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키 아타루(佐々木 中)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切りとれ、あの祈る手を)』

  : 다섯째 밤 독서




2016년 1월 24일




    지난 글에 한 분이 덧달아준 의견이 있어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멸망을 지향하는 집단 무의식이 유전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나는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래서 매트 리들리의 『게놈(Genome)』을 다시 읽어봤다. 종말론을 하나의 문화 현상이라고 보면, 그건 아마 문화적 유전과 진화상의 유전이 교묘하게 겹쳐진 채로 정말 유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는 추정일 뿐이다. 하지만 본능은 학습에게 자리를 내어줄 수 있다. 충분히 가능하다. 종말을 언급하는 종교, 아니면 위기마다 불거지는 종말 같은 건, 르장드르의 말을 빌리자면 하나의 ‘의례’로 조용히 스며들어 우리의 안에 굳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걸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나쁜 형태이겠지만.


    조금만 더 말해보자면 이건 병리학적으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믿음은 의외로 가장 먼저 죽는다. 병에 걸리기 전에 “나는 살 수 없어.”라고 믿어버리면 면역이 떨어진다. 믿음은 하나의 화학 성분과도 같다. 물론 그걸 뛰어넘는 것이 믿음이기도 하다. 고차원적인 말 같지만 사실이다. 그래서 치병(治病)의 기적을 행한 뒤 자신 앞에 서 있는 이에게 예수는 이렇게 말한 것이다.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그러니 종말론에 기대는 사람은, 그 날이 언제 올지 자신도 모른다고 한 예수에게서 얼마나 많이 벗어난 불신론자란 말인가.


    또한 종말론은 모든 것의 귀결이자 공평해지는 순간을 바라는 믿음이기도 하다. 그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이 세상의 모든 새로운 것의 다양한 모습과 차이를 없애버린다. 독일의 마르틴 우르반은 『사람들은 왜 무엇이든 믿고 싶어 할까?(원제 : Warum der Mensch glaubt.)』에서 브레히트의 <서푼짜리 오페라>를 빌려 “사람들은 단 한 번도 거짓과 기만을 알아차리지 못해”(마르틴의 책, 330쪽)라고 했다. 왜 그런 것일까? 사사키는 분명하게 답한다. 그것이 넷째 밤의 결론이기도 했다. 정보와 폭력의 바다에 우리는 오랫동안 빠져있었던 것이다. 다 끝날 거라는 믿음 역시 넓디넓은 바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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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조소로 시작한 모양이다. 5세기 게르만 민족의 이동에서 ‘메뚜기형’ 인간에 이르는 수십 장의 내용은, 사사키가 광대의 가면을 쓰고 관객들을 조롱하는 한 편의 연극을 상상케 만든다. 유독 숫자가 많이 나온다. 지금껏 우리의 입에 회자되며 수많은 예술에게 동기를 부여해주는, 심지어는 유명한 사업가들조차도 그걸 읽고 영감을 받곤 한다며 선전하는 고대 그리스 문학은 단 0.1%만 남아 있는 상태다. 그것이 이슬람으로 이어지고, 르네상스가 발아한 뒤 근대 유럽으로, 그리고 현대의 초석이 된다. 남아 있는 글의 위력이 이러하니, 사사키는 이어 문맹 이야기를 한다. 재일한국인 할머니에 대한 리포트로 시작하여 우리 독자들에게는 남달리 들릴 수도 있겠다.


    “글자를 읽을 수 있다는 것 자체는 전혀 자명한 것이 아닙니다.”(사사키의 책, 262쪽) 이걸 상기시키려고 긴 역사를 돌아본다. 에두르진 않는다. 거칠게 짚어가면서 프랑스혁명의 사례로 독서와 혁명의 연관성을 언급하고, 문학의 황금시대인 19세기의 심각한 문맹률로 여정이 이어진다. 사사키는 묻는다. 그런데도 디킨스, 스탕달, 보들레르, 도스토옙스키, 고골리, 푸시킨, 톨스토이, 투르게네프가 나왔다면, 저 대가들은 살짝 돈 것이 아닌가? 세속권력은 군자가 되려 하지 않는다. 그 누가 공자의 시대처럼 읽으려고 하고, 고대 그리스에서처럼 학문으로 소양을 쌓으려고 할까? 학문은 그들에게 적이다. 게다가 글 읽을 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이런데도 쓰는가? 이유가 무엇인가?


