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키 아타루(佐々木 中)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切りとれ、あの祈る手を)』

  : 셋째 밤 독서




2016년 1월 22일




    의도적으로 아포리즘을 멀리 하던 내가 얼마 전 시몬 베유의 『중력과 은총(원제 : La Pesanteur et la grâce)』을 샀다. 부끄러운 일이다. 아포리즘인 줄 모르고 성급히 산 까닭이다. 지름신을 경계했어야 했다. 제목만 보고 덜컥 사버리는 책들이 간혹 있다. 꽂아뒀다가 ‘중고로 되팔까?’ 생각을 했다. 이 검은 책은 그렇게 며칠을 서재에 있었는데, 어느 날 그걸 집어 읽었다. 무슨 기분 탓에 그랬는지는 모른다. 지금 와서 기억날 리도 없다.


    중력에 대한 이야기였다. 과학 서적을 적잖게 읽었다. 철학자의 중력 이야기? 그래, 여기서 중력은 어떻게 ‘철학적으로 왜곡’되는가, 두고 보자, 하는 치졸한 마음으로 독서가의 가면을 조금만 더 써보기로 했다. 그렇게 한 시간 남짓 읽었다. 아니,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을 지나가는 중이니 사사키의 말을 빌리자. 읽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가면을 벗어버렸다. 중력 없이 하강하게 하는 힘, 은총, 가장 낮은 곳까지 향한다는 힘. 그 어려운 일에 대한 책이었다. 언젠가 이 책을 감히 다시 써보겠지만, 마음이 떨렸다. 잠언 모음이다. 그래서 여백이 다른 책보단 많다. 쉴 곳이 많다는 뜻이다. 그만큼 멈춰 설 기회가 많고, 속으로 울다 책을 덮게 되는 때도 많다는 것이다. 두 번 읽기를 기다리며 나는 이 책을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 옆에 꽂아뒀다.


    오늘 시몬의 책이 갑자기 생각났다. [읽기-씀]은 3일 째 내가 두 손으로 고이 들고 있는 구슬이다. 깨지기 쉬울 것 같아 여기저기서 다른 책을 빌려다 막을 쳐놓는 중이다. 시몬의 책에서 빌린 막은 “읽기. 어느 정도의 주의력이 개입하기는 하지만 읽기는 중력에 따른다. 우리는 중력이 제시하는 의견을 그대로 읽는 것이다 …… 보다 높은 주의력을 기울이면 중력 그 자체를, 그리고 사용 가능한 여러 가지 균형 체계를 읽을 수 있다.”(시몬 베유, 윤진 옮김,『중력과 은총』, 225쪽)라는 구절이다. 그녀에게 최고의 읽기는, 그리고 쓰기도 마찬가지일 텐데, 그것은 그 과정을 통해 신을 읽어내는 것이다. 책이 사람을 잡아당긴다는 가벼운 통찰 정도의 얘기가 아니다. 아, 뭐라고 표현할까. 안타깝지만 시몬은 그에 대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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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뭘 놓쳤던 것일까? 나는 그 구절을, 그 구절의 맥락을, 앞뒤를, 수십 장에 걸친 이야기들을 다시 읽어봤다. “지성은 진정한 겸손에 가장 가까이 있다.”(위의 책, 215쪽)는 말일까? 육체와 세계의 관계를 바꾸는 일에 관한 말이었던 걸까? 유대인인 그녀가 말한 인도의 아트만? 더 앞장으로 가서 읽어보니 ‘사랑하기’가 나온다. 아니면 낮은 곳으로 내려가기에 대해 이야기였던 걸까? 모르겠다. 실패다. 첫 번째 독서가 철저한 실패로 끝났다.


   나는 읽는 사람이다. 때때로 가증스럽게 보이기는 하나, 그래도 쓰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니 나와 비슷한 사람들은 이해할 것이다. 이 굴욕감을. 돌파구가 다른 곳에서 우연히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릴 만큼의 굴욕감. 그리고 오랜 시간 후에 그 굴욕감이 다시 새벽의 강 안개처럼 찾아오면 저 건너편에서 뱃사공이 나를 태우러 노를 저어 온다.


