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넘어가세요"
인도여행의 마지막 도시인 바라나시에서 다소 걱정이 되었던 것은 인도-네팔 국경을 넘는 문제였다. 섬나라나 마찬가지인 우리 실정에 걸어서 국경을 넘어야한다는 것, 국경에서 비자를 받는다는 것이 다소 생소한 일이었다. 여행 책자와 여행자 정보를 통하여 충분히 숙지하였지만 시간이 다가올수록 사족처럼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바라나시-고락뿌르의 인도 마지막 기차에서 팔일동안 머물던 게스트하우스의 친구들이 건네준 비닐을 열었다. 샌드위치 하나, 바나나 하나, 그리고 삶은 계란 몇개. 계란을 까는 날 물끄러미 쳐다보는 인도인들을 바라보니 '아, 이 사람들의 호기심 가득한 눈길도 이제는 마지막이구나' 하는 생각에 괜시리 슬퍼졌다. 고락뿌르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세시간을 달려 도착한 국경도시 소나울리는 여느 도시와 다를바없이 혼잡하였다. 멀리 국경처럼 보이는 아치형의 석조형 문이 보이고 그 가운데로 난 큰길을 따라 사람과 소와 차량이 뒤엉켜 흡사 시장터을 걷는듯한 느낌이 든다. 국경을 넘는 현지인들에 휩싸여 걷다보니 이런, 출국신고도 하지 않고 국경을 넘어버렸다. 여권검사도 하지 않는 국경이라니 당혹스런 일이다. 총을 멘 네팔군인에게 다소 걱정스러운 얼굴로 "출국신고를 안하고 넘어왔는데 어쩌지?" 하고 물으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다시 넘어가"라고 한다. 다시 인도 국경을 넘어 한참을 헤매니 아무런 표시도 되어있지 않은 길가 작은 건물에 책상 두개를 펼쳐놓고 출국신고를 받고 있다. 두눈 부릅뜨고 찾지 않으면 힘들겁니다. 라고 웃으며 말하던 어느 여행자의 말이 생각나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다시 국경을 넘는 길, 여전히 여권을 요구하지 않는 군인을 물끄러미 쳐다보니 인도인 특유의 환한 웃음을 짓는다. 여권검사 대신 가벼운 눈웃음과 손짓으로 대신하며 국경을 넘었다. 두 다리를 인도-네팔 국경에 걸치고 한참을 서 있었다. 인간이 인위적으로 지도상에 그어버린 하나의 선이 인간의 행동양식과 의식을 규정한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수 없다. 땅바닥의 보이지 않는 국경을 발바닥으로 쓱쓱 문질러 지우며 문득 존레논의 IMAGINE을 커다란 확성기로 틀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도-네팔 소나울리 국경>
소나울리 국경을 넘어 네팔로 들어오는 여행자에게 가장 큰 환희는 아마도 술이 아닐까 싶다. 술이 금지된 인도와 달리 작은 식당의 메뉴판에 즐비한 술 이름을 보니 친한 친구라도 만난듯 반갑기 그지 없다. 룸비니 성역지구 정문의 음식점에서 술 한잔을 마시고 나오니 어느덧 달이 중천에 떴다. 성역지구내에 위치한 한국절 대성석가사는 커다란 호수를 끼고 돌다 숲으로 난 길을 따라 한참을 들어간다. 달빛을 받은 언덕길은 마치 소금밭을 걷는듯 싶고 살며시 피어오르기 시작한 호수가의 안개는 꿈길을 걷는듯 몽환스러운 분위기이다. 허생원이 메밀밭을 바라보며 걷던 길이 이러하리라 싶어 불콰해진 얼굴로 김광석 노래도 몇자락 부르고 기억이 가물가물한 시도 몇자락 읊으니 풀벌레는 구경이라도 난듯 노래를 멈추고 선잠이 깬 새와 들짐승이 다음 가사를 이어받아 줄기차게 울어댄다. 달빛조차 희미한 숲길로 접어들어 한참을 걸어 대성석가사에 도착하니 현지인 스님이 반가이 맞이한다. 숙박명부에 인적사항을 기재하고 스님을 따라 방으로 가는 길에 주의사항이 붙어있다. "밤에 절대 혼자 나가지 마세요. 늑대,쟈칼,들개,독사,독충 주의" 아, 머릿카락이 쭈뼛하고 일어섰다. 술기운에 흥에 겨워 노래하며 발걸음도 가벼이 걸어온 길이 저리 무서운 길이었구나. 다음날 밤 미리 정한 약속으로 어찌할수 없이 그 길을 다시 걸어야만 했을때 내 손에는 푸르게 날선 맥가이버 칼이 달빛에 반짝이고 있었고 그 흥겨운 기분은 온데간데 없고 등줄기를 타고 흐르던 서늘한 기운만이 느껴지고 있었다.