    위대한 그들은, 나는 그런 상황을 아주 잘 알고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문학이 사는 것이 곧 인류가 사는 것이라는, 읽고 쓰는 것의 사명을 믿은 것이다. 말 그대로 그냥 쓰는 수밖에 없었다. 사사키는 이런 정신과 지금의 ‘문학 종말론’을 나란히 놓는다. 비난하지 않아도 독자가 알아서 혀를 차겠지만 구태여 조롱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심지어 90% 이상의 ‘쓰는 이’가 나가떨어질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하기야 나도 이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한 교수가 말했다. 그는 우리나라 문학이 일본에 1~20년 뒤쳐져 있고 노벨문학상은 소원하다는 말을 해 내게 적나라한 충격을 안겨줬던 문학 교수였다. 지난 우리 문학의 반세기 역사에서 기억될 이는 정지용 밖에 없다. 자네들은 앞으로 반세기를 더 살며 또 한 명의 작가를 만나게 될 것이다. 기억하건대 그는 단 한 번도 문학의 절멸이니 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자질의 문제를 언급했어도.


    이걸 나는 인문학에도 대어본다. 그것이 죽었다는 이 시대의 선언을 믿지 않는다. 대학이 취업을 위한 공간으로 전락했다고? 전락(轉落)이라고는 이해해도, 전락(全落)이라고는 이해하지 말아달라고 거듭 말하고 싶다. 근본과 더 큰 것을 고민하는 학우들은 많다. 취업을 생각하고 있어도 더 진지한 고찰을 하는 이들은 많다. 대학이 그러한 환경에서 멀어진다고 해도 우리는 그 과정을 거칠 것이다. 어설플 뿐이다. 겨우 대학생인데. 주입식 교육을 받고도 대학의 너른 공간에 들어가 자신을 알고 겸손해지고 깨치는 이들은 한 둘이 아니다.


    그런데 인문학적 정신과 그 사명이 죽는다고?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하거나 안 팔려서 죽는 게 아니라? 문제를 바로 보자. 책은 너무 많이 팔린다. (주로 스페인과 견주며 지적하는) 독서율의 문제가 아니다. 사사키가 견준 시대와 비교해보자. 파는 것에만 현혹된 일부 비양심적인 저자나 학자나, 그런 걸 조종하는 이익의 항간에 간판처럼 내걸리는 게 저 종말론과 뭐가 다른가. 안 팔린다고 말하라. 죽었다고 하지 말고. 가증스러운 표현이다. 전혀 죽지 않았다. 위대한 정신은 반드시 남는다. 심지어 할리우드 맛이 가득한 영화 <투모로우>에도 이런 장면이 나온다. 한 도서관 사서는 인류가 멸망해도 가져가야 한다는 책으로 니체를 꼽는다. 남자 주인공이 그를 두고 니체의 병증을 지적하는 대목은 웃기기까지 하다. 나치 이후에도 우리는 정신이 살아남은 걸 봤다. 무려 ‘나치’ 이후에도.