    사사키의 [읽기-씀]에는 부동의 무언가가 있다. 그건 이 책의 독자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가 읽기와 쓰기와 혁명의 역설에 힘을 주는 구절마다 경전이 언급된다는 것. 뱃사공이 내게 경전을 건네줬다. 경전은 하나의 텍스트가 아니다. 그것을 쓴 사람, 읽은 사람 모두를 자신의 품에 품는다. 대충 읽고 그것을 정치 도구로 사용하는 이들에게는 경멸의 시선을, 그러나 그 안에서 ‘중력’이 된 이들에게는 존경을.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과의 셋째 밤 여정은 그렇게 요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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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고 쓰는 자와 사기꾼을 나란히 세워놓고 후자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밤이다. 둘을 열거만 해줘도 독자들이 알아서 비판하겠지만 사사키는 굳이 목소리를 높인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글을 통해 독자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좌천되는지는 헤아릴 수조차 없을 지경이다. 여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사사키는 안다. 우리보다 더 잘 안다. 옴진리교 사건은 현해탄을 건넌 저 섬나라에서 일어났었으니까. 그게 일본 사회에 얼마나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는지를, 대학 시절 잠깐 들어본 적이 있어 새삼 떠올려봤다.


    전 날 밤에는 반종교개혁으로 끝냈으니 일단 사사키도 첫 막은 그 무렵으로 끌고 가서 열어주지만 여기서 또 다시 루터를 소환하진 않는다. 루터는 셋째 밤 마지막 즈음에 가서 아주 잠깐 나올 뿐이다. 이 밤은 신비하다. 이 단어를 둘러싼 부정적인 것들을 다 씻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이성의 사회다. 신비를 추종하며 사랑하는 우리에게 진짜 그런 일들이 닥치면 과연 그 단어를 좋아할 수 있을까. 섣불리 답할 수 없다. 그래서 신비주의는 어딜 가든 편견을 뛰어넘기 힘들다.


    일본의 사정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서양도 다를 바 없다. 카렌 암스트롱의 『신을 위한 변론』에도 신비주의의 올바른 정의를 위한 저자의 노력이 곳곳에 발라져 있다. 사사키는 신비주의를 ‘구하기’ 위해 엘리엇, 발레리, 릴케, 파운드, 첼란을 빌리며, 라캉을 구해준 극적인 전회 이야기도 잠깐 언급한다. 신비주의자의 대표 사례로는 아빌라의 성녀 테레지아가 실려 있다. 그녀의 소원대로 말라리아에 걸렸다가 요양하던 중 종교적 황홀감을 반복 경험해서 엄격한 수녀원 규칙을 만든, 가톨릭의 상징적인 성녀. 베르니니가 조각한, 그 엑스타시 속의 성녀다. 읽고 씀이 광기와 연결됨이 다시 확인된다.


    그러다가 갑자기 무함마드가 나온다. 사족인데, 대학에서 잠깐이나마 이슬람을 공부했었다는 사실이 지금 내게는 더할 나위 없이 큰 재산이 됐다. 이번 IS 사태 이후 인터넷 공간에 오고 가던 무분별한 비판과 욕설들을 보며 속으로 말했다. “나는 구원받았다.” 오늘날 이슬람은 남성적 이미지가 강하다. 비교종교학 교수도 그렇게 표현했다. 젊고 강력하며 전투적인 이슬람. 물론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게 된 경위를 그는 전부 알고 있었고, 나는 그 과정을 배웠다. 그것은 놀라운 경험이었다. 큰 벽이 허물어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장자와 더불어 그 수업만은 대학에서 건져온 보석이라 말할 수 있다.


