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탄생 - 다빈치에서 파인먼까지 창조성을 빛낸 사람들의 13가지 생각도구
로버트 루트번스타인 외 지음, 박종성 옮김 / 에코의서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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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01  

 

  나에게 만약 추천사를 쓸 위치가 주어졌다면 나는 이 책을 “모두가 읽었으면 하는 책”이라고 단언했을 것이다. 물론 추천사를 쓴 분은 내가 감히 경지를 논할 수 없는 이어령氏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 내가 써야 할 책이 먼저 나왔구나!” 창조성의 원칙이 그의 지론이었던 까닭이다. 여전히 “How?”보다는 “What?”을 강조하는 사회. 그러다보니 여전히 지식이 주가 되는 사회. <지식의 미술관> 리뷰에서도 언급했었지만 지식에 기반을 둔 단편적 사고로 창조의 영역을 설명하려는 놀라운(?) 사회. 이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전인(全人)을 다시금 되살리려는 이 시대의 교육과 전인의 일면을 본받아 다양한 것을 접하고 천편일률에서 벗어나려는 깨우친 학생들에게 <생각의 탄생>은 그 숱한 표현처럼 ‘단비’와 같은 책이다. 상상력이 왜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이어령氏의 추천사만 읽어도 뇌리에 박히겠지만 정작 이 책을 펼쳐 들었을 때, 독자들은 “이렇게 생각의 방법이 많아?”하며 놀라게 될 것이다. 루트번스타인 부부는 오랜 연구 끝에 서양 특유의 여러 카테고리 분류로 책의 챕터를 나눴다. 하지만 결론에 이르러서는 이 모든 것들이 하나로 융합되어 있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창의성이라 강조하니, 자칭이고 타칭이고 ‘지성인’이라 불리는 우리가 아직 갈 길은 참으로 멀고도 먼 것이다. 

  내가 네이버에서 미술 블로그를 꾸려갈 무렵의 이야기이다. 나이가 있으신 한 이웃 화가께서 “나는 미술을 공부하는데 있어 몇 가지 핸디캡을 안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그릴 줄 모른다는 것이다.”라는 나의 글에 코멘트를 달아주신 적이 있었다. 한 노(老) 화가의 말씀을 빌려 “차라리 데생을 몰랐으면 하는 것이 화가의 마음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고 조언해주신 것이다. 나는 이 코멘트를 읽다가 머리를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미술을 공부한다면서 뭔가를 크게 잘못 알고 있었다는 느낌이 든 것이다. 현대미술을 이해하기 위해 많은 이론과 이미지를 공부하면서 머릿속으로는 “기술은 미술의 전부가 아니다.”라고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마음으로는 그것을 깨닫지 못한 것이었다. 이 순간부터 나는 내가 개인적으로 겪었던 창조의 문제를 새삼 일기장 꺼내어보듯 회상하기 시작했다. ‘창조’ 말이다. 

  창조적 생각을 감성 없이는 상상할 수 없다. 우리가 바쁜 일상 중에 이런 경험을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상상의 경계’를 넘으면 “나 자신을 잊는” 몰아(沒我)적, 혹은 탈아(脫我)적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구체적이지 않다. 구체성은 표현을 통해 그것이 얼마나 구체적인지를 드러낼 뿐이다. 이 과정에서 특이한 일이 일어난다. 표현하려고 시도하면 그 중 전혀 표현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도 표현된다는 것이다. 오키프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한창 시를 썼을 때, 나는 표현의 한계(이건 대개 주제가 확장될 때마다 느끼게 된다.) 앞에서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나름 생각하고 고민한 적이 있었다. 독서량의 문제, 어휘력의 문제, 경험의 문제, 혹은 하루에 한 편씩은 꼭 썼던 다작(多作)의 문제 등을 생각해냈지만 그것들은 사실 파편에 지나지 않았다. 근본적인 문제는 ‘표현’이라는 것 자체에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시가 만들어지는지를 나 스스로에게 설명하려고 한 적은 셀 수 없이 많았다. 나는 어떤 공식이 있을 것 같았고, 시를 쓰는 방법에 대한 조언을 찾아 읽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대개 기술적 문제들, 가령 시어(詩語)의 선택, 점층, 대구, 어미 처리, 열거, 율조, 문체 등에 국한된 문제들이었다. 아직 등단하지 않은 아마추어들에게는 ‘제격’을 찾는다는 의미에서 적잖은 도움이 될 수는 있겠으나, 기성 문단의 베테랑들에게는 일말의 도움도 되지 않는 것, 쉽게 말해 창조의 파편 그 이상도 아니었다. 상상과 창작의 대가들이 말하는 ‘표현’이라는 것은 거의 속 시원하게 설명된 적이 없고, 더군다나 연구된 적도 드물다. 인간이 번개를 이용해 전력을 만들어내는 꿈의 기술에 푹 빠져 있으나, 정작 번개가 왜 치는지 원리를 알지 못하는 것에 비유해도 괜찮을까. 섬광처럼 지나가니 말이다. 그리하여 표현이란 대개 “타당성이나 유용성을 보장하지 않기” 때문에 설명될 수 없고, 타인에게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엄청난 열거를 이용한다고 하더라도 타인이 올곧이 이해할 수도 없다. 

