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넘 숲
엘리너 캐턴 지음, 권진아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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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스티븐 킹과 버락 오바마가 추천한 소설 <버넘 숲>. 『루미너리스』로 최연소 부커상을 수상한 엘리너 캐턴 작가가 10년 만에 발표한 장편소설이라 반갑습니다.


이 소설은 테크 스릴러(Tech Thriller) 장르입니다. 첨단 기술과 스릴러 요소가 결합된 장르를 의미합니다. 첨단 과학기술, IT, 인공지능, 해킹, 생명공학, 감시 시스템 등 현대 또는 근미래의 기술적 배경을 더해 이야기를 전개하는 겁니다.


유전자 공학과 생명공학을 활용한 마이클 크라이튼의 『쥬라기 공원』, 해커와 가상현실이 등장하는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 같은 소설처럼요. 현실적인 기술적 디테일과 정치 경제적 요소가 결합되어 보다 사실적인 느낌을 주는 장르여서 저도 좋아합니다.





엘리너 캐턴의 <버넘 숲>은 자본과 계급, 환경과 테크놀로지, 신념과 현실이 충돌하는 현대 사회를 해부하는 작품입니다. 소설의 무대는 뉴질랜드. 버려진 땅에서 게릴라 가드닝(Guerrilla Gardening: 타인의 땅이나 방치된 공공부지에 식물을 심는 행위)을 실천하는 단체 '버넘 숲'의 구성원들과, 글로벌 드론 제조업체의 CEO이자 억만장자인 로버트 르모인이 모종의 사건으로 엮이며 펼쳐지는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제목 <버넘 숲>은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에서 중요한 소재인 '버넘 숲'에서 따왔습니다. 맥베스에게 '버넘 숲이 움직이지 않는 한 네가 패배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예언이 내려지지만, 결국 적군이 숲의 나뭇가지를 들고 진군하면서 '움직이는 숲'이 현실이 되고 맥베스는 패배합니다.


이 상징적 제목은 소설 속 게릴라 가드닝 단체의 이름이면서, 동시에 불가능해 보이는 자본주의의 견고한 성벽에 균열을 내는 작은 환경 운동가들의 저항을 암시합니다.


환경 보호와 자립을 꿈꾸는 이상주의적 청년들 vs 모든 것이 돈과 권력으로 움직이는 세계에서 살아온 기업가. 억만장자 로버트 르모인은 자신의 부와 권력이 절대적이라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인물입니다.


불법적인 사업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버넘 숲 단체를 이용하려고 합니다. 경제적 자립이 힘든 버넘 숲의 약점을 파고들어 제대로 된 비영리 기구가 될 수 있도록 돕겠다며 기부를 하겠다고 제안합니다.


그런데 대척점에 있는 '버넘 숲'의 일원들 저마다의 상황이 흥미롭습니다. 모든 캐릭터가 자신만의 모순과 결함, 불안을 안고 있습니다. 리더 미라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때로는 위험한 거래도 마다하지 않는 인물입니다. 단체의 재정 독립 기회를 잡고자 로버트의 제안을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미라의 동거인이자 단체의 일원인 셸리는 '버넘 숲'의 조력자 역할을 5년 가까이 해왔지만 이제는 나가고 싶어합니다. 내면에는 자신의 불완전함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있습니다.


'버넘 숲' 초기 멤버로 활동했다가 떠났던 토니. 미라보다도 더 확고한 신념을 가진 인물입니다. "억만장자 계급은 그 존재만으로 연대를 잠식합니다"라고 말하며, 버넘 숲의 새로운 변화를 변절로 여깁니다. 이 소설에서는 작가가 토니를 선택했습니다. 토니의 입을 통해 순수성, 도덕적 양심, 희생 등의 윤리적 개념을 읊고 있거든요.


