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페일레스 > 김중식과 백석의 '방'

식당食堂에 딸린 방房 한 칸

김중식

김중식 - 황금빛 모서리

밤늦게 귀가할 때마다 나는 세상의 끝에 대해
끝까지 간 의지와 끝까지 간 삶과 그 삶의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귀가할 때마다
하루 열여섯 시간의 노동을 하는 어머니의 육체와
동시 상영관 두 군데를 죽치고 돌아온 내 피로의
끝을 보게 된다 돈 한푼 없어 대낮에 귀가할 때면
큰길이 뚫려 있어도 사방이 막다른 골목이다

옐로우 하우스 33호 붉은 벽돌 건물이 바로 집 앞인데
거기보다도 우리집이 더 끝이라는 생각이 든다
거기로 들어가는 사내들보다 우리집으로 들어가는 사내들이
더 허기져 보이고 거기에 진열된 여자들보다 우리집의
여자들이 더 지친 표정을 짓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머니 대신 내가 영계백숙 음식 배달을 나갔을 때
나 보고는 나보다도 수줍음 타는 아가씨는 명순씨氏
홍등紅燈 유리방房 속에 한복 입고 앉은 모습은 마네킹 같고
불란서 인형 같아서 내 색시 해도 괜찮겠다 싶더니만
반바지 입고 소풍 갈 때 보니까 이건 순 어린애에다
쌍꺼풀 수술 자국이 터진 만두 같은 명순씨氏가 지저귀며
유곽 골목을 나서는 발걸음을 보면 밖에 나가서 연애할 때
우린 식당食堂에 딸린 방房 한 칸에 사는 가난뱅이라고
경쾌하게 말 못 하는 내가 더 끝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들은 강원연탄 노조원들이다
내가 말을 걸어본 지 몇 년째 되는 우리 아버지에게
아버님이라 부르고 용돈 탈 때만 말을 거는 어머니에게
어머님이라 부르는 놈들은 나보다도 우리 가정에 대해
가계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다 하루는 놈들이, 일부러
날 보고는 뒤돌아서서 내게 들리는 목소리로, 일부러
대학씩이나 나온 녀석이 놀구 먹구 있다고, 기생충
버러지 같은 놈이라고 상처를 준 적이 있는, 잔인한 놈들
지네들 공장에서 날아오는 연탄 가루 때문에 우리집 빨래가
햇빛 한번 못 쬐고 방구석 선풍기 바람에 말려진다는 걸
모르고, 놀구 먹기 때문에 내 살이 바짝바짝 마른다는 걸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내심 투덜거렸지만 할 말은
어떤 식으로든 다 하고 싸울 일은 투쟁해서 쟁취하는
그들에 비하면 그저 세상에 주눅들어 굽은 어깨
세상에 대한 욕을 독백으로 처리하는 내가 더 끝
절정은 아니고 없는 적敵을 만들어 창槍을 들고 달겨들어야만
긴장이 유지되는 내가 더 고단한 삶의 끝에 있다는 생각

집으로 들어서는 길목은 쓰레기 하치장이어서 여자를
만나고 귀가하는 날이면 그 길이 여동생들의 연애를
얼마나 짜증나게 했는지, 집을 바래다주겠다는 연인의
호의를 어떻게 거절했는지, 그래서 그 친구와 어떻게
멀어지게 되었는지 생각하게 된다 눈물을 꾹 참으며
아버지와 오빠의 등뒤에서 스타킹을 걷어올려야 하고
이불 속에서 뒤척이며 속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여동생들을
생각하게 된다 보름 전쯤 식구들 가슴 위로 쥐가 돌아다녔고
모두 깨어 밤새도록 장롱을 들어내고 벽지를 찢어발기며
쥐를 잡을 때 밖에 나가서 울고 들어온 막내의 울분에 대해
울음으로써 세상을 견뎌내고야 마는 여자들의 인내에 대해
단칸방에 살면서 근친상간 한번 없는 안동김가安東金哥의 저력에 대해
아침녘 밥손님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제각기 직장으로
공원公園으로 술집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탈출의 나날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귀가할 때 혹 지인知人이라도 방문해 있으면
난 막다른 골목 담을 넘어 넘고넘어 멀리까지 귀양 떠난다

