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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2016년 1월 25일
지난 닷새의 밤은 다섯 페이퍼에 옮겨놓았다. 내 생각의 대부분은 그곳에 있다. 순간을 남기고 싶어 끊어 읽었다. 순간이라는 것이 실은 책을 덮고 이렇게 쓰는 사이 증발해버리고 만다는 것쯤은, 나도 안다. 하지만 서둘러 적었다. 홀려서 글을 쓴 건 참 오랜만이다. 그래서 지난 닷새의 글은 물기가 약간 있다.
하루 5~60여 페이지 정도였으니 짧긴 했지만 두세 번 읽고 생각하고 참조할 것들을 들춰보느라 반 권 정도를 읽은 듯 피로가 매일 몰려왔다. 그래도 구슬을 놓지 않으려 했다. 음악은 좋은 벗이다. 주말의 예능 프로그램들은 모처럼 꿀맛이었다. 그렇게 월요일이 왔다. 폭설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큰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이 한 주의 시작이다. 다행이도 날씨는 풀리고 있다.
[링크]
첫째 밤 독서 : http://blog.aladin.co.kr/inkriver/8167631
둘째 밤 독서 : http://blog.aladin.co.kr/inkriver/8170615
셋째 밤 독서 : http://blog.aladin.co.kr/inkriver/8174409
넷째 밤 독서 : http://blog.aladin.co.kr/inkriver/8176674
다섯째 밤 독서 : http://blog.aladin.co.kr/inkriver/8178820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切りとれ、あの祈る手を)』은 가벼운 책이다. 어디 들고 다니며 읽기에도 좋다. 하지만 내용이 무섭다. 수 년 전, 국내 독자들에게 처음 소개되고 그 파격에 뜨거운 관심을 받았던 것 같은데, 과연 얼마나 팔렸을지는 모르겠다. 항간에서 인문학의 ‘한계’라 쉽게 지적하곤 하는 일상과의 괴리, 실천 가능성, 이런 문제들에서 사사키의 책 역시 자유롭지 않다. 얼핏 보면 붕 떠 있는 말을 한다. 그렇게 느껴진다. 널리 읽힐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는다. 저자 본인도 놀란 기색이다. 곳곳에 사사키에 대해 험담하는 이들도 적지 않은 듯하다.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요컨대 [문학]하라는 것이다. 대문자 문학. 그것은 읽고 쓰는 것을 말하며, 혁명과 직결된다. 어떻게 [문학]이 혁명으로 이어지는지, 혹은 혁명 그 자체인지는 대혁명(종교개혁)의 루터, 고아이자 문맹이었던 장사치 사도 무함마드와 『쿠란』, 성녀 테레지아와 같은 신비주의자들, 그리고 중세 해석자 혁명을 거치다보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비난과 농담, 유머, 겸손 등 사사키 특유의 어조를 따라간다. 전문가, 지식인, 종말론자, 원리주의자, 그리고 그들에게 끌려 다니는 대부분의 사람들, 그들이 하나 둘 이 책의 중심에서 퇴출되는 기상천외한 광경을 보게 될 것이다. 그렇게 쳐내고 나면 위대한 문인과 경전을 남긴 이들만이 남는다. ‘읽고 쓴’ 이들이다.
