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람싸드야헤"
마트 트웨인이 "역사보다, 전통보다, 전설보다 오래된 도시"라 언급했던 도시인 바라나시는 평범한 여행객이 느끼기에도 그 대문호의 말이 전혀 허상이 아님을 알수 있다. 신성한 갠지스강, 목욕 의식을 치르는 인도인, 골목을 지나는 장례 행렬, 화장터의 불타는 시신, 저녁마다 펼쳐지던 뿌자 의식, 아침 강을 물들이던 해돋이, 저녁 강을 별처럼 수놓으며 떠내려가던 디아. 어느것 하나 신성하지 않은 것이 없다. 화장터로 유명한 마니까르니까 가트의 골목길을 걷다보면 "람람싸드야헤"를 외며 지나가는 수많은 장례 행렬을 만나게 된다. 천으로 둘둘 말린 시신을 메고 지나가는 장례 행렬 뒤로 상주인듯한 사람들이 따라간다. 자주 들르던 블루라씨 가게의 앞골목은 그 장례 행렬이 지나가던 자리이다. 며칠째 가게 의자에 앉아 그 의식을 바라보다보면 죽음에 대한 그들의 의식이 내가 생각하는 삶과 죽음의 이미지와는 서로 다름에 적잖이 놀라게 된다. 화장터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그 곳을 휩싸던 분위기는 슬픔이라기보다는 비장함과 엄숙함이다. 흐느낌 하나 들리지 않던 행렬과 화장터의 분위기는 이것이 그들의 종교관이고 내세관인가 싶다가도 죽음이 무엇보다 커다란 슬픔으로 각인된 나의 의식과는 어울리지 못하고 항상 겉돌곤 한다. 그날도 가게 의자에 앉아 골목을 쳐다보고 있었다. 다소 초라한 천으로 싸여진 시신이 지나가고 그 뒤를 남루한 차림의 청년이 홀로 뒤따른다. 우연히도 그 가날픈 청년과 눈이 마주친 순간,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버릴것 같은 눈망울. 그건 슬픔이다. 그동안 어색하게 느낀 비장함과 엄숙함이 아닌 슬픔이다. 얼른 골목으로 내려가 바라본 그 남루한 청년의 뒷모습에서 어깨가 다소 떨린다고 느낀 것은 환영일까. 그의 가슴과 내 가슴이 부딪히는 소리가 골목에 퍼지는 듯 싶고 눈망울이 흔들려 입술을 깨물었다.  



<바라나시 일출>

바라나시에는 두개의 화장터가 있다. 전통 화장터인 마니까르니까 가트와 전기 화장터인 하리시찬드라 가트이다. 하리시찬드라 가트는 갠지스강의 환경을 보호하고자 설치한 전기 화장터이지만 실제로는 그곳에서도 전통 화장법이 치뤄진다. 내가 전통 화장터보다 이곳을 주로 찾은 것은 자릿세와 장작비를 요구하는 협잡꾼과 사기꾼이 귀찮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오랜 세월동안 검게 그을려진 가트의 건물과 지체 높은 상주들에게서 느껴지던 비장함과 엄숙함이 어깨를 눌러 불편해서이다. 가트에 걸터앉아 하나의 육신이 온전히 소멸하는 것을 지켜본다. 4시간, 평생을 부딪히며 살아온 육신이 완전히 소멸하는데 4시간이 걸린다. 삶은 이토록 허망한 것인가. 재와 더불어 육신은 땅으로, 연기와 더불어 영혼은 하늘로, 마지막 타다 남은 심장이 갠지스 강으로,  그리하여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간다. 인생처럼 복잡한 골목을 빠져나온 시신이 화장터에 이르면 상주들은 갠지스 강물을 손으로 떠서 시신의 얼굴을 적신다. 그들이 갠지스 강에서 목욕을 하는 이유가 현생의 죄를 씻기 위함이듯 마지막 떠나는 길에 그 죄를 사함인걸까. 장작더미에 올려진 시신에 불이 붙고 조금씩 타들어가기 시작한 화장 의식은 심장만이 남을때까지 계속 된다. 불이 사그러들기 시작한 시신을 수습하여 한주먹 정도 크기의 심장을 갠지스 강에 던짐으로써 어머니께 돌려보낸다. 마지막으로 흙으로 만들어진 붉은색 토기에 갠지스 강물을 담아 오른쪽 어깨에 얹은 상주가 강을 등지고 맨발로 걸어 그 토기를 깨뜨리는 것을 끝으로 장례의식은 끝난다. 그들이 그토록 갠지스 강가에서의 화장을 염원하는 것은 영원히 다시 태어나지 않기 위함이라 한다. 그들은 아마 고통스러웠던 현생의 삶으로 돌아올 일은 없을 것이다. 또 다른 시신에 불이 붙기 시작한다.  