큰 도로로 나가면 철로가 있고 내가 사랑하는 기차가
있다 가끔씩 그 철로의 끝에서 다른 끝까지 처연하게
걸어다니는데 철로의 양끝은 흙 속에서 묻혀 있다 길의
무덤을 나는 사랑한다 항구에서 창고까지만 이어진
짧은 길의 운명을 나는 사랑하며 화물 트럭과 맞부딪치면
여자처럼 드러눕는 기관차를 나는 사랑하는 것이며
뛰는 사람보다 더디게 걷는 기차를 나는 사랑한다
나를 닮아 있거나 내가 닮아 있는 힘 약한 사물을 나는
사랑한다 철로의 무덤 너머엔 사랑하는 서해西海가 있고
더 멀리 가면 중국中國이 있고 더더 멀리 가면 인도印度와
유럽과 태평양과 속초가 있어 더더더 멀리 가면
우리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세상의 끝에 있는 집
내가 무수히 떠났으되 결국은 돌아오게 된, 눈물겨운.


- 김중식, 『황금빛 모서리』, 문학과지성사, 1993, 16-21.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

백석白石

백석 지음, 이숭원 주해 - 원본 백석 시집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샅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우에 뜻 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디두 않구 자리에 누어서、
머리에 손깍지 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 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턴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높은 것이 있어서、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한탄이며、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 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무릎을 꿀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 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학풍』창간호(1948. 10.)에 발표. 편집 후기에는 백석의 시집을 발간할 예정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1. 바람 세인 - 바람이 세게 부는.
2. 샅 - 삿자리. 갈대를 엮어서 만든 자리. 왕골로 짠 돗자리보다 거칠다.
3. 쥔을 붙이었다 - 주인집에 붙어사는 생활을 했다.
4. 누긋한 - 메마르지 않고 눅눅한.
5. 딜옹배기 - 질흙으로 만든 옹자배기.
6. 북덕불 - 북데기(짚이나 풀, 나무 부스러기 등이 함부로 뒤섞여 엉클어진 뭉텅이)로 피운 불.
7. 쌔김질 - 새김질. 반추.
8. 나줏손 - 저녁 무렵.
9. 바우 섶 - 바위 옆.
10. 갈매나무 - 갈매나뭇과의 낙엽 활엽 관목. 높이는 2~5미터이며, 가지에 가시가 있다. 이 시에서는 시적 화자의 외로움과 상실감을 이겨내게 하는 상징적 사물로 등장한다.

- 백석 지음, 이숭원 주해, 『원본 백석 시집』, 깊은샘, 2006, 210-212.



  오늘도 '시 vs 시詩對詩'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가 아니라……. -_-; 요즘 『원본 백석 시집』을 비타민 먹듯이 매일 매일 읽다 보니 백석 시인의 시를 상대적으로 많이 소개하게 되네요. 다들 아실 법한 두 편의 시입니다. 그 중에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은, 교과서에 실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언어영역 문제집에 자주 나오는 시입니다. 이번에 과외에서 했던 문제집(좋은책에서 나온 '신사고 언어특강 오감도 시문학편'입니다. 수험생들에겐 매우 추천할 만한 시문학 문제집이에요. 그렇다고 제가 좋은책 알바는 아니고 -_-;)에도 나왔드랬죠. 학생들이 이런 시를 문제집에서만 접한다는 게 참 아쉽습니다. 김중식 시인의 「식당에 딸린 방 한 칸」은 내용상 나오기가 좀 힘들 것 같군요. -ㅅ- 인터넷에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을 찾아보면 마음대로 연을 나누거나 띄어쓰기, 맞춤법을 고친 게 많은데, 저는 그런 행태가 몹시 못마땅합니다. 그 당시 표기법이 안정돼 있지 않기도 했지만, 백석 시인은 시의 운율과 호흡을 살리기 위해 당시의 표기법을 무시한 흔적이 보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얘기할 기회가 있겠죠. 이번에는 두 편의 시에 대해 얘기하고 싶습니다.

  먼저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이라는 제목 말인데요. 과연 이 제목이 무슨 뜻일까요? 그건 바로 편지봉투에 적힌 주소입니다. '남南신의주'의 '버드나뭇골(유동)'에 사는 목수 '박시봉'이란 사람의 '집(방)' 말이죠. 이렇게 발신인의 주소를 제목으로 썼는데, 이 편지를 받는 사람은 결국 화자 자신입니다. 「식당에 딸린 방 한 칸」의 화자가 "무수히 떠났으되 결국은 돌아오게 된" 것처럼 말이죠.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화자는, 여러 가지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눈을 껌뻑거리며 되새김질합니다. 그러다보니 거기에 "눌리어" 죽고 싶은 생각이 들지만,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저는 이 대목이 미친듯이 좋습니다. 정말).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저녁 때가 되어 창밖으로 싸락눈이 내립니다.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화자는, 싸락눈의 "쌀랑쌀랑"하는 소리를 들으며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합니다.