재밌는 점은 이 소설이 이상주의자와 자본주의자의 충돌을 극적으로 묘사하면서도, 선과 악의 단순한 대립 구도를 완전히 벗어났다는 데 있습니다. 저마다의 복잡한 모순을 드러내며,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기준을 부수는 순간들이 꽤 많이 등장합니다.


"뭐가 옳은지는 사실 아무도 모르잖아. 내 말은, 뭐가 옳은지 안다고 생각할 수 있고, 안다고 자신에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선택하는 시점에는, 그러니까 그 순간에는 절대 확신하지 못하잖아. 그냥 바랄 뿐이지. 그냥 일단 행동하고 최선의 결과가 나오길 바라는 거지." - p333


작가는 옳은 선택이란 무엇인지, 도덕적 불확실성에 대해 질문을 던집니다. 옳은 일과 그른 일의 경계는 점점 모호해지고, 우리의 선택은 종종 확신보다는 희망에 기반합니다. 소설 속 인물들이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갈팡질팡하는 것처럼요.





'버넘 숲'의 젊은 활동가들은 기성세대가 남긴 환경 문제와 사회적 불평등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세대입니다. 그들의 이상주의와 현실 사이의 갈등은 오늘날 청년들이 경험하는 딜레마를 반영합니다.


작가는 소설 <버넘 숲>에서 자본주의와 환경 위기, 기술 발전과 인간성 상실에 대한 비관적 전망을 보여주면서도, 인간의 작은 저항과 연대가 가져올 수 있는 변화의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완벽하지 않은 인간들, 모순과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선택과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잘 보여줍니다.


테크 스릴러 장르에서 기대하는 특유의 긴장감 넘치는 스토리 전개가 일품입니다. 영화적인 속도감과 생생한 장면 묘사가 재미있습니다.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동시에, 장르적 재미를 놓치지 않는 <버넘 숲>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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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실에서 보낸 3만 시간 - 국가대표 무릎 주치의 김진구 교수의 메디컬 에세이
김진구 지음 / 꿈의지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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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천 건이 넘는 무릎 수술을 집도하는 김진구 교수의 30년 수술실 기록 <수술실에서 보낸 3만 시간>. 의학 다큐멘터리처럼 생생하고, 의학 드라마처럼 감동적입니다.


돈과 명예라는 화려한 왕관보다 앞서는 것은 언제나 사람이라고 말하는 그는 화려한 타이틀 뒤에 숨겨진 의사의 진정한 책임과 부담을 털어놓습니다.


김진구 교수는 '돌팔이'와 같았던 초보 의사 시절에 품었던 마음을 기억하기 위해 돌팔이 일지를 쓰기 시작했다고 고백합니다. 세계 3대 인명사전에 모두 등재된 관절박사가 왜 스스로를 이렇게 부를까요?


'My fingers are all thumbs'(열 손가락이 모두 엄지손가락이라는 뜻)처럼, 그는 의사로서의 첫 발을 내디딜 때 '똥손'이었다고 합니다. 2년 차 전공의도 5분 만에 끝내는 수술을 한두 시간이 넘도록 제대로 하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다리뼈 골절 치료를 위한 금속정 고정을 60개 단계로 세분화하고, 전방십자인대 재건술은 120여 단계의 술기로 나누어 자신만의 수술 족보를 만들었습니다.


거기엔 그가 쌓아온 경험과 실수, 문제점 그리고 해결책들이 빼곡히 적혀 있습니다. "모든 좋은 수술은 모든 실수에 대한 명료한 기억이다"라는 그의 말처럼, 김진구 교수는 실패를 통해 성장했고, 그 과정에서 남다른 전문성을 키워냈습니다.


김진구 교수에게 수술실은 단순한 일터가 아닙니다. 그곳은 고흐의 캔버스, 메시의 그라운드, 베토벤의 악보와 같은 창작의 공간이자 연극 무대입니다. 영어로 수술실을 Operating Theater라고 부르는 이유를 그는 몸소 보여줍니다.