고이 쥐고 있던 [읽기-씀]이라는 구슬을 다시 본다. 사사키의 모든 주장에 동의한 것은 아니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순간 가슴이 뜨거워져 동감한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단언이 많아 여과 없이 느껴지는 지적들은 시원한 곳을 긁어주기까지 했으니, 이 일본의 사상가에게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모양이 어떠하든 간에 나도 얼마간은 쓰는 사람으로 지내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솔직히 그럴 자신도 없고, 의도도 없다. 언젠가 한 문학 교수가 이런 말을 해 기억한다. 옛글 어딘가에 몇 번 바른 적 있는 대학시절 추억이기도 하다. 그는 우리에게 ‘보통독자’가 되라고 했다. 아무 도움도 받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한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이를 일컫는 말이다. 과연 그런 일이 가능할까도 의문이었지만, 여하튼 그의 저 단어가 우리에게 말하는 바는 분명하게 전달됐다. 교수는 이어 말했다. 독자가 차라리 쉬워. 작가의 삶보다는 말이야. 나는 저 작가에 [ ] 대괄호를 치지 않는다. 모든 작가를 우러르지는 않으니까. 그러니 사사키가 [문학]이라고 하며 그걸 혁명에 가져다대는 걸 보고, 아니, 그런 글을 읽고 어떻게 내 삶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까. 그는 이전의 『야전과 영원』에서 누차 독자의 자질을 상기시킨 적이 있다. 그런 뜻은 아니었을까? 혁명이라니. 또 한 번 말하게 된다. 그건 내게서 멀다.
요컨대, 그런 책이다. 닷새를 지나왔다. 지금은 서너 걸음 정도 떨어져 있는 서재에 꽂아뒀다. 치열했던 지난 다섯 글들도 이면지에 뽑아 어딘가에 뒀다. 그리고 내게는 무엇이 남았는가를 생각하며 여기까지 적어오면서, 그것이 언젠가는 내게 남아 있는 무언가가 되어주길 바라게 된다. 그럴 수밖에 없다. 나는 읽는 사람이고, 한편으로는 쓰는 사람이니. 그렇게 믿고 있다. 저 혁명이 작은 것이라도 좋을 것이다. 시선을 바꾸게 되는 것이어도 좋다. 아니, 그것이면 족하다. 한 가지 얻은 것이 있다면, 그건 책 고르는 일에 조금 더 신중해졌다는 것. 변화는 작게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벌어진 틈이 얼핏 보이는 듯도 하다. 들여다보기에는 무섭지만. 사사키는 그곳에 빛이 있다고 말했다.
* * *
아직 끝내긴 이르다. 짧게 쓰지 못하는 게 버릇인 듯도 하다. 하지만 털어놓다보면 길어진다. 사사키의 책을 읽다 넘어가지 못한 부분들이 있다. 두 단어로 추려지는 것 같아 모아봤다. 혹 이 책을 읽다가 사사키의 몇 가지 지적에서 위화감을 느낄 이들이 있진 않을까, 이런 생각에 고민을 덧대어놓는다. 가볍게 생각할 것들은 아니다. 그러나 읽고 쓰고 예술을 하는 이들은 늘 대면하는 문제이다.
사사키는 이 말을 싫어하지만 그래도 하자. 종말. 예술 종말론은 20세기 초반의 기현상을 목격한 20세기 중반 즈음의 평론가들이 내놓은 것이다. 미술사를 공부하던 무렵, 마티스와 피카소, 몬드리안은 충격이었다. 차갑게 식어버린 암기된 상식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그에 앞서 세잔은 또 어떠한가. 인체를 대단히 정교하게 그리고, 풍경을 사진 수준까지 사실적으로 그리던 이들에게서 추상으로의 전환은 기계 발명 이후 급속도로 달라진 일상만큼이나 급박하게 이뤄졌다. 프랑스 미술의 고전적 성향이 파리에서 아직 드셀 무렵, 미국에서는 변기가 전시됐고 그건 아주 유명하다. 왜 일부 예술가들이 그 ‘변기’를 옹호하는 글을 언론에 투고했을까. 어디서부터 진행된 일일까. 이렇게 묻고 보면 참 복잡한 현상이다. 지금의 우리야 쉽게 생각하고 웃을 수 있다. 변기라니.