  창조란 ‘새로운 이해’이다. 사람마다 서로 다른 매체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그것이 제각각 쪼개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은 창조란 이해에서 표현으로 이어지는 통합의 과정이다. <생각의 탄생>에는 13가지의 기법들이, 마치 자신의 아이를 어떻게 하면 창의적인 인재로 육성해 좋은 직업과 평판을 얻게 할 것인지를 계산한 부모들의 기호에 맞게끔 소개되어 있으나, 만약 그럴 목적으로 이 책을 읽었다면 그 부모들은 십중팔구 실망하고 말 것이다. 이 책에 비기(秘技)라는 것은 실려 있지 않다. 루트번스타인 부부는 교육자로써 통합과 전인의 인간을 양성해야 하는 이유로 13가지의 사고방식이 어떻게 표현되었는지를 열거했을 뿐이다. 창조하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해보지도 않았는데, 이 책을 읽으면 어떤 방법을 얻어 순식간에 자신이 창조적인 사람이 될 것이라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거의 아무 것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가령 이런 것이다. “생산적인 사고는 내적 상상과 외적 경험이 일치할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라는 구절이 그들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내적 상상을 해보지 않은 이들에게, 즉 “그건 상상일 뿐이야.”라며 현실에 몰두하는 이들에게 이 책에 소개된 상상의 거장들은 자신과 너무 동떨어진 사람들이라는 느낌을 주기까지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은 그저 ‘천재’라고 부른다. 

  나는 어렸을 때, 레고를 가지고 놀았다. 거의 광적으로 레고에 집착해서 레고의 ‘사람’들 22명을 모아 놓고 침대 위를 그라운드로 삼아 직접 축구경기를 해설하며 레고를 움직여 놀기도 했고, 역사책에서 본 내용을 재현하기 위해 성(城)을 만들거나, 영화 <쥬라기공원>을 흉내 내거나, 혹은 프랑스의 테제베 열차를 알았을 때에는 기차를 만들어 그것을 ‘마리호’라고 이름붙이기도 했는데, 그것이 모두 초등학생 때의 이야기이니 그것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아마 내가 얼마나 레고에 “미쳐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간혹 레고 광고를 보면 사고픈 마음이 들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레고는 놀이이기 이전에 창작이다. 다양한 재료를 가지고 건축을 하는데, 이 ‘건축’이 놀이가 되었다는 것이 레고의 성공비법이다. 레고는 또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든다는데 있어서 탁월한 학습효과를 준다. 