수술 전에 그는 마치 연극 감독처럼 각본을 짜고, 배우들과 함께 예행연습을 합니다. "펠로우, 전공의, 간호사 등……. 그들은 그저 이름 없는 들러리들이 아니다. 집도의의 팀으로서 각자의 역할을 가진,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존재들이다."라며 그의 수술실에서는 팀원 각자가 주인공입니다.


팀원들의 개성을 담은 음악을 그들의 입장송으로 틀어줄 정도입니다. 김진구 교수의 수술실은 팀워크와 편안한 분위기가 만들어집니다. 이런 디테일이 의료진의 사기를 높이고, 환자에게도 좋은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습니다.


김진구 교수의 진료 예약을 하려면 1년 가까이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막상 진료 시간은 고작 1분에 불과합니다. 우리나라 의료 시스템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환자는 더 많은 시간과 관심을 원하지만, 의사는 제한된 시간 안에 많은 환자를 봐야 하는 구조적 모순 속에 있습니다.


그는 '책임은 무겁고 돈은 안 되는 어려운 수술'을 피하려는 의료계의 현실도 지적합니다. 그럼에도 "의사는 어떤 경우에도 환자의 곁에 남아 있어야 한다. 설령 그 환자가 의사를 극도로 혐오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라는 원칙을 고수합니다. 의사라는 직업이 가진 무게, 흰 가운의 의미를 되새기게 합니다.





의사는 신이 아닙니다. 모든 환자를 살릴 수 없고, 모든 수술이 성공할 수도 없습니다. 유망한 선수가 무릎 수술 후 재기에 실패하기도 하고, 고령의 관절염 환자가 사망하기도 합니다. 김진구 교수는 환자를 위해 며칠 밤을 새우기도 했지만, 때로는 "그냥 죽게 놔두지 왜 나를 살렸냐"라는 원망을 듣기도 했습니다.


수술실에 들어갈 때마다 "제 실력이 모자랄 수는 있지만 노력과 정성이 부족하여 우를 범하지는 않겠습니다."라는 짧은 기도를 한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죽고 사는 일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환자가 죽으면 의사의 가슴에 무덤이 남습니다. 의사로서의 한계와 책임 그리고 그 속에서 느끼는 인간적인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냅니다.


김진구 교수는 자신의 청춘을 환자들을 위해 바쳤습니다. 하루에 10건 이상의 수술을 소화하며, 자신의 어깨와 팔꿈치 통증을 감수하고 타인의 무릎 건강을 위해 헌신합니다.


<수술실에서 보낸 3만 시간>에는 스피드 스케이팅 이상화, 여자배구 김연경, 축구 설기현, 안정환 등 국가대표 선수들의 수술 경험도 담고 있습니다. 프로 스포츠 선수들에게 수술은 단순한 치료가 아니라 인생의 전환점이 될 수 있습니다. 성공적인 재활과 복귀는 선수 생명과 직결됩니다.


김진구 교수는 전방십자인대 재건술을 3,000번 넘게 시행한 전문가입니다. 선수들의 특수한 상황과 요구사항을 이해하고 최적의 치료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게다가 수술 후 재활에 성공하면 환자의 의지 덕분이며, 실패하면 의사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마인드가 대단하게 여겨졌습니다. 겸손함과 책임감을 동시에 보여주는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수술실에서 만난 다양한 인생을 풀어놓은 에피소드가 흥미진진합니다. 수술은 정작 수월했지만, 비상하는 용 문신이 틀어지지 않도록 봉합하느라 예술 작품 다루듯 신경써야만 했던 조폭 두목, 무릎기형을 가진 어린 환자, 의학적으로 회복 불능의 사지마비 환자 등 수술실을 찾는 다양한 환자들의 이야기가 담겼습니다.