    사사키가 무함마드를 언급하는 순간부터 이슬람을 모르던 독자들은 아마 이야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첫 무슬림의 대부분이 여성이었고, 무함마드 앞에 ‘어머니’라는 호칭이 달려 있으니. 독자의 자질 문제이긴 하나, 나는 제발 이 책을 (이 글도 마찬가지고) 읽는 이들에게 이슬람 혐오증이 없길 바란다. 그리고 사사키는 분명히 밝힌다. 종교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혁명 이야기를 하는 중이라고. 하지만 이건 거짓말이다. 올바른 거짓말이다. 철저히 종교 이야기를 되풀이 하며 그릇된 세태들에 대해서는 일보의 물러섬도 없는 비난을 쏟아낸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서 혁명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혁명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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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팀(고아)이자 문맹이었던 장사치 무함마드가 대천사 지브릴(가브리엘)이 갖고 있었다던 ‘책의 어머니’로 향하는 과정. 소격과 조우의 관계에서 한 인간이, 아니, 사도가 읽고 쓰며 혁명하는 과정은 이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으리라. “읽은 것은 굽힐 수 없습니다.” (사사키의 책, 151쪽) 동굴에서 얼마나 두들겨 맞았던가. 혹은 목이 졸렸던가. 아내에게 가서 미쳐버리겠다고 고백하면서 그는 아마 울었을지도 모른다. “여보, 하디자, 저자가, 아니, 그러니까 자신을 천사라 주장하는 저 미치광이가 내게 자꾸 읽으라고 협박하는 거요. 문맹이라고, 바보일 뿐이라고 아무리 머리를 조아리며 울부짖어도 목을 조르고 뺨을 때린단 말이오!”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지혜로운 하디자는 그런 어린 남편에게 다시 동굴로 가라고 하고, 그 순간 사사키의 말처럼 한 세상이 태어났다. 아, 세상은 정말이지 여자가 빚는다. 나는 이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라캉이 ‘여성의 향락’을 말한 극적인 구절이, 그 전회가 다시 떠오른다. 남편은 동굴로 가서 『쿠란』이 되었다.


    나도 반론은 할 수 있다. 얼마간 읽다가 그런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니까. 그래도 이슬람은 칼로 세워진 것이다. 전 날 밤에도 그랬다. 선행하는 것이든 후행하는 것이든, 본질은 폭력이 아니겠냐고. 혁명은 집단을 상대하는 일일 수밖에 없고, 집단은 원래 갈라져 있는, 분절되어 있는 것들의 이질적 집합일 수밖에 없다. 그 집단을 가르는 것들은 수도 없이 많은데, 우린 그 중 정치와 사상의 연결선이 다르다는 이유로 갈라선 채 아직도 아물어지지 않은 상처 주위에 긴 철책을 두른 민족이 아니던가. 그런데 무슨 혁명인가? 솔직히 지금도 그 생각이 가시지 않는다. 목까지 나왔다가 들어가니, 움찔거리는 혀가 갈필을 잡지 못한다. 갈증이 난다.


