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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그리 플래닛 - 세계는 지금 무엇을 먹는가
피터 멘젤 외 지음, 홍은택 외 옮김 / 윌북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2011.12.03
다이어트를 하는 나라와 유니세프의 식량조달을 받아 살아가야 하는 나라. 세계의 정부들은 “굶주린 인구를 먹여 살려야 하는” 동시에 “너무 많이 먹고 있는 인구의 건강을 챙겨”야 한다. 되도록 관찰자의 입장에서 각국의 ‘가족 식단’을 취재하고, 그것을 열거한 책인 <헝그리 플래닛>은 제목 그대로 아이러니한 오늘날을 거의 여과 없이 보여준다. 우리나라 부모들은 아이가 음식투정을 부릴 때 아마 대부분이 소말리아 아이들의 굶주림에 빗대어 “못 먹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데!”라고 타이를 것이다. 그러나 이 빗댐은 온당치 못하다. 밥을 남기지 않고 깨끗이 먹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우리가 누리고 있는 풍요와 사치에 저들의 상황으로 굳이 대입시켜보는 것은 우리의 무관심을 두둔하려는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은 연간 2억 톤에 육박하는 음식물 쓰레기를 내보낸다. 우리나라의 인구가 그들의 30%에 못 미치니 그 정도 수준은 되지 않겠지만 이곳의 사정도 만만치는 않을 것이다. 반면, 차드는 영양결핍자가 인구 전체의 34%, 위생적인 물을 공급받는 인구는 전체의 27%이며, 말리는 하루 2달러도 안 되는 돈으로 연명하는 이가 전체 인구의 91%나 된다.
어폐가 있겠으나 비유해보건대, 우리가 반려견과 도축된 돼지에게서 느끼는 각각의 감정이 다른 것, 즉 가까이에 있는 것에 더 많은 애착과 관심을 보내는 것이, 우리가 소말리아, 말리, 차드 등 최빈국의 사람들에게 보내는 무관심을 설명해줄 수 있다. 이 책 역시 그러하다. 여러 사례들을 조명하지만 직접 개입하는 감정은 드물고, 이따금 실어 놓은 에세이들에서 문제제기의 방향을 빌린다. 지나친 긴장이 없고, 무엇보다도 사진(덴마크의 부엌 사진은 흡사 페르메이르의 작품 구도를 떠올리게 만들기까지 한다!)이 풍부하기 때문에 문화를 이해한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마치 주전부리 같은 독서를 할 수 있는 책이다. ‘식량조달’이라는 문제의식을 갖고 비교하려는 사람에게는 차드, 말리 등 아프리카 내륙 국가와 미국, 호주 등이 극단적인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겠지만 ‘장수’에 관심이 있는 이에게는 일본의 사례가 인상적일 것이다. 각지를 여행 다닌 이들에게는 향수를 불러일으킬 책이기도 하다.
<헝그리 플래닛>을 읽으면서 나는 습관적으로 괄호를 치기도 하고, 노트에 옮겨 적기도 했다. 소위 쉽게 말해 “들입다 팠지만” 적어 놓은 것들을 쭉 복기해보니 이 책의 요점이 각 사례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객관적 사례들의 열거를 읽은 독자들에게 “알아서 판단하시오.”라고 권유하는 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령 이런 것이다.
맥카스(맥도날드의 호주식 속어)를 먹고 TV 앞에 누워 뒹굴뒹굴 거리는 호주의 아이들, 콜라를 마시는 부탄의 승려, 격렬했던 내전 후 1주일 치 식량을 구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는 보스니아 사람들, 얼마 되지 않는 염소고기도 라마단 기간이 아니라면 공동도축하지 못하는 차드 난민촌 사람들, 30년 전의 굶주림과 비교하며 풍요로움에 대한 감사를 느낀다는 중국의 한 할아버지, 하지만 그것을 모르는 1인 1자녀의 수혜자 샤오황띠(작은 황제(小皇帝)라는 뜻)들, 대략 10km를 왕복해야 장터의 물건을 살 수 있는 에콰도르의 산간지방 사람들, 유기농 바이오 제품들이 비싸지만 몸에 좋으니 안 살 수도 없는 독일 사람들(하지만 알다시피 이 바이오 제품이 독일에서 올해 초 엄청난 문제를 야기했었다.), 식량배급이 원활해 굶는 이들이 거의 없지만 생산성에 문제가 있다고 여기는 쿠바 사람들, 바다표범, 사향소, 연어 등을 사냥해서 돈을 벌거나 육류를 섭취하는 그린란드 사람들, 육류를 거의 먹지 않는 인도의 브라만 계급, 하라 하치 부(腹入分, はらはちぶ : 음식의 8할만 먹는다는 오키나와의 건강 속담)를 실천해 10만 명 당 100세 이상 장수 인구가 무려 33.6명이나 되는 오키나와의 사람들, 1주일 동안 콜라를 자그마치 20리터가 넘게 마시는 멕시코의 한 가족, 온갖 사회적 문제들을 가족과의 식사로 버텨가는, 알뜰살뜰한 필리핀의 슬럼지역 사람들, 스시에 푹 빠져 있는 한 폴란드 가족, 1년에 네댓 번 여윳돈이 생기면 그걸 아이들을 위해 맥도날드에 투자하는 터키의 가족, 나름 저지방 식단으로 건강을 찾으려고 하지만 정작 움직이지 않는 미국의 한 가족, 과잉식단을 경고하는 다큐멘터리 <슈퍼사이즈 미>를 보고 운동과 채식을 병행하려는 미국의 한 흑인 가족, 별반 사정이 다르지 않은 미국 텍사스의 한 라틴계 가족 등등.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식단은 어떠할까?