30년 넘게 의사로 일하면서 쌓아온 노하우와 철학은 전문가의 통찰을 보여주는 <수술실에서 보낸 3만 시간>. 자신만의 수술 노트를 만들고, 환자와 의료진을 위한 수술실 문화를 만들어갔습니다. 단순히 기술적인 측면을 넘어, 의사로서의 정체성과 가치관을 정립해나가는 과정이었습니다.


김진구 교수의 전작 <무릎이 아파요>는 무릎 통증과 치료에 대한 전문지식을 얻을 수 있고, <수술실에서 보낸 3만 시간>은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과 소명의식을 잃지 않고, 환자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는 김진구 교수의 속마음을 들을 수 있는 귀중한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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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 - 거장의 재발견, 윌리엄 해즐릿 국내 첫 에세이집
윌리엄 해즐릿 지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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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가 "강하고 두려움을 모르는 당대 최고의 문장가"라고 극찬했던 인물, 로버트 루이 스티븐슨이 "오늘날 우리는 해즐릿처럼 쓰지 못한다"라며 경의를 표했던 에세이스트, 조지 오웰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영어권 최고의 수필가 윌리엄 해즐릿.


200년 전 영국 최고 지성의 신랄한 통찰, 윌리엄 해즐릿 에세이 선집 3부작 중 첫 번째는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입니다. 이 책에는 표제작이 된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를 비롯해 「죽음의 공포에 관하여」, 「질투에 관하여」,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들에 관하여」, 「학자들의 무지에 관하여」, 「맨주먹 권투」까지 인간 본성과 행동에 관한 에세이를 엄선하여 담았습니다.





낭만주의 시대를 살았던 해즐릿은 셰익스피어를 최고의 반열에 올려놓은 문예비평가이자 탁월한 저널리스트였으며, 평생 소수파로 남아 보수주의를 비판하고 자유와 혁명의 신조를 옹호했던 급진적 이상주의자였습니다. 그의 묘비가 사망 40년 후인 1870년에 사회적 갈등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유로 파괴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파격적인 인물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해즐릿의 목소리가 사후 백 년이 지나서야 버지니아 울프에 의해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아이러니합니다. 버지니아 울프의 '해즐릿론'으로 시작하는 해즐릿 에세이집은 200년이 지났음에도 놀라울 정도로 오늘날의 이야기와 거리감이 없습니다.


해즐릿의 가장 유명한 에세이이자 이 책의 제목이 된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는 인간이 타인의 불행과 실패에서 느끼는 미묘한 즐거움을 냉철하게 분석합니다.


혐오할 게 없으면 생각과 행동의 원천마저 잃어버릴 것 같다. 삐걱거리는 이해관계, 제멋대로인 열정으로 계속 파문을 일으키지 않으면 삶은 고인물이 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사고와 범죄에 관한 신문 기사를 최고의 잡담거리로 삼는다. 불이 나면 온 마을 사람들이 현장으로 달려가 구경한다.


우리는 왜 재난 뉴스에 끌리는지, 왜 타인의 실패담에 귀를 기울이는지, 왜 유명인의 스캔들에 열광하는지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신가요? 해즐릿은 이런 현상이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인간 본성의 근본적인 부분이라고 짚어줍니다.


그는 "감정은 이해보다는 열정과 한편이다. 버크가 말하듯이 옆길에서 공개 처형이 벌어지면 공연 중인 극장도 텅 빌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SNS에서 벌어지는 경악스러운 장면들, 실시간 검색어를 장악하는 논란들, 유튜브의 드라마 콘텐츠가 큰 인기를 끄는 현상은 어쩌면 200년 전 해즐릿이 간파했던 인간 본성의 연장선일지도 모릅니다.