    그래도 사사키는 단언한다. 여기까지 오니 그 단언이 이제는 익숙해진 듯도 싶다. 무엇보다도 선행하는 것은 읽고 쓰는 혁명이라고. 텍스트라고. 폭력은 그 뒤에 있는 것이라고. 단, 프로이트가 제시한 원부 신화는 예외라 하겠다. 원부가 일삼는 폭력에 대항한 아들들이 아비를 죽이고 법과 텍스트를 출현시켰다는 이 기상천외한 판타지는, 즉 지극히 서양적인 생각에서는 법의 기원이 폭력의 폭력적 중단 이후라고 거의 못 박혀 있다. 법의 기원 문제는 빅뱅만큼이나 해명하기 어려운 과제이리라. 누가 알까.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프로이트 원부 신화의 가타부타가 아니다. 판타지를 두고 그걸 논하는 것도 우스운 모습이긴 하다. 사사키는 여기에 무함마드를 대입시킨다. 원부 신화 공식에 무함마드를 넣으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 즉, 무함마드는 원부가 아니다. 이건 이슬람 형성 과정에 있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로, 오늘날의 정치적 무슬림들이라면 그 누구라도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그들이 무함마드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문맹. 고아. 아내가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던 남편. 천사에게 뺨 맞고 목 졸린 이. 아들은 둘이 있었지만 일찍 죽고, 딸만 넷이었던 딸 바보 아빠. 무함마드는 딱 그쯤 됐다. 다른 기존 종파들에서 무수한 비난을 받았고, 죽을 뻔 했던 적도 수 차례다. 그런 그가 최후의 사도이자 가장 위대한 사도가 됐다. 원부라니 가당치도 않다. 그는 그저 읽고 쓰기를 했을 뿐이다. 정신분석이니 민족학이니 오리엔탈리즘이니 하는 것들로는 절대 이해할 수가 없다. 법은 어디서 왔는가? 읽고 쓰는 자에게서 왔다. 지브릴은 무함마드의 목구멍을 찢고 심장을 꺼내 깨끗이 씻은 다음 다시 넣어줬다. 이것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분명하다. 폭력은 선행하지 않는다. 사사키는 이 대목에서 루터를 잠깐 상기시킨다. 농민전쟁에 대한 비판을 염두에 둔 그가 다시 한 번 강조했던 ‘폭력≠텍스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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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 원리주의는 얼마나 나쁜 것인가. 나와 텍스트를 구별하지도 못해 멋대로 읽고 쓰는, 텍스트 앞에서의 공포를 극복하지 못하는 나약한 자들이 펼치는 논리, 그 논리를 따르는 자들의 우스꽝스러운 춤을 보라. IS는 지하드를 말한다. 그러나 그자들이, 정치 앞에서는 눈에서 피를 쏟을 수도 있는 저 파렴치한 자들이 과연 빛나는 책 『쿠란』을 읽기라도 했을까? 이런 식으로 비판하면 피해갈 수 있는 종교는 하나도 없다. 사이비 종교는 물론이고, 제도권 종교도 마찬가지다. 예수는 분명히 말했다. 언제 올지 모르니까 깨어 있어주시오.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리던 자도 모른다고 했다. 그런데 그저께 집 앞에서 강아지 산책을 시키던 동생이 (강아지 발 닦일 양으로) 받아들고 온 물티슈 봉지 뒤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심판의 날이 ‘곧’ 온다고. 천국의 문 앞에서 무척이나 초조해하는 목사와 신도들이 다니는 교회인 모양이었다.


    종말과 죽음을 팔아서 품을 넓히는 행태들은 무수히 많다. 다시 언급할까? 히에로니뮈스 보스의 <건초수레 삼단화>를? 종말과 죽음, 라캉 식으로 말하자면 만민이 그 앞에서 평등할 수밖에 없다는 ‘절대적 향락’을 상품으로 판다. 무한의 죽음. 아, 그것은 나치를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 절멸의 국가. 그러니 그들을 ‘절멸의 종교’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는 하등 없다. 끝을 말하는, 시작을 말하는 현대인들은 이에 너무나도 손쉽게 동조하는 것이리라. 비판이 여기까지 나가니 몸을 떨 수밖에. 아감벤을 경멸조에 가깝게 비판(솔직히 비난)하는 구절에서는 이 책을 더 이상 읽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한 번 말한 적이 있는데, 이 책은 무서운 책이다. 우선 제목부터가. 손을, 아니, 기도를 자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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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전 날 밤 예상하길 셋째 밤 정도 되면 중세 해석자 혁명이 나오겠거니 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무함마드로 이야기가 엇나가면서 다시 모아지는 이 내용들이 슬슬 버거워졌고, “이건 대체 무엇인가!”라는 탄식이 속마음에서 불현듯 튀어나오기에 이르렀다. 『야전과 영원』 이후 늘 불편했던 마음이 어디서도 위안을 받지 못하더니, 이제는 아예 위안 받을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라는 충고가 제 3자의 선언처럼 판결봉을 휘둘러버린 모습이다. 딱 그렇다.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에서 항적(航跡), wake, track, furrow의 그것을 논하면서 나는 또 한 번 어디론가 끌려간다. ‘끝없음’으로. “그리고 다시 싸우기 시작했어.”라고 말하는 블라디미르와 “그리고 또 새로운 밤이 찾아오지.”라는 포조의 ‘기약 없음’의 세계로. 하나도 결정적이지 않다. 그러니 여기저기 올이 풀려버린다. 기억이 깨지고, 나는 허허벌판에 있다. 큰일이다. 공포를 버티는 일은. 읽고 쓰는 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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