이제 예술 앞에 ‘진짜[real]’라는 전통의 권위가 붙게 됐다. 정크아트가 나온 건 이보다 조금 뒤의 일이지만, 사람들은 ‘진짜 예술’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 확연하게 드러나 있는 편견, 혹은 권위의 벽이 대체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했다. 평론가들에게 이는 머리를 지끈지끈하게 만드는 문제였다. 어느 편에 서야 하는지도 문제였으리라. 그런 와중에 아서 단토의 『예술의 종말 이후(원제 : After The End of Art)』가 나왔다. 물론 나는 예술의 ‘진화’이니 하는 것은 당치 않다고 생각한다. 예술을 유기체에 빗대는 표현에는 다소 거부감이 있다. 예술가가 일정 부분 타문화의 선례들, 혹은 다른 작가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는 과정을 맥락의 소개 없이 보면 혁명적인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 단세포에서 다세포로 ‘진화’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뿐이다. 예술 그 자체는 유기체가 아니다. 그런 비유로는 갑작스러운 변화를 설명하지 못한다. 아니, 제대로 빗대어 표현할 수 있는 단어도 아니고.
그러나 이건 처음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변기를 작품으로 내놓는 것은, 그리고 마그리트나 워홀처럼 명백히 그것인 걸 앞에 두고 “그것이 아님.”이라는 제목으로 관람자들을 혼란에 빠뜨린 것은. 이런 기현상의 충격에 평론가들은 너도나도 ‘종말’이란 단어를 썼었다. 그보다 앞선 시대에는 러시아의 말레비치가 하얀 종이 위에 검은색 사각형을 하나 그리더니 “더 이상 우리 화가들은 그릴 것이 없다. 여기가 회화의 종착점이다.”라고 했다. 나는 이를 ‘회화의 영도(zero degree)’라 기억한다.
이건 어떤가? 예술의 종말. 사사키에게 이렇게 묻고 싶었다. 예술이 없어진다는 의미의 ‘종말’이 아니라, 기존의 예술을 일컫는 단어를 /예술/이라는 표기로 일부러 가시화해본다면, 바로 그 /예술/의 종말을 그 비평가들은 의미했던 것이다. 이제 경계는 없다. 어디까지가 예술이고, 예술이 아닌가? 작품으로 승인되는 현상이 거의 무한해졌다. 권위는 남아 있겠지만. 영국 YBA 현상만 놓고 보더라도 열광하는 자들과 경멸하는 자들이 나뉘어 있는 것 자체가 예술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자기가 먹다 남긴 사과를 유리 상자 안에 두고는 <실낙원>이라 하질 않나, 네온사인 하나 만들어놓고 작품이라 내걸지 않나.’ 이런 말 안에 두 개의 표정이 모두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사키는 별 관심도 주지 않겠지만)시장이 여기에 반응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미술시장의 거품, 작품=사치품의 전락 같은 현실적 문제는 논하지 않겠다. 버거운 일이고, 거기서 거기인 일이다. 나처럼 예술을 ‘추종’하는 이들에게는 씁쓸한 기삿거리 정도일 뿐이고.
새로운 것은 없다는 의미에서 종말을 과감히 잘라버리는 게 사사키의 작업이었다. 그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정말이지 완전히 새로울 수밖에 없는 무언가가 예기치도 않게 찾아올 수 있다. 역사는 돌고 돈다는 생각은 혹여나 도래하게 될 ‘전혀 새로운 것’에 대한 가능성을 전제하지 않는 사고는 아닐까? 혹 그런 걸 두려워하는 방어적 사고는 아닐까? 여기에 획기적으로 우리의 생각을 바꿔놓을 수도 있는 과학의 발견을 가져다놓으면, “새로운 것은 없다.”라는 말이 지닌 함의가 어쩌면 위험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나아간다. 지극히 단순하고 전체주의적이며 기만적이기까지 한 종말론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나만의 생각일까. 모르겠다. 입에서 자꾸 맴돈다. ‘새로운 것은 없다’라, ‘새로운 것은 없다.’라, 그냥 내뱉고 말 생각은 아닌 것 같아 남겨본다.
