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치지 못한 편지가 딱 하나 있다. 주소도 적혀있지 않고 우표도 붙어있지 않은, 아예 처음부터 우체국을 통해 전해질 운명이 아닌 그런 편지이다. 내가 직접 전해주기 위해 지갑속에서 근 반년을 보내다 결국은 자신의 본분을 잊은 편지이다.

고등학교 시절, 옆 여학교의 한 여학생을 짝사랑할때 쓴 편지이다. 이런 저런 책들을 총동원해 머리를 쥐어짠 흔적이 아직도 진하게 남아있다. 그 당시 대히트를 기록한 홀로서기의 창백한 소녀가 그려진 편지지와 봉투에 심혈을 기울여 쓴 글씨체, 아마 숱하게 썼다가 찢지 않았을까 싶다. 특히나 조르쥬 무스타키의 방랑한 음성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 구절을 보면 뭐랄까, 그냥 웃음이 나온다. 아직도 조르쥬 무스타키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편지 한켠에는 가을 낙엽마냥 방랑한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 시절 왜 그리 수줍고 용기가 없었던가! 결국은 대학진학과 함께 고향을 떠나면서 지갑이 아닌 상자에 담겨 어느날 문득 꺼내보는 추억으로 남겨지고 말았다.

지금도 그 시절 친구들을 만나면 그 여학생에 대하여 묻곤 한다. 지금은 아기엄마가 되어있을 그녀이지만 우리 친구들의 가슴속에는 어리석은 친구 한놈이 열렬히 짝사랑한 여고생으로 영원히 기억되는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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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4-02-17 1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홀로서기의 창백한 소녀가 그려진...책받침, 편지지, 액자, 엽서 아하하하...저도 생각납니다..지금도 고향집에 가서 뒤적뒤적 해 보면 나올겁니다...아마... 근데...조르쥬 무스타기의 음성이 그렇게 멋진가요? 허허 수소문 해봐야 겠는걸요...

그래도...님은 그떄 그...부치지 못한 편지를 지금도 가끔 꺼내 보시는가 봅니다...
멋지시네요...

잉크냄새 2004-02-18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때 당시의 홀로서기 소녀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죠. 서정윤의 홀로서기의 싯귀와 함께 실린 여리디 여린 소녀의 얼굴은 순수함 그 자체였으니까요...^^; 그리고 또 하나가 유안진의 '지란지교를 꿈꾸며'의 글귀들. '저녁을 먹고~' 로 시작하는 글을 거의 외우다시피 했었는데...
그냥 지나간 것은 아름답다는 명제하에 가끔 옛추억이 생각나며 뒤적이곤 한답니다.

paviana 2004-02-18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 저도 생각납니다..비슷한 기억을 공유한다는 것은 참 좋네요...
무스타키의 <고독>이 갑자기 듣고 싶어지네요..<라 솔리튀드>불어를 몰라서 맞는지 모르겠네요..

젊은느티나무 2004-02-23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 이사하면서 커다란 상자에 담겨진 편지들을 다 꺼내서 읽어봤거든요... 제 소심한 성격탓인지.. 써놓고도 붙이지 못한 편지가 엄청나게 많더라구요.... 물론 제가 엄청나게 편지를 써댔기때문에 붙인 편지는 붙이지 못한 편지의 10배는 될테지만요.. 붙이지 못한 편지를 보니 부끄럽더라구요..... 얼른 버려야겠어요...

잉크냄새 2004-02-23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그 편지를 받을 누군가가 있다면 버리지 마시고, ' 너무 늦지 않았지?'라고 봉투에 쓰신 후에 한번 붙여보심이 어떨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