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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왜 무엇이든 믿고 싶어할까?
마르틴 우르반 지음, 김현정 옮김 / 도솔 / 2008년 3월
평점 :
2011.12.07
“Scientia est potentia.”
러셀은 이 말이 베이컨이 아닌 이전 시대의 사람이 한 말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으나, 그 역시도 베이컨이야말로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격언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인물이라고 했다. 그러나 새로운 의미가 시대를 완전히 바꿔놓진 못했다. 어떤 면에서 그는 도덕적으로 변변치 못한 인물이었고, 다른 어떤 면에서는 과학을 제대로 알지도 못했기 때문에 그를 낮게 평가하는 이들도 있으나, 대체적인 시대의 평은 그를 ‘새로운 귀납법’과 고전경험론의 아버지 즈음으로 정의한다. 뉴턴이나 갈릴레이가 그랬듯이, 아마 저 격언은 반(反)신학적이고, 파격적인 발언이었겠으나, 베이컨도 종교적 믿음에서 자유롭진 못했다. 그가 철학을 신학과 자연철학으로 나눴으나 신학을 부인한 정도가 오늘날 도킨스 정도까지 되진 못했던 것이다.
세속에 침투된 용량으로만 따지자면 종교는 점점 실패하고 있는 듯하다. 얼마 전에는 지구와 환경이 매우 흡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제 2의 지구(케플러 22-b 행성. 평균 온도 섭씨 22도에 크기는 지구의 약 2배 정도)’를 찾아냈다는 과학기사가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적이 있다. 그러자 일부 편향적인 무신론자들이 신랄한 코멘트를 달았는데, 대부분이 기독교와 관련된 것으로, 가톨릭에 대한 공격은 그 정도가 상대적으로 덜했지만 개신교는 그 정도가 대단히 노골적이었다. 그 중에는 몇몇 자유주의자 성향의 개신교도들이 변론을 달아놓은 것이 있었지만 수적으로 상대가 되질 못했다. 이 ‘가상의 종교피해자(‘종교혐오자’보단 나은 것 같아 임의로 이렇게 불러본다.)’들은 “제 2의 지구에서 생명체가 발견되면 기독교의 교리가 틀린 것이라는 과학계의 주장이 사실로써 입증되는 것 아닌가?”라며 흥분했다. 그들이 종교로부터 어떤 피해를 구체적으로 받았고, 각 피해들의 정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혹은 반대로 그들이 그저 근래에 들어 공격당하기 쉬운 처지에 놓인 종교를 비난하는 반(反)종교주의자들의 논리에 무임승차한 것은 아닌지, 한편으로는 과학을 지나치게 맹신하는 것은 아닌지, 나로서는 정확히 알 길이 없다. (‘Kepler-22b’ 기사 링크 : http://www.nasa.gov/home/hqnews/2011/dec/HQ_11-408_Kepler_Habitable_Planet.html)
개인적으로 나는 (태생이 가톨릭 신자였으나, 이 점에 있어서 스스로 매우 다행이라 여기는데) 심각한 과학주의자도 아니고, 굳건한 신앙인도 아니다. 칼 세이건과 도킨스의 논리적 설명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그 옆에 꽂혀 있는 마더 테레사의 ‘사랑’과 관련된 책을 읽으면 가슴이 훈훈하게 덥혀진다. 과학적 가치와 종교적 가치가 서로 방향을 달리하는 것은 자명하다. 둘은 모두 믿음이다. 이성 역시 믿음을 추동력으로 갖는다. 지적 호기심을 믿지 못하면 알고자 할 수도 없다. 이는 모르는 것을 알고자 하는 것과 모르는 것을 믿고자 하는 것의 차이이다. 물론 둘의 차이는 현격하다. 그리고 과학의 발견과 논리는 점점 인류의 대체적인 이해를 그들의 품으로 끌어들이는 듯하다. 그렇다면 위의 사람들처럼 ‘제 2의 지구’, 아니 케플러 22-b 행성에서 지적 생명체의 흔적(전파통신 같은 것들로도 충분히 확인이 가능하다.)을 찾을 수 있다면, 그리하여 신의 증거가 없어지거나, 혹은 “신은 지구에만 있는가?”와 같은 질문에 종교가 답할 수 없어진다고 해서 종교가 몰락의 시나리오를 밟는다고 예측할 수 있을까? 과학이 종교의 자리를 대체하게 될까? 많은 지식인들이 그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그들은 ‘잘못된 믿음’이라는 영역이 그들의 주장처럼 종교에만 국한되어 자주 설명될 수 있다고 보는 듯하다. 이는 ‘지식의 오류’이다. 일상은 그보다 훨씬 큰 종교이다. 인간 자체가 종교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 나는 몇 해 전에 마르틴 우르반의 <사람들은 왜 무엇이든 믿고 싶어 할까?(독일어 원제 : Warum der Mensch glaubt. Von der Suche nach dem Sinn)>를 꺼내 든 적이 있다. 저자는 신학자 집안 출신의 과학전문가이다. (나는 흔히 상반되는 이력이라 회자되는 ‘독특한’ 발자취를 지닌 이들을 좋아하는 듯하다. 그들은 우리에게 필요한 지적 저울, 혹은 가치 저울, 그런 중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부류의 양심적 지식인들이다.)