* * *
루시디. 이 작가는 [문학-정치]의 첨예한 관계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 상징이다. 여기서 가오싱젠을 한 번 더 말하고 싶었다. 언젠가 한 영화평론을 읽었다. 왜 우리나라에서는 정치인을 주제로 한 영화가 나오지 않느냐는 글이다. 혹 그 평론을 아는 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어딘가 크게 게재됐던 기억이 있는데, 어쨌든.) 어떤 이가 그 밑에 댓글로 “위대한 정치인이 없으니까.”라는 단발의 역정을 적어놔서 웃었다. 생각해봤다. 그보다는 문학과 정치가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본능적으로 거부하려는 어떤 습성이 우리에게 들어있는 까닭이 아닐까, 그래서 ‘만들어봤자’인 영화를 만들지 않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아도 가오싱젠의 문학론을 읽었던 차다. 『야전과 영원』에서 벤슬라마의 인용으로 지적된 [문학]과 혁명의 관계는 사사키의 이번 책에서도 여지없이 나왔다. 사사키도 이 부분을 거듭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다. 정치와 혁명은 뗄 수가 없다. 그러니 [문학]과 정치는 적대적 관계에 있다. 그가 어느 편에 서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된다.
책 읽고 쓰는 글 말고 나름 창작이라 해서 붙들고 있는 글들이 몇 있다. 그건 대부분이 톨킨 때문에 적기 시작한 글로, 나는 지난 십 수 년 간 톨킨의 ‘문학론’에서 결코 멀어진 적이 없었다. 혹은 그렇게 생각한다. 일단 태도가 그렇다는 뜻이다. 『반지의 제왕』 서문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번역해서 옮겨본다.
“물론 작가가 자신의 경험에서 전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경험에서 이야기의 싹이 돋아나는 과정이라는 건 정말 복잡합니다. 그리고 기껏해야 그 과정을 정의하려는 것조차도 불명확하고 애매모호한 증거에서 추측하는 것일 뿐입니다.”(J.R.R. 톨킨, 『The Lord of The Rings』, Foreword, 11쪽)
이건 톨킨의 세계대전 참전 경험이 그의 환상적인 세계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고 단정해버린 평론가들을 염두에 두고 쓴 글이다. 분명 톨킨은 그런 연관성을 영국 작가 특유의 공손한 어휘들로 살짝 밀어내면서 문학의 ‘고립되어 있는 섬’을 옹호한다. 그 자신도 그렇게 수 십 년 간 작품을 만들었다고 자부했고 말이다. 나 역시 현실에서, 그리고 내가 배운 것들에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말하진 않는다. 그건 기만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창작에 있어서만큼은 그 영향 관계가 의미하는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뜻에서 멀어지려고 한다. 쉽게 말해 “이건 그런 의도로 쓴 게 아닙니다.”라고 슬쩍 발을 뺀다는 것이다. 이건 소극적인 태도라기보다는 문학적인 태도라고 알고 있었다.
톨킨보다 훨씬, 정말 훨씬 첨예한 무대에 서있었던 가오싱젠은 그런 말을 더 적극적으로 한다. 그가 중국에서 프랑스로 망명간 작가라는 사실 때문에 그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중국문학의 현실은 전 세계 앞에 그 나체를 드러내야 했다. 중국 정부가 왜 그를 싫어하는지는 충분히 알 만 하다. 그런 그가 대만에 가서 강연을 하다가 문학의 위치에 대해 역설한 부분이다. 참고로 가오싱젠이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서양의 문학 풍토를 옹호하는 건 아니다. 시장마저 거부하려고 하는 사람이니까.