흥미로운 점은 해즐릿이 이러한 혐오의 감정을 단순히 비난만 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오히려 이것이 사회의 역동성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요소라고 봅니다. "사회적 골칫거리가 본질적으로 공익적 요소인 셈이다"라는 그의 말은 갈등과 불만, 비판이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근본적인 이유와 그 두려움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해 탐구하는 「죽음의 공포에 관하여」. 해즐릿은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단순히 끝남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현재의 순간들과 인연들을 놓아야 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고 말합니다. 현대인들이 버킷 리스트를 작성하고 욜로를 외치며 현재의 삶을 최대한 누리려는 모습은 해즐릿이 관찰한 인간 심리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닐까요.


해즐릿은 "죽음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을 없앨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삶에 적절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단순히 "억제할 수 없는 기분과 견디기 괴로운 격정을 만족시키려고 인생의 무대에 머물" 뿐이라면 오히려 "즉시 떠나는 편이 좋을 것"이라고도 말할 정도입니다.


인간관계의 중심에 자리한 질투라는 감정의 근원과 역할에 대해 탐구하는 「질투에 관하여」. 여기서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우리는 죽은 사람들을 질투하지 않는다는 점을 짚어주거든요. 죽은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현실의 이익이나 경쟁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해즐릿은 질투를 단순히 부정적인 감정으로 치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질투가 일종의 가치 판단 시스템으로 작동한다고 봅니다. 진정한 가치와 허식을 구분하는 감정적 메커니즘인 셈입니다.





불쾌함의 심리학을 이야기하는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들에 관하여」가 이어집니다. 왜 어떤 사람들은 첫 만남에서부터 우리의 비위를 거스르는지, 그리고 그런 감정이 어떻게 형성되고 작용하는지 분석합니다.


「학자들의 무지에 관하여」에서는 진정한 지식과 텅 빈 박식함의 차이를 짚어줍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도 의미심장한 글입니다. 인터넷을 통해 무한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게 된 오늘날, 우리는 과연 진정한 이해와 지혜를 획득하고 있는지, 아니면 더 많은 '앵무새'가 되어가고 있는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지막 에세이 「맨주먹 권투」는 당시 영국에서 인기 있던 맨주먹 권투 경기를 두고 펼치는 이야기입니다. 해즐릿은 권투에서 보이는 육체의 한계에 도전하는 인간의 모습이 정신적 용기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묘사합니다.


오늘날 UFC나 복싱 경기, 심지어 리얼리티 쇼까지, 우리는 여전히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극단적 상황을 '구경'하는 것에 열광합니다. 해즐릿은 이러한 현상이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근본적인 측면을 반영한다고 보았을 테지요.


산업혁명이 진행되고, 프랑스 혁명의 여파가 유럽을 뒤흔든 시기에 활동했던 윌리엄 해즐릿. 당시 격변의 시대를 관찰하고 분석하면서,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변하지 않는 인간 본성의 작동 방식을 포착했습니다.


그가 묘사한 질투와 혐오, 죽음에 대한 공포, 지식의 한계에 대한 통찰은 2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시니컬한 톤의 칼럼, 논평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윌리엄 해즐릿 에세이를 읽어보세요.


윌리엄 해즐릿 에세이집은 인간 본성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서이자, 정보의 홍수 속에서 진정한 지혜를 찾는 방법에 대한 안내서이며, 때로는 우리 자신의 불편한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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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씨아저씨네, 차별 없는 과일가게 작고 단단한 마음 시리즈 2
공석진 지음 / 수오서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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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차 과일장수가 들려주는 '차별 없는 과일가게'의 상식적인 혁명 <공씨아저씨네, 차별 없는 과일가게>. '작고 단단한 마음' 시리즈 두 번째로 출간된 이 책은 10년 이상 자신만의 가치를 지켜온 브랜드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흔한 사업 경험담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 과일가게를 운영하며 자본주의와 기후위기의 최전선에서 겪은 고민과 실천 그리고 새로운 가치관을 담아낸 사회적 메시지입니다.