  요즘에도 레고가 아이들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끄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에는 레고를 서로 바꿔가면서 놀기도 했다.) 레고보다는 아마 컴퓨터 게임이 더 인기가 있지 않을까 싶다. 주워진 스토리대로 자신의 ‘아바타’를 움직이는 방식인 최근의 MMORPG들은 분명 교육적 효과를 일정 부분 지니고 있으나, 자신이 직접 창조한다는 느낌을 주기에는 역부족이다. 빠르게 진행되고, 즉각적이며, 또한 감각적이기 때문에 레고처럼 한참을 생각하고 조립하는 방식, 그리고 그렇게 오랜 시간을 공들여 만든 뒤에 뿌듯함(이런 느낌을 온라인 게임에서 소위 “만렙을 찍었다.”고 해서 얻게 되진 않는다. 온라인 게이머들의 경험담은 대체로 게임 내의 모든 미션과 레벨을 클리어해도 허무감이 먼저 든다는데 공통점을 보인다.)을 느끼는 정도에 있어서는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물론 레고보다 훨씬 다양한 종류로 계속 진화한다는 점에서 앞으로의 게임 산업이 교육의 일부를 대체할 수 있을 수준까지 나아간다는 전망에는 동의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아마 우리나라의 교육현실과 책의 내용을 끊임없이 비교할 것이다. 내가 초등학생(당시는 국민학생)이었을 때, ‘열린교육’과 미디어를 활용한 교육 등이 최초로 시도되어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이 이런저런 색다른 방식으로 가르치고자 했으나, 사실 그것도 몇 번에 불과했다. 그것이 시험으로 직결되는 일은 드물었고, 백년대계(百年大計)인 교육을 대하는 우리나라 정부와 나름의 교육철학을 지닌 교사들 사이에는 당연히 마찰이 있을 수밖에 없었으며, 강준만氏의 <입시전쟁 잔혹사>에서도 지적된 것처럼 과거와 비교해 별로 나아진 점은 찾을 수 없었다. 정치적 슬로건에 지나지 않았다는 평이 대부분이었다. 교육자 집안인 내가 늘 부모님께 듣는 바에 따르면, (차라리 그 편이 쉽겠으나) 교사 한 명이 바뀌어서는 뭔가를 할 수가 없다. 교육일수는 대단히 많은데, 학업성취도는 턱없이 낮은 ‘교육대국’인 우리나라의 교육정책을 다른 나라가 모방하려고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상상과 창조가 이 시대에 새삼 재조명되고 있지만 ‘교육’이라는 덩치 큰 배는 뱃머리를 돌리지 못하고 있다. 창의력을 키운다며 보낸 학원에서는 “이렇게 하면 시험을 잘 본다.”라며 결국 무늬만 차별화인 교육을 시키고, 정말 올바른 사고와 용기를 지닌 부모들은 “이 나라에서 어떻게 교육을 시키는가?”며 해외로 자녀들을 보내기 일쑤이다. 시대의 인재를 이 나라에서 키우는 것이 어렵다는 뜻이다. 이곳 일산의 학원가도 강남 못지않게 유명한데, 이따금 지나가다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아마 도움이 될 것이다. 조금이라도 “이건 아니다.”는 생각이 있는 부모들에게, 위에서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으나, 그들이 문제를 직시하도록 각성시킨다는 점에서 어떤 새로운 방책을 마련할 촉진제의 역할은 할 수 있을 것이다. 남들이 생각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보도록 하고, 어렸을 때 많이 놀면서 신체의 감각을 이용한 정보습득에도 힘을 기울이도록 하고,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현대미술처럼) ‘주목하는 것(이것이야말로 이 시대에 부족한 경청의 시작이기도 하다.)’에 익숙해지도록 하고, 영어 학원을 보낼 돈으로 음악이나 미술, 혹은 무용, 축구 등을 가르쳐보든가, 반성일기가 아닌 ‘생각 일기’를 써보도록 하고, 컴퓨터 게임할 시간을 줄이는 대신 동화를 읽거나 동시를 암송(이는 기억술과 창작술에 큰 도움을 준다.)하도록 할 수 있는, 채근하는 대신 재미있는 방법을 찾아보는 등 여러 행동을 부모들 스스로 창안해낼 수 있다. 

  과학과 예술이 공유하는 창조의 세계를 그들이 잘 알수록 그들의 아이들 역시 그렇게 될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런 까닭에 부모의 욕심이 많을수록 그들은 자신의 욕심을 충족시킬 수 있는 지식을 겸비해야 한다. 학벌이 좋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다 보내니까 학원 보낸다.”는 소시민적 삶에서 그들이 벗어날 수 있는 자각을 갖춰야 한다는 뜻이다. 막연하게 천재, 예술가, 과학자 등을 아이의 미래에 덧씌우고, 그것에 알맞다고 항간에 널리 추천되는 학원을 골라 보내는 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 창조적 삶이다. 이 책에 소개된 거장들 중 유년 시절, 그와 타인에게 공통적으로 부여된 학습과정을 뛰어나게 마친 이들은 거의 없다. 소위 말해 그들은 ‘엄친아’가 아니었다. 그들은 나름의 방법을 찾는 고된 과정을 통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상상과 창조 앞에서 과감하고, 그 결과 앞에서는 겸손해하는 놀라운 자세를 통해 남들이 넘볼 수 없는 세계를 만든 이들이었다. 