“작가 스스로 자각해서 자신의 문학에 덧씌워진 정치적 라벨을 떼어낸다 해도, 곧바로 반대편의 정치적 조류 속으로 말려들기 십상입니다. 그 속에서 잃어버리는 것은 결국 작가 자신의 고유한 문학창작의 의미뿐이죠.”(가오싱젠 지음, 박주은 옮김, 『창작에 대하여(원제 : 創作論)』, 63쪽)
혹시 글을 쓰는, 창작하는 이들 중에 ‘작가 고유의’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낄 이가 있을까? 한 명도 없지 않을까? 창작의 기본이 되는 자부심인데? 물론 글을 쓰는 사람, 그러니까 남보다 좀 더 진중하여 때때로 고리타분하다거나 재미없다거나 그런 오해를 받기도 하는 사람은 글이라는 것이, 또한 말이라는 것이 자신의 것이기도 하고 타자의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모든 걸 걷어내고 쓴다고 해도 분명 고유의 것이 아닌 게 들어오기 마련이며, 솔직히 말하자면 대부분이 타자의 것이다. 하지만 수용하고 배출하는 이 문학의 생리 과정에는 고유의 코드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착각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게 작가의 지문 같은 거다.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렇게 생각해야만 내 안에 들어 있는 것을 글로 내뱉을 수 있다. 따라서 글 쓰는 이는 영향 관계를 인정하면서도 다른 어느 영역에서는 결코 영향을 받지 않으려고 밀어낼 수도 있다. 자의적으로 말이다. 그렇게 ‘나’라는 창작 공간이 수호되며, 오랜 과정 끝에 작품이 나오게 된다. 밖에서 보는 사람들은 그걸 객관적 입장에서 이런저런 것과 연결된다고 말하겠지만, 반대로 작가의 입장에서 그런 말을 들으면 그것 역시 자의적인 판단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물론 양심적인 작가들은 자신에게서 이미 떠난 작품에 대한 왈가왈부에 고집스러운 태도를 지니지 않겠지만.
사사키가 벤슬라마를 예로 든 것은 혁명적 가능성을 언급하기 위해서였다. 루시디가 망명을 떠나 아직도 서구-이슬람 구도의 ‘핫아이콘’으로 남아 있는 상황에서 문학은 그런 가능성을 얼마든지 보여준다. 이 급진적인 저자가 이보다 4년 정도 나중에 낸 책인 『이 치열한 무력을(この熾烈なる無力を)』에는 [문학]을 향한 태도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는 이 책의 독자가, 그러니까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의 독자가 문학을 말 그대로 급진적으로 받아들이길 바랐다. 급진적 문학이라, 아니, 문학의 급진적 수용이라…… 이 도발은, 모르겠다. 문제는 내가 아직도 혁명이라는 걸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 말이 위안이 된다. 역설이다. 도발을 듣고 기뻐하다니, 내가 어떻게 된 건 아닐까? 하긴 책과 함께 글을 쓰며, 나는 어떻게 된 것 같다고 쭉 생각해왔다.
* * *
『이 치열한 무력을』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했으니 말인데, 사사키의 대담자인 ‘가가미’라는 사람의 대답이 있어 옮겨본다. 사사키보다는 연장자이지만 사실 누군지는 모르겠다. 사사키가 “누가 읽을까요?”라며 물었다. 가가미가 말했다.
“아마 매우 일반적인 사람들일 거야. 지금은 사유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사유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잖아? 사유라는 것이 심심풀이도 시간 낭비도 아닌, 그 자체가 실은 생산적이라는 얘기니까 말이야. 그런 사람들한테 와 닿는 게 있어. 그런 의미에서 세상은 건전하다고 생각해. 이런 종류의 책이 팔리는 건 나쁜 현상이 아니거든.”(사사키 지음, 안천 옮김,『이 치열한 무력을』, 51쪽)
그 후 둘의 이야기는 실천과 이론을 양분해서 생각하게 하는 행태들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이 책을 읽은 순간부터 혁명의 점화가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순간에 대한 지각을 열어둬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생각이라도 하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이런 결말에 이르게 된다. 뭔가를 자르는, 그리고 치열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