    사사키의 말을 빌린다. 나머지 부분은 거의 농담 수준이다. “문학, 이것은 은총입니다. 기적입니다. 흔해빠진, 몇 번이고 반복되어온, 그러나 한없는 쇠퇴를 빠져나온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꽃, 빛나는 섬광, 한순간의 기적인 것입니다.”(2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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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숫자의 장난이 지겨웠는지 블랑쇼를 불러온다. 그와의 조우가 다시 밀려온다. 『야전과 영원』에서 라캉의 지독한 답답함을 환기시킬 첫 번째 타자로 창문을 열어준 그다. “나는 죽을 능력을 갖고 있는가?”(사사키 씀, 안천 옮김, 『야전과 영원』, 229쪽)라고 질문한 블랑쇼는 죽음이야말로 끝까지 마무리할 수 없는, 미완료인 것이라 단언한다. 죽기는 하지만 죽지는 못하는 이상하리만치 말이 되는 역설이 종말은 없다는 선언으로 이어진다. 사사키는 일본에서 부정신학으로 절하되는 그를 변호하며 블랑쇼의 선언을 격렬하다고, 또한 근사하다고까지 표현한다.


    통계의 장난이 다시 이어진다. 400만 년이 다시 펼쳐진다. 사사키의 장난대로 379만 년을 양보해도 1만 년이 남는다. 장구하다. 그러니 우리는 의미를 잃는다. 그 장구함 앞에서. 나도 그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의미 잃음]이라고 대문자로 쓸 수 있다면, 그건 나의 문학적 영감과 자주 닿는다. 나약함을 굳이 숨기고 싶진 않다. 솔직함이 답이니까. 나는 목성 보는 걸 좋아한다. 새벽녘 방 안에 불을 끄고 책상 앞에 앉으면 창밖으로 보인다. 두 세 시간 정도 볼 수 있다. 화성이 같이 보이던 때는 한참 지났지만, 그래도 나는 저것과의 거리를 생각한다. 양보해서 1억 정도로 봐도, 1억이면 무한이라 해도 좋다. 1억을 나는 잘 모른다. 아, 나는 무엇인가. 새벽의 독서가 다 뭐냐. 그래도 결국 이렇게 쓰고 있지만. 의미는 수도 없이 회의에 부딪힌다. 신을 믿지 않는 나도 가끔은 구원받고 싶다.


    여기서 소환되는 것이 니체다. 우리는 행해질 뿐이다. 행하는 주체가 아니다. 우리는 일부고, 일부의 의미다. 말을 얻고, 자아내라. 의미를 이뤄라. 미치광이의 명령이 들린다. 밤중에 썼으면 술 냄새 나는 글이라 해도 좋으리라. 하지만, 그렇다. 나는 우주의 일부가 되기 위해 책을 읽는다. 그 의미를 조금은, 조금씩은 알 것도 같다. 나는 우주를 좋아하고 과학책을 즐겨 읽는다. 소위 ‘위키’질과 ‘구글링’은 심심할 때마다 한다. 전투적 과학자들의 비판서도 꾸준히 읽었다. <Edge>의 필진들이 내게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못한다. 그들은 말하겠지. 헛소리라고. 실은 사사키보다 더 독한 말을 하는 이들이다. 하지만 나는 읽고 쓰고 생각하는 인간을 말하고 싶다. 지금은 그런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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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사키는 지극히 현실적인 질문을 받는다. “왜 발표하지 않으면 안 되나요?” 안 그래도 묻고 싶었던 차에 그 스스로가 술회한 것이다. 이건 이런 질문으로 변환 가능하다. “왜 쓰지 않으면 안 되나요?” 다른 예술의 방법도 있다. 왜 조각하지 않으면 안 되나요? 왜 그리지 않으면 안 되나요? 지금은 [문학]을, 그 대문자를 말하고 있으니까. 또한 이 질문에는 씁쓸한 실패의 맛이 한 가득이다. 퇴짜를 맞았다. 베케트도, 비트겐슈타인도, 베버도, 푸코도. 하나같이 출판의 거절을 맛본 이들이다. 사사키도 살짝 털어놓는다. 하지만 답은 곧 나온다. 늘 그랬던 것처럼 단언하며. 중요한 건 과정이라고 한다.