루이스 월퍼트의 <믿음의 엔진>에서 논의되었던 것의 상당부분이 이 책에도 실려 있다. 전개 방식도 별로 다르지 않다. 루이스와 마르틴 모두 “종교는 인간의 진화적 산물이다.”라는 현대적 견해에 일치를 보인다. 그러나 마르틴은 잠시 생각할 시간을 준다. 선택하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늘 새로운 것을 배우며 변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믿음은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을 안겨준다 .하지만 공포를 안겨주는 믿음은 문제가 된다. 우리가 그토록 편안해하던 믿음의 비밀을 마르틴은 여러 항목을 통해 샅샅이 밝혀낸다. 종교의 장막만 들춰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거의 모든 ‘믿음’이 나체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다시금 마르틴의 선택으로 돌아가게 된다. 믿음에 대한 메커니즘을 알게 되는 순간이야말로 인간이 다시 태어나는 때가 아닐까.
종교를 믿던 믿지 않던, 오늘날 사람들은 종교에 대해 너도나도 할 말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종교가 어떤 방식으로 믿음의 공식을 이용해 왔는지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모르고 있다. 신을 믿는 것은 요컨대 우리가 우연을 믿는 것과 같다. 어떤 놀라운 일을 겪고, “이건 정말 우연이다.”라며 혀를 내두르는 사람들은 그 일과 유사한 정도의 충격을 또 다른 일이 일으킨다면 그것이야말로 우연의 연속이며, 어쩌면 운명일지도 모른다고 믿는다. 기적도 이와 같은 방식이다. 모세가 홍해의 바다를 갈랐다. 현대의 일부 양심적 신학자들은 그에 대한 전통적인 종교 해석을 대신해서 “당시 그곳은 별로 깊지 않았으며, 썰물 때에 마침 모세와 그의 무리들이 그곳에 당도한 것이었다.”고 말하기도 하나(예컨대 바닷길 같은 것), 약간의 상상을 보태어 이번에는 우리가 모세와 그의 무리가 되어보자.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원래 바다였던 곳에 물이 없더라.”는 ‘이상한 일’을 겪는다면 그것을 간곡한 기도의 산물이라 믿을 법도 하다. 갑자기 하늘에서 신의 양식 만나가 떨어졌다는 대목도 마찬가지이다. 누군가가 인근 마을에 몰래 가서 적잖은 음식을 얻어 왔고, 그것을 거의 굶어 죽어가던 처지의 사람들이 받아들었을 때 느끼는 안도감. 비가 내리길 간절히 기도했는데 정말로 자연의 섭리에 따라 비가 내릴 수도 있다. 그것이 종교적 믿음으로 확장된 텍스트로 적혔을 때, 모든 것은 신의 기적이라는 교리가 된다. 우리가 그것을 불편해 하는 까닭은 그 종교의 부정적인 역사, 혹은 (구약만 보자면) 유대인 중심의 선민사상 등일 뿐이다. 정도가 다를 뿐이지, 우리도 여러 초등학교의 단군상 머리를 잘라 버린 일부 과격 종교단체들의 행동에 분노한다. 그들의 행동에 “분노한다.”는 것은 우리가 적게나마 ‘단군의 후손’임(아니면 민족단일주의에 기초한 여러 맹목적 사고들)을 믿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식의 중도적 반론은 대부분 이해되기 힘들 것이다.