공씨아저씨네의 출발점은 명확했습니다. "일이 추구하는 가치와 삶이 지향하는 방향이 다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평범한 온라인 과일가게로 시작했지만, 공씨아저씨네는 이내 '딸 때 따는 상식적인 과일가게', '다름이 우열이 되지 않는 과일가게', '환경을 생각하는 과일가게'라는 수식어를 얻게 됩니다. 물론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저자는 브랜드가 자신처럼 나이 들어가는 과정에서 본질을 잃지 않는 것이 핵심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공씨아저씨네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이 특별한 과일가게의 철학을 만나보세요.


공씨아저씨는 과일 시장에서 발견한 현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연에서 자란 과일이 획일적인 기준으로 평가받는 모습이 한국 사회의 부조리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양과 크기만으로 과일의 가치를 평가하는 시장 논리는 외모지상주의와 다르지 않습니다. 공씨아저씨네는 이러한 불합리한 관행에 의문을 던지며, 맛의 본질에 집중하는 가게를 만들기로 결심합니다.


처음에 공씨아저씨는 '선비처럼' 장사하고 싶었다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농민의 생계가 자신의 판매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유통인으로서의 책임감을 느끼게 됩니다. 저자는 사업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합니다. 농민과 소비자를 연결하는 가교로서의 역할을 인식한 겁니다. 사회적 책임감은 공씨아저씨네의 운영 방식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브랜딩은 단순히 로고나 디자인을 넘어서, 가치관과 철학을 일관되게 표현하는 과정입니다. 공씨아저씨네는 본질을 지키면서도 시대에 맞게 변화하는 유연함을 보여줍니다. 퀵커머스와 새벽 배송이 당연시되는 요즘, 공씨아저씨네는 '늦장커머스'를 자처합니다. 불편함의 감수가 아니라, 노동자의 삶의 질과 환경을 고려한 의식적인 선택입니다. '초신선 마케팅'을 통한 매출 증대를 위해 농민과 노동자들의 야간 수면권을 사뿐히 뺏어간 그들은 얼마나 더 많은 이익을 얻었을까? 새벽 딸기를 먹은 소비자는 과연 더 건강해지거나 더 행복해졌을까?





빠른 배송을 당연시하는 현대 소비문화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긴 '소금꽃 나무' 은유가 인상 깊었습니다. 한진중공업 노동자 김진숙의 책에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땀으로 흠뻑 젖은 노동자의 옷이 서서히 마르면서 드러나는 하얀 얼룩을 뜻한다고 합니다. 공씨아저씨네는 주 2회 배송이라는 '늦장'을 통해 농민과 노동자의 삶의 질을 지키고자 합니다. '조금 천천히 살아도 괜찮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과일을 판매하는 방식도 특별합니다. 한 과일 품목당 한 농가와만 거래하는 원칙을 고수하기 때문입니다. 농민과의 신뢰 관계를 핵심 가치로 삼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저자는 농가 방문 시 가장 먼저 땅을 살펴본다고 말합니다. 과일의 품질을 판단하는 데 있어 상업적 기준이 아닌, 자연의 기준을 적용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토양의 상태부터 살피는 이러한 접근법은 장기적으로 건강한 과일 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기반이 됩니다.


공씨아저씨네는 소비자를 단순한 구매자가 아닌, 함께 가치를 만들어가는 동지로 여깁니다. 세아유 딸기 수확 체험 프로그램, 정기 구독 프로그램 등을 실험하며 소비자와 생산자 간의 신뢰 구축이 가능해지는 순간을 확인합니다. 소비자들도 점차 공씨아저씨네의 가치에 공감하게 됩니다. '못생긴' 과일도 맛이 좋다면 기꺼이 구매하는 소비자들의 존재는, 상식적인 과일가게를 향한 공씨아저씨의 도전이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온라인 과일가게를 운영하면서 공씨아저씨가 직면한 가장 큰 고민 중 하나는 포장 쓰레기였습니다. 과일을 안전하게 배송하려면 포장재가 필요하지만, 환경 오염으로 이어집니다. '완충재 한 개 덜 넣기'라는 무모한 도전은 공씨아저씨네만의 철학을 보여줍니다. 완전한 해결책은 아니었지만, '무언가라도 해보자'는 실천적 태도가 중요합니다. 환경 문제 앞에서 느끼는 개인의 무력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동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줍니다. 작은 실천의 힘을 믿는 태도는 우리가 배워야 할 점입니다.





