠냐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소심한 용기를 일으켜 몇 권의 책을 더 읽기로 했다. 밀은 그 방향을 알려줬다. 150년 전의 고전이 도저히 고전으로 읽히지 않은 것이 많은 반성을 하도록 하며 말이다. 그가 바란 희망을 우리가 성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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