위의 “설명될 수 없는 상황”들 앞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을 것인지 조금만 상상해본다면 우리는 지식이 믿음에 반대되는, 혹은 맹목적인 믿음을 봉쇄하는 역할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게” 된다. 그러나 어쩌면, 지식은 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도 같다. 연금술은 지식이었다.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화학이 되었는지는 간단히 검색만 해보면 알 수 있기 때문에 구구절절 설명하진 않겠다. 지식이 신비주의와 맞닿았을 때에 사람들은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든 매력을 느끼게 된다. 지식에 근거한 운세는 어떠한가? 이따금 솔깃한 김에 스포츠 신문을 펼쳐놓고 오늘의 운세를 확인한 다음, 만약 그 날의 운세에 “주변을 조심하고”라는 문구가 들어 있었다면 우리의 행동은 무의식적으로 정말 조심스러워진다. 아니, 그것을 바쁜 나머지 잊는다고 하더라도 운세를 읽었을 때에 우리는 두 가지 반응을 대체로 보일 것이다. “거짓말이야.”, 혹은 “조심해야겠군.” 둘 다 지식에 대처하는 믿음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반론할 수도 있다. “당신이 말한 지식이란 무엇인가?” 고대 샤머니즘과 토테미즘도 지식이었다. 나는 그것과 관련된 전공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문학에 내재된 토테미즘의 흔적을 추적하면서 인간의 “고대(古代)인식”이 지금의 문학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한 강의였다. 결론은 우리에게 토테미즘의 DNA가 남아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우리가 고대인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현격하게 다르다. 문제는 ‘연결’이다.) 또한 우리와 고대인 사이에 마치 우생학적인 관계가 놓여 있다는 것도 아니다. 자연에 위험하게 노출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가지고 있었을 놀라운 감각적 지식은 지금의 우리에게 거의 없고, 반면 우리의 과학적 지식은 그들에게도 역시 거의 없었다. 결국 두 세계에서 ‘지식’이라는 것은 각각 다른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의 지식이 우리에게도 있다면, 우리는 구태의연하게 ‘지식’이라는 단어를 현대적 과학의 합리적이고 근거에 입각한 지식에만 국한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구석기 시대의 사람들은 토템을 가졌다. 자신과 영혼이 닿아 있다는 동물. 오늘날 사람들은 반려동물에게 무한한 사랑을 주고, 물가가 치솟는 와중에도 정성껏 사료를 먹이고 병원에 데리고 간다. 문제는 믿음이다. 지식도 믿음의 도구이다. 같은 논리로 신 역시 믿음의 도구이다.
나는 예수가 (종교인들이 믿는 신앙으로써가 아니라) 매우 탁월한 인물이었다는 평가에 전적으로 동의하는데, 이유는 하나이다. 그가 믿음의 메커니즘과 기능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정말 기적을 행했는지, 신의 아들인지는 내게 거의 중요치 않다. 다만 당시의 중동 세계를 고려해보건대, 삶의 비관만이 가득했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가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사고를 불어넣어줬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를 종교와 닿아놓고 생각했을 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슨 창조적 사고인가?”라며 의아해할 것이다.
하지만 예를 들어보자. (이는 이 책의 159페이지에 소개되어 있는 요한복음서 5장의 내용이다.) 절름발이에게 예수가 다가가 “낫기를 원하느냐?”고 묻는다. 절름발이는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자 예수가 말했다. “일어나 요를 걷어들고 걸어가거라.” 절름발이는 걸어갔다. 물론 절름발이가 순식간에 벌떡 일어나서 걸어가진 못했을 것이다. 선천적인 절름발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의사들은 이 구절에 주목한다. 환자에게 “스스로 자신의 병을 인식하고, 창조적으로 대응할 것”을 강조하는 대목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 대목에서 교조주의의 깊은 뿌리를 볼 수 있는 까닭은 전적으로 ‘그리스도교’라는 일부 종교에게 있을 뿐이다. 그것을 떼어놓고 ‘예수와 절름발이’로만 생각해본다면 예수는 절름발이에게 비관에서 긍정으로, (병에게의) 복종에서 (환자 스스로의) 창조로 이동할 것을 권유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장에는 힘들었을 것이고, 아마 영영 걷지 못했을 수도 있으나, 저 절름발이는 벼락을 맞은 듯 깨우친 후에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생각과 생활을 했을 것이다. 예수의 추종자들은 이런 식으로 늘어갔다. 이를 플라시보 효과와 비교해보자. 아니면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칭찬은 고래도 움직인다.”와 같은 현대적 성찰의 문구와 비교해보자. 이들의 메커니즘은 거의 다르지 않다. 종교가 세속을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 그리고 세속이 종교를 서서히 밀어 올리기 시작할 수 있었던 이유가 모두 여기에 있다.