과일장수로서 저자는 기후 변화의 직접적인 영향을 체감합니다. 감귤 없는 제주의 모습이 상상되시나요? 이미 감귤류의 재배가 전라도 지역까지 올라온 지 오래라고 합니다. 시설에서 재배하는 만감류는 충청도에서도 수확이 가능합니다. 대한민국의 과일 지도를 완전히 새롭게 개편해야 할 날을 목전에 두고 있다고 합니다. 기후 변화를 추상적 개념이 아닌, 우리의 식탁과 직결된 현실로 인식하게 해주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공씨아저씨네는 명절 전에 아무것도 팔지 않는 '이상한' 가게입니다. 잘 익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수확하는 상식을 지킬 뿐입니다. 명절 특수를 놓치더라도, 제대로 익은 과일을 소비자에게 제공하겠다는 의지는 단순한 사업 전략을 넘어선 삶의 가치관을 반영합니다.


사업과 삶의 가치를 일치시키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영감을 주는 <공씨아저씨네, 차별 없는 과일가게>. 확장보다 지속 가능성을 선택한 1인 기업의 특별한 브랜드 스토리를 만나는 시간입니다. 비즈니스의 성공이 반드시 확장이나 이익 극대화를 의미하지 않으며, 상식과 원칙에 기반한 '작고 단단한' 브랜드가 갖는 힘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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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의 말 - 나를 향해 쓴 글이 당신을 움직이기를
이어령 지음 / 세계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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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한국 현대 지성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 이어령 선생님. 문학, 철학, 언어학, 예술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든 그의 사유는 한 시대를 통찰하는 깊은 혜안을 담고 있습니다.


<이어령의 말>은 그의 오랜 저작들에서 핵심적인 문장을 모아 엮은 어록집입니다. 일명 '이어령 사전'이라고나 할까요. 생을 마감하기까지 끊임없이 사고하고 탐구한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어록집 작업은 이어령 선생님이 작고하기 7년 전부터 구상한, 후대에 남기고 싶은 최후의 기획이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수많은 저작 중에서 정수만을 뽑아 엮고자 했고, 이 작업은 그의 서거 후에도 계속되어 3년에 걸친 작업 끝에 드디어 완성된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앞으로 어록집은 시리즈로 더 출간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어령 선생님은 마음을 '정신의 인덱스'라 말합니다. 그는 마음을 단순한 감정이 아닌 정신의 표상으로 해석합니다. 그의 문장에서 마음은 인간을 움직이는 본질적인 힘이며, 우리가 삶에서 겪는 기쁨과 고통을 초월하여 더 깊은 차원의 깨달음을 줄 수 있는 요소로 등장합니다.