  「식당에 딸린 방 한 칸」의 화자는 인천 숭의동의 속칭 '옐로우 하우스'라는 사창가 근처에 있는 "식당에 딸린 방 한 칸"에 삽니다. "대학씩이나 나"왔지만 직업이 없어 "동시 상영관 두 군데를 죽치고", 어머니에게는 "용돈 탈 때만 말을" 겁니다. "세상에 주눅들어 굽은 어깨"를 하고 동네 사람들에게 놀고 먹는다고 욕을 듣지만 정작 그가 해야 할 "세상에 대한 욕"은 "독백으로 처리"합니다. 거기다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여 지금 발 디딘 곳이 "끝"이라 생각하는 화자는 그 끝, "막다른 골목 담을 넘어 넘고넘어" "서해"를 지나 "중국"을 거쳐 "인도와 유럽과 태평양과 속초"를 지나지만 결국 "무수히 떠났으되 결국은 돌아오게 된, 눈물겨운" "세상에 끝에 있는 집"으로 돌아옵니다.

  두 시 모두 이야기의 전개 양상이 비슷합니다. 점점 더, 점점 더 끝에 몰리게 되지만 끝내는 다시 그 '방'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지요.

  평론가 강상희는 『황금빛 모서리』 해설의 부제를 "따뜻한 비관주의자를 이해하기 위하여"라고 붙였는데, 저는 이 표현이 적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땅 위의 삶에서 '탈출'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나가면, 온 세상 사람들을 다 만나"겠지만, 그렇다고 우주로 가는 건 아니죠. 다 만나고 "오겠네". 네, 돌아와야 합니다. 그래서 더욱 「식당에 딸린 방 한 칸」의 화자는 비관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릅니다. 사적인 얘기지만 저 역시 경기 파주시의 속칭 '용주골'이라는 사창가 근처에 있는 '연립주택 일층'에 삽니다. 물론 우리 가족이 소유한 집은 아니지요. "집으로 들어서는 길목"이 "쓰레기 하치장"인 것도 아니고, "보름 전쯤 식구들 가슴 위로 쥐가 돌아다"닌 것도 아니지만 비관하는 화자의 입장에 공감하게 되는 건 왜일까요. 저도 어릴 때 "귀가할 때 혹" '빚쟁이'"라도 방문해 있으면" "막다른 골목 담을 넘어 넘고넘어 멀리까지 귀양 떠"나고 싶었습니다(웃음).

  허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의 화자는 「식당에 딸린 방 한 칸」의 화자와 달리 그 모든 '비관'을 되새김질합니다. 그래서 그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게 되지요. 어찌 보면 이 시의 화자를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더 크고, 높은 것" 앞에서 체념하는, 운명에 순응하는 인간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달리 보고 싶습니다. 외로움만 남은 화자는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위 옆에 따로 외로이 서서",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를 생각하니까요. 저는 화자가 갈매나무를 생각하면서 "굳고 정"하게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이런 바람은 제 자신에게 던지는 것이기도 하겠죠.

  심정적으로는 「식당에 딸린 방 한 칸」의 화자에 공감하게 되지만 저는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의 화자처럼 살고 싶습니다. '따뜻한 낙관주의자'가 되고 싶다는 말이죠(웃음). 그럼 오늘의 '시 vs 시詩對詩'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왠지 일요일 느지막히 일어나 TV를 켜면 나오는 영화 프로그램의 '영화 대 영화'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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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6-09-28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무수히 떠났으되 결국은 돌아오게 된, 눈물겨운> 삶의 끝에서도 결국은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삶이 되었으면 합니다. 페일레스님의 "따뜻한 낙관주의자"라는 말이 참 기억에 남네요.

페일레스 2006-09-28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멘트도 남겨주시고, 감사합니다. 잉크냄새님도 같이 갈매나무를 생각하는 건 어떨까요? ^^

2006-10-02 14: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잉크냄새 2006-10-12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 너무 늦어서 오히려 제가 죄송하고 미안한 마음입니다. 항상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