<갠지스 강에서 목욕하는 인도인들>

다소 쑥스러운 이야기지만 내 기억속에 남아있는 가장 평화로운 풍경중 하나는 빨래의 풍경이다. 20대 후반 기숙사 시절, 베란다에 널은 빨래의 펄럭임과 그 펄럭임이 만들어내던 그림자의 어른거림과 얼굴을 어루만지는 그림자의 손짓으로 낮잠을 깨던 어느 봄날의 풍경은 오래도록 가슴에 각인되어있다. 그리하여 언젠가 누군가 보여준 인도 골목의 풍경에서도 내 가슴을 잡아끈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골목을 가로지르던 빨래의 펄럭임이었다. 인도 여행중 막힐듯 열리고 가까운듯 멀어지는 아득한 골목길을 홀로 헤맨 것도 그 풍경을 보고 싶어서였는데 실상 그 풍경은 쉽사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 그리운 풍경을 바라나시 가트에서 만났다. 속칭 빨래가트라 내가 이름지은 그곳은 강가의 넙적한 돌에 빨래를 휘둘러치는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고 가트 가득 바닥에 널린 형형색색의 빨래가 뜨거운 태양 아래 잘 마르고 있다. 낯설은 목욕의식, 엄숙한 화장의식, 저녁의 뿌자의식, 얼굴 가득 물감을 칠한 사제들로 뭔가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분위기가 감돌던 강가를 현실을 부딪히며 살아가는 모습으로 덧칠하는 듯한 빨래가트의 풍경은 왠지 동질감이 느껴져 아늑하다. 아무런 어색함없이 오래도록 그 풍경속에 서 있을수 있었다.  



<가트에 가득 널린 빨래 -  사실 청바지는 내가 직접 빨았다. 왠지 갠지스 강물로 세탁한다는 건 솔직히 좀 그랬다>

저녁 나절 바라나시 하늘을 가득 메우던 연을 뒤로 하고 가트로 나가면 강가 여신에게 바치는 제사 의식인 아르띠 뿌자 의식을 만나게 된다. 다샤스와메드 가트에서 매일 펼쳐지는 힌두교 뿌자 의식은 주로 5~7명의 브라만 사제에 의해 거행되는데 지금은 주로 힌두교를 전공한 대학생들로 거행된다. 어둠이 살며시 내려앉기 시작하면 본격적으로 의식이 진행되는데 낯설은 힌두음악과 불의 의식은 신성하다 못해 몽환적이어서 그 의식의 리듬에 몸이 절로 따라가는 듯 하다. 소리와 불의 축제라고 할까. 사제들이 각양각색의 모습을 갖춘 용기에 불을 담아 음악에 맞춰 한 바퀴의 의식을 끝낼때마다 나도 합장을 해본다. 가트에는 인도인들이 가득 자리하고 갠지스 강에는 뿌자의식을 보려는 관광객들이 탄 나룻배로 가득하여 장관을 이룬다. 가트의 인도인들 틈에서, 흔들리는 나룻배 위에서 매일 같이 그 의식을 보았다. 종교와 신앙이 내재화된 곳은 그곳이 어디든, 종교가 무엇이든 그들의 염원이 나에게도 스며들곤 한다. 의식이 끝나고 어둠이 내린 갠지스 강을 나룻배를 저어가면 저 멀리서부터 강 위에 디아의 불꽃이 강을 밝힌다. 그들의 염원이 담긴 디아를 같이 띄우면 그들의 염원이 당신께 이루고 당신의 사랑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빌어본다.   



<뿌자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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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9-07-12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 이상하지 않습니까? 저 강물에 빨래를 해도 저리 깨끗이 빨래를 하는 거 보면...
사진이라 그런가요? 볼 때마다 미스테리란 생각을 해요.

잉크냄새 2009-07-12 20:02   좋아요 0 | URL
근데 갠지스강은 생각보다 지저분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더군요. 아무래도 공업용수가 유입되지 않으니 강의 정화작용이 큰 문제가 없는듯 합니다.

2009-07-12 20: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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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13 06: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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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13 18: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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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13 20: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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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13 12: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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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13 19: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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