독자들이 특별히 주목해서 읽어야 할 챕터는 여덟 번째, “왜 불신보다 믿음이 더 위험할까?”라는 대목인데, 여기서 마르틴은 종교의 문제를 정리한다. 종교적 권력, 여성학대, 근본주의 등이 주로 언급되고, 우리는 이미 이에 익숙하다. 오늘날에도 크게 다르지 않은 문제들이 곳곳에서 종교의 이름으로 일어나고 있다. 페미니스트들은 종교의 여성학대, 특히 마녀사냥에 대해 격렬히 반대하는데, 남성우월적인 역사를 전복시키기 위해서는 종교(물론 모든 종교가 그렇진 않고, 종교마다 ‘가부장적인 정도’의 차이는 있다. 예컨대 로만 가톨릭보다 러시아 정교회가 여성의 종교참여 문제에 있어서는 훨씬 가부장적이다.)부터 전복시켜야 한다고 믿는 이들도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신에 대한 두 가지 생각을 분리해보자. 먼저 하나는 진화론에 반대되는 창조론이다. 다른 하나는 신에게 씌워진 권력이다. 과학이 창조론을 이길 수는 있다. 나는 이 대목에서 ‘승패’의 개념을 썼는데, 이유는 두 이론이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양립할 수 있는 것처럼 설립논증이 가설로써 등장했지만 도킨스와 세이건 등 과학자들의 책을 읽으면 그것이 왜 잘못된 논증인지는 금방 알게 된다. 문제는 후자, 즉 권력의 문제이다. 과학이 신에게 씌워진 권력을 이길 수 있을까? 개인적인 사료인데, 아마 이 대목에서 마르틴이 “왜 불신보다 믿음이 더 위험할까?”를, 독자들에게 한 번 생각해보도록 권유하고자 마음먹었을 것이다. 여기서의 ‘믿음’이란 물론 “신에게 씌워진 권력”에 기초한 것으로 그 어떠한 것도 “왜?”를 묻지 않는 맹목으로 이끌 수 있는 사고이다.
더욱 큰 문제는 근본주의에 있다. 아니, 나는 이를 “세속적 근본주의”라 풀어 써야겠다. 기독교, 이슬람, 힌두교, 유대교 등의 폭력적 근본주의자는 엄밀히 말해 종교인이 아니다. 그들이 종교를 왜곡하고 오해하는 것에 비유해보건대, 그들보다는 차라리 종교를 믿지 않으면서도 폭력을 지양하는 이들이 훨씬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들이라는 것은 반복해서 강조해야 할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를 종교가 아닌 다른 영역에서, 가령 민족의 영역에서 생각해본다면 우리는 씁쓸함을 느끼게 된다. 우파적 근본주의가 득세하면서 지금 유럽에서는 심각한 민족주의가 대두되고 있다. 모든 문제는 “살기 힘들어졌기 때문”에 일어났다. 외국인들이 취직하자 자신들의 일거리가 없다며 분노하는 일부 독일의 청년들은 미국의 반유대주의와 다르지 않고, 프랑스의 상황과도 거의 다르지 않다. 팔은 대개 안으로 굽는다고 하던가. 우리나라 사람들도 심각한 취업난을 겪으며 최근 들어서는 외국인 노동자, 불법체류자 등의 인권에는 거의 관심을 갖지 않는다. 다문화세계, 다원주의, 지구촌 문화 등은 슬로건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그런 우리가 종교의 심각한 기울기를 정확히 따지고자 함은 온당치 못한 듯하다. 한편으로는 “나는 아무 것도 믿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정말 가치 있고 올바른 것을 추구하도록 하는 ‘믿음의 엔진’ 중 하나를 스스로 꺼버리는 일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세계는 여전히 혼돈으로 가득 차 있다. 사실 ‘세계’라고까지 넓혀 생각해볼 필요도 없다. 나 자신은 불확실성과 매순간 싸운다. ‘나’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도 없다. 그러나 ‘나’ 있는 세상은 어떠한가? 조금 더 넓혀 생각해 ‘너’는 누구인가? ‘나’와 ‘너’를 가르는 비물질적 조건들을 생각하다보면 문득 연대감으로부터 시작된 사고의 다발들이 우주까지 폭넓게 전개되는데, 놀랍게도 우리는 그 생각의 연쇄가 서로 이어지지 않고 듬성듬성 전개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간은 전적으로 무지(無知)한 존재, 다른 말로는 “알아가는” 존재이다. 무지를 극복하는 방법은 많다. 그러나 무지로부터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는 듯하다.