풍부한 열거가 비교적 객관성 있게 진행되고 있으나, 이 책의 사이사이에는 에세이와 사변이 삽입되어 있어 독자들이 그 문제를 생각해보도록 권한다.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잡식동물의 딜레마>를 쓴 마이클 폴란의 에세이 <An Animal's Place>이다. 뉴욕타임스 매거진에 2002년 11월 게재된 것인데 책의 역자가 번역한 대목을 그대로 옮겨본다. 괄호 안의 영문은 뉴욕타임스 웹사이트에 올라온 것 중 이 대목에 해당하는 원본의 문단을 발췌한 것이다.
“미국의 사육 공장은 자본주의가 도덕적, 사회적 규제가 없는 곳에서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악몽 같은 모습으로 다른 어떤 집단들보다 더 리얼하게 보여주는 곳이다. 이곳에서 삶은 재정의된다. 단백질 생산의 수단이 되는 것이다. 고통이라는 존경할 만한 단어는 ‘스트레스’로 바뀐다. 이것은 비용 대비 효과를 감안한 경제적인 문제일 뿐이다. 그래도 ‘꼬리 자르기’ 같은 해결책이 등장한다(원문 : More than any other institution, the American industrial animal farm offers a nightmarish glimpse of what capitalism can look like in the absence of moral or regulatory constraint. Here in these places life itself is redefined -- as protein production -- and with it suffering. That venerable word becomes ''stress,'' an economic problem in search of a cost-effective solution, like tail-docking or beak-clipping or, in the industry's latest plan, by simply engineering the ''stress gene'' out of pigs and chickens.).”
우리가 지녀야 하는 식문화 윤리 중 하나로 동물과의 관계가 언급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으며, 이와 관련된 도덕관념은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도 않은 상태이다. 산업화된 도축의 모습은 위와 같다. 이를 여러 국내 다큐멘터리로 많은 사람들이 접했을 것이다. 하지만 전통사회는 모습이 다르다. “죽이는 것”은 같으나, 메커니즘 자체가 상이한데, 얼마 전 방영된 다큐멘터리 <아무르> 1편을 보면 한 무리의 사냥꾼들이 설원에서 멧돼지를 사냥한 뒤 머리를 잘라 귀를 세워주고 예를 다하는 장면이 있다. 영화 <아바타>에서 여주인공이 동물을 죽인 후 화살을 뽑으며 연대감 있는 대사를 외는 장면과 유사하다. 우리는 이것을 형식적인 절차로만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을 ‘도덕적 형식’이라 간주(실은 이 의식 자체가 전통적인 진심에서 비롯된 것이나)한다고 해도 산업적 도축과는 차원이 같을 수가 없다.
세계의 음식문화는 대체적으로 과다육류소비로 흐르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반가운 사실도 있다. 상대적으로 적은 음식에도 만족하고, 그보다 조금 더 많은 음식을 먹을 때에는 못 먹었던 시절의 아픔을 보상하려는 욕심과 대비되는, 즉 “양이 적더라도 만족하는 습관”도 함께 발현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오키나와의 ‘하라 하치 부’ 전통에서 우리가 배울 점이 있을 것이다. 건강을 챙기기 위해 적게 먹고 많이 움직이며, 먹더라도 식단을 저칼로리로 교정하고, 되도록 패스트푸드를 섭취하지 않는 단순한 생활이야말로 국제 식량소통의 획일화를 완화시킬 수 있는 현실적인 방안일 것이다. 나는 한 과학강의 시간에 “미국인이 햄버거를 먹지 않으면 10억 명의 기아인구가 하루 세 끼를 챙겨먹을 수 있다.”는 놀라운 비유를 들은 적이 있다. 과장된 바가 없진 않겠으나 결코 과장이 아닌 것이, 앞서 언급했듯이 미국이 연간 배출하는 음식물쓰레기의 양이 2억 톤에 육박하기 때문이다. 소박한 식단은 우리의 식비 지출을 줄인다. 한편으로는 패스트푸트에 대한 코비 커머의 에세이에서처럼 대형업체들의 윤리도 한 몫을 해야 한다. 사실 그들의 행동이 우리의 실천을 좌우할 수 있다. “바다에게 진 부채를 우리가 어떻게 갚을 수 있을까?”에 대해 우려하는 칼 사피나의 에세이도 많은 것을 말해준다.
책을 덮고 나서, 물론 독서 중에도 그랬지만, 계속 아쉬웠던 것이 하나 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하더니. 이 책에는 우리나라의 음식이 등장하지 않는다. 중국, 터키, 필리핀 등 가히 음식의 대국이라 불리는 곳 못지않은 방대한 식문화와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닌 음식조리가 있으니, 나 역시 그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탓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었는지, 저자는 한국어판을 펴내는 서문에 “여러분은 영양가 높고 지방이 낮은 전통 식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고도로 가공 정데된 식품의 특징인 ‘공허한 칼로리’도 적은 식단이지요. 전통 한식을 고수해올 수 있어서 여러분은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거기까지이다. “하지만 당신들은 오래도록 잘 지켜왔던 좋은 점들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한식을 뒤로 한 채 온갖 패스트푸드들을 사 먹는, 그리고 그것에 매우 흡족해하는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된다. 배고프면 일단 라면이라도 먹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비근한 삶이다. 한 라면 회사가 소위 “대박 난” 상품 하나로 국가고객만족도 1위를 차지한 것이 얼마 전 화제가 되었다. 그것을 사 먹은 사람들은 “맞아. 우리가 일조했지. 그 라면 참 맛있더라.”하며 좋아했다. 이러한 즐거움에는 큰 덫이 숨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