<아름답고도 섬찟했던 숲길>
룸비니는 부처님이 태어나신 곳이라 세계의 절이 각 나라의 특색을 보여주며 자리하고 있다. 소림사 영화에서나 본듯한 붉은 색의 중국절, 색채나 외양이 화려하기 이를데없는 동남아시아의 절들, 가장 큰 규모로 짓기 시작한 독일절. 자전거로 그곳을 돌며 본 절만도 열개는 된듯 싶다. 하지만 한국절 대성석가사가 유독 기억에 남는 것은 나의 나라임도 아니고 절의 외양에도 있지 않다. 한국절을 제외하고는 여행자는 물론 현지인, 심지어 성지순례를 하는 불자들도 외면당한다고 한다. 그들만의 리그라고나 할까. 한국절의 아침공양 시간은 다국적 다인종의 사람들이 모여 식사를 하고 설겆이를 하는 풍경을 연출한다. 그에 비해 다른 절의 화려한 담장과 번쩍이는 탑은 중생을 외면한 겉치레에 불과하다는 씁쓸한 생각이 든다. 중생속에 서지 않은 종교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속에 천년 세월 가부좌를 틀고 앉은 부처가 머리를 돌릴 일이 아닐까. 어느 종교든 선지자의 아름다운 뜻은 세월에 빛바래 왜곡되고 자의로 해석되어지나보다. 회색의 단촐한 빛깔로 물든 대성석가사의 중앙에 대웅전이 올라가고 있다. 대규모 지원을 통한 것이 아니라 사월초파일 한국에서 연등의례로 모아진 지원금만으로 매년 조금씩 올리고 있다고 한다. 매일 아침 어김없이 부처의 품안에서 단잠에 빠졌던 한무리의 사람들이 대웅전에 합장하고 길을 나선다. 여행이 끝나면 연등이라도 하나 달아야겠다.
<룸비니 성역지구의 성스런 나무>
여행을 하다보면 유독 유명인의 발자취를 찾아보려는 여행객들이 있다. 류시화, 한비야..그외 유명한 여행작가들의 글을 찾으려 방명록을 열심히 뒤적이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보통 그 페이지는 찢겨져 누군가의 소유가 된다고 한다. 아침 공양을 끝내고 나오니 뒷짐을 지고 대웅전 앞을 깊은 사색에 잠겨 왔다갔다 하는 낯익은 이가 보였다. 어디서 만난듯한 얼굴이다 싶어 한참을 생각하니 오, 만화가 허영만 화백이다. 반가이 다가가 혹시 허영만 화백이 아닌지 물으니 모르는 사람이라 한다. 흐흐 내 나이 또래에 그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있겠는가. 다시금 그의 초기작 무당거미와 아프팔트 사나이, 그리고 최근의 식객까지 언급하며 낯이 뜨거울 정도로 허영만 화백을 칭찬하는데도 얼굴빛 하나 바뀌지 않고 요지부동이다. 역시 고수구나 싶고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은 공인으로서의 그의 입장이 이해되기에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 다만 나중에 그의 작품을 꼭 읽어보라는 말만 하고 돌아섰다. 다음날 아침, 그곳을 떠날때도 그는 대웅전 앞을 서성거렸다. "선생님, 전 이제 떠납니다"라고 크게 외치니 절 정문까지 걸어와 여행 잘 마치라며 악수를 청한다. 다시 한번 그의 정체를 캐물을까 하다 그만두었다. 그냥 슬며시 웃으니 그도 머쓱하게 웃음짓는다. 네팔을 떠나기전 카트만두의 숙소에서 그를 다시 보았다. 숙소의 정원에서 떠들썩하게 떠드는 우리들과 달리 그는 이층방 넓은 창가에 홀로 서서 카트만두 시내를 하염없이 응시하다 떠났다. 공인으로서의 삶은 어쩌면 참 외로운 것인가 보다.
<룸비니의 네팔 여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