우리는 과거의 앎과 믿음이 모두 잘못된 것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충분한 근거로써 확보한 시대의 사람들이다. 물론 우리의 후손들도 이 시대의 앎과 믿음을 두고 잘잘못을 따지겠으나, 메커니즘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안다.”는 합리적 성찰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기 때문이다. 이 계단에 발을 디딘 이상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명하다. 앎과 믿음을 합리적으로 조화시키는 것이다. 추상적인 방법이라 여기는 회의론자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 조화가 어디 즈음에 위치해 있는지 알고 있다. 자연에 대한 경탄, 존재에 대한 의심, (자연에게서 이끌어낸 교훈인) 확실성의 부정, 그리고 불확실성의 극복.
‘예수’라는 이가 이미 그 길을 우리에게 제시했다. 자기극복의 창조적 사고. 불완전한 존재임을 자각하고, 스스로의 길을 찾는 방법. 그는 분명 종교가 되었고, 신이 되었고, 혹은 우상(idol)이 되었으나, 그를 추종하는 이들의 맹목이 어찌되었든 간에 본질은 이것이다. 매일 치고 박고 싸우는 두 앙숙에게 다가가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친 것은 간디에게 이르러 ‘비폭력 평화운동’이라는 이상적인 실천대안으로써 활용되었고, 그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가 되는 길”이며, 古이태석 신부와 마더 테레사, 슈바이처에 이르러서는 눈물겨운 희생적 삶으로 우리의 귀감이 되었다. 힌두교의 한 텍스트에 적혀 있는 것처럼 진리는 하나인데, 그것을 말하는, 혹은 실천하는 수많은 현자들이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진리'가 뭔지 대체적으로 알고 있는 듯하다. 편협한 유대교의 사고방식을 보다 넓혀 결국 죄목을 얻은 까닭에 예수는 파란만장한 젊은 시절을 마무리했고, 종교가 그의 뜻을 온전히 실행에 옮기지 못했으니, 그의 본질이 오늘날 더욱 까마득히 보이는 것은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다.
예수의 말에서 과학을 발견하기 힘들고, 과학에서 예수의 말을 발견하기도 힘드나, (나는 위에서부터 계속 예수에 대해서만 언급했으나, 그건 이 책과 나의 종교와 대체적인 이해 때문이고, 사실 예수의 말이 되었든 다른 성인(成人), 혹은 현자들의 말이 되었든 간에) 우리는 둘 모두를 이해할 수 있는 최적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장점이 있다. 문제는 역시 마르틴이 서문에서 언급했던 ‘선택’이다. 하지만 그 선택에는 어떤 일관된 이상적 방법이 있다. 마르틴이 말하는 것은 둘 모두의 겸비이다.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으며 서로를 견제하고, 끊임없이 의심하되, 비관에 빠지지 않는 것이야말로 오래된 중용의 덕이 아니겠는가 싶다. 이 덕을 취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희망이라고 없을까. 잘못된 것을 알고, 우리를 되돌아보며, 한계를 인지하는 것이야말로 언제나 최선의 해결책을 내놓는 방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