    머리가 나빠 어느 날 밤이었는지는 지금 당장 기억하지 못하지만 앞서 “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라는 말에 나는 공감했었다. 그리고 이건 읽었으니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로 이어진다. 사사키는 왜 글을 쓰는가? 정보와 스스로 차단된 채 숨어 있던 그가 갑자기 일본 사회로 나왔을 때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는 답할 수밖에 없었다. 쓸 수밖에 없었다고. 니체, 푸코, 르장드르, 들뢰즈, 라캉을 읽었으니 써야했다고. 벤슬라마를 언급하는 걸 깜빡한 모양인데, 그밖에도 더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돌아보게 된다. 나는 누가 있었기에 이렇게 쓰는가? 얘기를 들어준다면 그냥 털어놓고 싶은 말인데, 나는 비평이라며 이런 공간에 글을 쓰지만, 아마 나는 비평의 기준에 준한 글을 거의 못 쓰는 사람일 것이다. 이걸 누가 비평이라며 읽을까? 비평의 글은 나를 쓰게 하는 원동력이 전혀 되지 못한다. 마름질할 생각도 없다. 니체의 말을 다시 불러온다. 나는 일부의 의미일 뿐이다. 나는 그 과정을 찾기 위해 피카르트, 칼비노, 페키치, 헤세 등을 거쳐 온 것 같다. 누군가는 대단히 의외라 생각할지도 모르겠으나 그에 앞서 톨킨이 있었고 지금도 나는 그를 가장 먼저 떠올리지만. 여하튼 늘 그들에게 큰 빚을 지고 쓴다는 기분이다. 나의 것은 없다. [나의 것]이라는 대문자의 절대적인 명제가 있다면, 그런 태평함을 가지고 있다면 구태여 뭘 쓸 필요도 없지 않은가. 부재를 알고 여러 번 빌려서 쓴다. 내 글은 하나도 없다. 그저 읽고 쓴다.



*    *    *



    니체는 꿰뚫고 있었다. 미래의 문헌학. 이 부분에서 감응한다. “그 하룻밤, 그 책 한 권, 그 한 줄로 혁명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299쪽) 그것은 천사의 소명이다. 무함마드에게 찾아온 지브릴이며, 동굴에서 첫 발을 밖으로 디딘 무함마드다. 3일 째 밤에 만난 이 사도의 극적인 드라마는 여러 번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문맹이라고 호소했던 그를.


    사사키는 묻는다. 아니, 권한다. 남는 쪽에 배팅하지 않겠냐고. 도박이니까. 역사의 도박장이니까. 기억력 나쁜 나조차도 외워버렸다. 『야전과 영원』에서 처음 만난 ‘도박’이라는 단어는 실은 니체의 것이었다. 그리고 니체는 그런 우리에게 주문한다. 웃으며 도박장으로 들어가라고. 희망의 포커페이스란 말인가? 종말을 말하는 세상 앞에서 담담하게 새로운 밤을 끊임없이 받아들이라고 주문한다. 읽고 쓰고, 그리고 웃어야 한다. 아, 그러고 보니 그 모습은 참으로 미치지 않았는가 말이다.


    이 책의 역자 송태욱 씨가 말미에 달아놓은 글에 사사키를 ‘외계인’에 비유한 구절이 있어 절로 웃었다. 다시 제목을 본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사실 처음에는 손을 잘라도 기도는 남을 텐데, 하며 갸우뚱했었다. 그래서 자꾸만 속으로 ‘두고 보자.’라며 벼르고 있었다. 기대심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끝이 났다. 아니, 그런 말을 하면 또 혼나겠지. 하지만 이렇게 쓰고 있으니, 내가 면할 수 있는 활로가 조금은 있으리라. 그런데 말이다, 이 손을 어떻게 자를까. 무섭다. 무서운 책이다. 이게 널리 읽힐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추호가 끝까지 남을 거라 생각한다. 아직은 손이 떨려 가다듬을 수가 없다. 다섯 개의 밤을 모아놓고 글 하나를 더 써야겠다. 일단 다섯 밤은 지나갔다. 손에 쥐고 있던 구슬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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