특히 고통과 눈물의 의미를 재해석합니다. "세상은 늘 죽을 만큼 괴로운 것들을 넘어서야만 새로운 세계를 보여줍니다. (...) 내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흘리는 눈물은 비가 그치자 나타난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것입니다."라며 고통은 단순한 장애물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 가는 관문이며, '남을 위해 흘리는 눈물'을 무지개에 비유함으로써, 이타적 감정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어령 선생님은 인간의 정체성과 자아 탐구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는 정의의 상대성을 지적하며 사랑의 절대성을 강조합니다. "정의로움은 입장에 따라 다릅니다. 그런데 사랑에는 입장이라는 게 없습니다. 남쪽의 사랑과 북쪽의 사랑이 따로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정의를 이야기하지 않고 자꾸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인간 존재의 본질을 사랑을 통해 이해하고자 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인생의 흐름을 '결'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생각하고 행동할 때마다 결부터 찾아가세요. 꿈결을 따라 마음의 결, 삶의 결을 따라가면 땅이 보이고 하늘이 보이고 세상이 한결 아름다워질 것입니다."라고 말이죠. 자신의 흐름을 따르는 삶이 중요하다는 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어령 선생님은 문명을 ‘불완전한 인간이 만들어낸 과정’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가 강조하는 점은 공존입니다. "왜 아침은 이렇게도 아름다운가. 아직 그 빛 속에 어둠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저녁노을은 왜 이렇게도 아름다운가. 다가오는 어둠 속에 아직 빛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라는 은유적 표현을 통해 상반되는 가치의 조화로운 공존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만든다는 철학적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통찰도 주목할 만합니다. "온 국민이 다 같이 정보를 공유하고 사는 것.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다. 군주제로부터 시작해서 나치, 공산주의 등 망해버린 나라의 공통 특징은 국민의 눈을 멀게 한 데 있다."라고 말하며 민주주의의 본질을 '정보의 공유'로 정의함으로써, 정보 독점이 권위주의 체제의 핵심 전략임을 지적합니다.


이어령은 일상 속 사물에서 철학적 의미를 찾아냅니다. 그는 연필의 모양에서도 인생을 배웁니다. "구르지 않고 손에 잡기도 편한 것이라면 원과 사각형의 중간, 여섯 모난 연필이 가장 좋습니다. (...) 여섯 모난 연필로 나의 인생을 써가십시오."라고 합니다.


둥근 원은 지나친 순응을, 각진 사각형은 지나친 고집을 의미하는데, 이 두 극단 사이의 균형점인 육각형 연필이 가장 이상적인 삶의 형태라고 합니다. 단순한 사물에서 발견한 중용(中庸)의 지혜로, 현대인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실천적 철학입니다. 이처럼 일상적 사물에서 깊은 의미를 발견하는 이어령 선생님의 시선은 우리에게 평범한 것들을 새롭게 바라보는 방법을 가르쳐줍니다.





언어는 언어학자이자 문학평론가로 활동했던 이어령 선생님의 사유의 핵심입니다. 그는 언어를 통해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고, 그 안에서 철학적 사유를 전개합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 그것은 잠든 것을 일깨운다는 것이며 멀리 있는 것을 가까이에 다가서도록 하는 것이며 침묵하는 것을 말하게 하는 것입니다."라며 언어가 단순한 의사소통 수단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불러내는 힘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어령 선생님에게 언어는 단순한 소통 도구가 아닌 환상의 도서관과 같은 무한한 가능성의 공간입니다. 그는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깊이를 탐구하며, 언어가 가진 창조적 힘과 문화적 정체성의 핵심으로서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디지털 시대에 언어가 점점 축약되고 간소화되는 현실에서, 그의 통찰은 언어의 풍요로움과 깊이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미학적 차원을 넘어서 철학적 성찰로 이어지는 예술의 사유,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길을 탐색하는 종교적 사유가 이어집니다. 더불어 공동체적 가치를 담은 '우리'라는 개념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창조에 대한 사유도 흥미롭습니다. 그에게 창조는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에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질문을 던지는 호기심과 발견의 기쁨 사이에서 창조적 순간이 탄생한다는 겁니다.


사유의 클래식을 보여주는 <이어령의 말>. 삶의 본질을 탐구하는 마음, 인간, 문명, 사물, 언어, 예술, 종교, 우리, 창조라는 9가지 키워드로 풀어낸 지혜를 만나는 시간입니다. 수백 권의 저작에서 뽑은 정수를 한 권에 담아낸 이어령 생애를 관통하는 지적 여행에 동참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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