  하지만 이 책은 “모든 이들이 곧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행의 교육과정을 문제 삼는다. ‘상상력 풍부한 만능인(generalist)’이 루트번스타인 부부가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인간의 전형인데, 사실 그들이 제시한 여덟 가지 방법은 이상적인 제안일 뿐, 어떤 현실적 과정을 거쳐야하는지 이 책에는 실려 있지 않다. 따라서 나름 정성들여 모아놓은 카테고리를 다 접하고 나서도 사람들은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의문에 빠지게 될 것이다. 개인적 삶으로는, 만약 “나는 너무 바빠.”와 같은 엄살을 부리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실천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실천이 결과로 이어지기 힘든 사회에서는 자연스럽게 창조적 실천 자체가 적을 수밖에 없다. ‘동기화’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사람들 사이의 공감도 형성되어야 하나,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은 <생각의 탄생>이 제시한 이상과는 거리가 멀다. 아니, 극과 극이라고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니다. “전문가가 아니라, 전인이 되라.”고 말하는 것에 고개를 끄덕일 수는 있어도 실천하긴 어렵다. 최근 들어 대학가에는 전공 논문을 폐지하고 그 시간에 다른 인문교육과정을 수료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미국 아이비리그를 모방한 여러 철학교육과정과 ‘인문화 교육’인 우마니타스가 실시되고 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취업이다. 전공도 취업의 일로 일뿐이다. “기업이 전인을 필요로 한다.”고 해서 엄청난 양의 ‘전인’들을 취용할 것이라 공고를 내도 지금의 환경은 거의 변하지 않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모든 것은 점수로 환산되기 때문이다. 상상과 창조는 점수로 환산될 수 없다. 

  얼마 전, 창조와 기업운영의 전설인 스티브 잡스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가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는지 궁금해 했다. 그 결과 그가 평생 감춰두고자 했던 사생활의 일부가 드러나면서 비결이 공개되었는데, 사실 그것은 별로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Think Different.”가 전부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안철수氏가 이것을 직접 실천하면서 젊은이들 사이에서 가히 초시대적인 존경을 받고 있다. 그가 MBC의 한 예능프로그램에 나와 한 말은 이 시대에게 호소하는 바가 컸다. 의사로써의 전공은 컴퓨터 바이러스를 연구할 때에 거의 쓸모가 없었고, 컴퓨터 바이러스를 연구한 것은 기업을 운영할 때에는 거의 쓸모가 없었다며 그 스스로가 “저는 효율의 측면에서 보자면 대단히 비효율적인 사람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는 바꿔 말해 “도전은 효율로는 측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전은 남들이 대개 안 하는 것에 대한 무모한 동경이 아니라,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는 것, 즉 잡스의 명언을 실천하는 것이다. 생소한 것을 동경하는 것은 무척 쉬운 일이다. 현대미술을 대할 때,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하듯이. 하지만 생소한 것을 만드는 일은 다르다. 지식과 감정의 조화, 그 이해할 수 없는 어떤 메커니즘이 활발하게 작동하는 이들이 만드는 세계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실제로 변화시킨다. 우리는 그것을 ‘아이디어’라고 부르며 동경하지만 그것도 적절한 표현은 아니다. 

  나는 여가가 쉽게 허용되지 않는 이 사회의 경직성에 대해 많은 우려를 가지고 있다. 여가는 놀이를 포함한다. 그것은 보장되어야 하는 영역이다. 하지만 얼마나 여가의 시간이 부족하고, 혹은 시간이 있더라도 그것을 또 다시 일이나 배움으로 연결해야 하는 부담이 많은지, 이 사회에서는 여가를 잘 보는 것도 이슈가 되곤 한다. <생각의 탄생>에 나온 13가지 방법 중 나는 ‘놀이’야말로, 물론 선행지식을 열정적으로 탐구해 갖추는 진정성을 겸해야겠으나, 나머지 12가지, 혹은 그 외에도 더 많을 창조의 작업을 이룩할 수 있는 궁극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놀이는 공부와는 다르다. 느낌, 정서, 직관, 쾌락 등 루트번스타인 부부가 말한 ‘내면’의 무언가가 다채로운 방식으로 표현되고, 그 와중에 생각지도 못한 어떤 기발한 방법들이 등장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강력한 문화력을 갖춘 나라의 사람들은 뿌리 깊은 놀이문화를 지니고 있다. 놀이문화가 얄팍한 나라의 사람들은 그것을 사행성 놀이로 즐긴다. 

  “노는 것을 허하라.” 어디서 본 문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이것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이 사회를 나이트클럽처럼 생각하라는 것이 아니다. 나는 우리나라의 적잖은 교장들이 나머지 수업일수를 채우기 위해 학생들은 조용히 자율학습 시키는 것에는 찬성하면서 왜 그 시간에 다양한 놀이나 다큐멘터리 시청을 하는 자율‘활동’에는 반대하는지 모르겠다. 그들은 학교의 ‘장(長)’이기 이전에 우리나라 교육의 미래를 제시하고, 학생들에게 최선의 방법으로써 양질의 교육을 제공해야 하는 의무를 지닌 사람들이다. “학교에서 멀리 나가면 꼭 문제가 발생한다.”와 같은 정치적 문제(지역사회와의 불화, 학교의 위신 추락, 문제아들의 비행, 교장 개인의 처벌 등)로 학생들의 야외활동도 거의 금지하는 것이 현실이며, 그들은 자신이 학교에 있는 한 어떤 ‘트러블’도 생기지 않았으면 하고 과잉보호하기 일쑤이다. 창조적 미래인간에 대해 역설하는 그들에게 진정성 있는 의지가 있는지의 여부도 의심스럽다. 

  창의적 교육을 위해 교육계에서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회의론은 이 사회에 지배적으로 깔려 있다. 이미 이상적 대안은 충분히 제시되어 왔다. 이 책은 독자들에게 앞으로의 교육변혁을 기대하도록 만듦과 동시에 이 시대의 교육자들이 자신의 교육철학으로 삼아야 하는 정석을 담고 있다. 이 책의 내용들이 활자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전에 옮겨질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이 있기를 일선의 교육자들에게 당부하게 된다. 획일적 교육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자주 타인(외국)의 삶과 비교하며 좌절하도록 했고, 유익하며 재미있는 삶을 앗아갔는지를 통탄한 것은 작금의 일이 아니다. 나는 이 책을 많은 이들이 읽되, 그것을 개인의 삶에 적용하려고만 생각하지 말고, 더 넓은 시각을 통해 사회를 비판할 시선으로 이어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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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1-12-01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것만 보이네요. 탕기님은 그릴 줄 모르는(제 기준에서) 실력은 절대 아니었다는. 그러고보면 상관이 없기도 해요. 문학평론가들은 문학을 쓸 줄 알아서 비평하는 게 아니잖아요. 간혹 그런 분들도 있지만. 날카로운 글과 보도 글과 문학의 글과 일상의 글은 다르고 또 달라야 하니까요. 이 책은 많은 곳에서 추천도서던데요. 어쩐지 도망가야 할 것 같아요. 히히.

탕기 2011-12-02 00:51   좋아요 0 | URL
그림 못 그리지 않았나요?^^ㅎ 음. 문학을 할 줄 알아서 비평하는 것이 아님은 맞지만 문학을 할 줄 모르는데도 비평의 글을 쓰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아요. 적어도 기본 원리는 알아야겠죠. 그냥 읽고 쓰는 것이 쉬워서 창작의 고통을 체험해보지도 않은 사람이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다."고 쓰는 글과 그렇지 않은 진중한 글은 무게부터가 이미 다르잖아요? 그런 까닭에 저도 그림 못 그리는 것이 나의 공부에 큰 방해가 되곤 했다는 술회를 한 것이구요. 비평의 글을 쓰면서 예술의 속을 건드려야 할 때마다 항상 그 핸디캡이 신경 쓰이곤 했습니다. 저도 어딘가로 도망가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