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넘 숲
엘리너 캐턴 지음, 권진아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스티븐 킹과 버락 오바마가 추천한 소설 <버넘 숲>. 『루미너리스』로 최연소 부커상을 수상한 엘리너 캐턴 작가가 10년 만에 발표한 장편소설이라 반갑습니다.


이 소설은 테크 스릴러(Tech Thriller) 장르입니다. 첨단 기술과 스릴러 요소가 결합된 장르를 의미합니다. 첨단 과학기술, IT, 인공지능, 해킹, 생명공학, 감시 시스템 등 현대 또는 근미래의 기술적 배경을 더해 이야기를 전개하는 겁니다.


유전자 공학과 생명공학을 활용한 마이클 크라이튼의 『쥬라기 공원』, 해커와 가상현실이 등장하는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 같은 소설처럼요. 현실적인 기술적 디테일과 정치 경제적 요소가 결합되어 보다 사실적인 느낌을 주는 장르여서 저도 좋아합니다.





엘리너 캐턴의 <버넘 숲>은 자본과 계급, 환경과 테크놀로지, 신념과 현실이 충돌하는 현대 사회를 해부하는 작품입니다. 소설의 무대는 뉴질랜드. 버려진 땅에서 게릴라 가드닝(Guerrilla Gardening: 타인의 땅이나 방치된 공공부지에 식물을 심는 행위)을 실천하는 단체 '버넘 숲'의 구성원들과, 글로벌 드론 제조업체의 CEO이자 억만장자인 로버트 르모인이 모종의 사건으로 엮이며 펼쳐지는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제목 <버넘 숲>은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에서 중요한 소재인 '버넘 숲'에서 따왔습니다. 맥베스에게 '버넘 숲이 움직이지 않는 한 네가 패배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예언이 내려지지만, 결국 적군이 숲의 나뭇가지를 들고 진군하면서 '움직이는 숲'이 현실이 되고 맥베스는 패배합니다.


이 상징적 제목은 소설 속 게릴라 가드닝 단체의 이름이면서, 동시에 불가능해 보이는 자본주의의 견고한 성벽에 균열을 내는 작은 환경 운동가들의 저항을 암시합니다.


환경 보호와 자립을 꿈꾸는 이상주의적 청년들 vs 모든 것이 돈과 권력으로 움직이는 세계에서 살아온 기업가. 억만장자 로버트 르모인은 자신의 부와 권력이 절대적이라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인물입니다.


불법적인 사업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버넘 숲 단체를 이용하려고 합니다. 경제적 자립이 힘든 버넘 숲의 약점을 파고들어 제대로 된 비영리 기구가 될 수 있도록 돕겠다며 기부를 하겠다고 제안합니다.


그런데 대척점에 있는 '버넘 숲'의 일원들 저마다의 상황이 흥미롭습니다. 모든 캐릭터가 자신만의 모순과 결함, 불안을 안고 있습니다. 리더 미라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때로는 위험한 거래도 마다하지 않는 인물입니다. 단체의 재정 독립 기회를 잡고자 로버트의 제안을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미라의 동거인이자 단체의 일원인 셸리는 '버넘 숲'의 조력자 역할을 5년 가까이 해왔지만 이제는 나가고 싶어합니다. 내면에는 자신의 불완전함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있습니다.


'버넘 숲' 초기 멤버로 활동했다가 떠났던 토니. 미라보다도 더 확고한 신념을 가진 인물입니다. "억만장자 계급은 그 존재만으로 연대를 잠식합니다"라고 말하며, 버넘 숲의 새로운 변화를 변절로 여깁니다. 이 소설에서는 작가가 토니를 선택했습니다. 토니의 입을 통해 순수성, 도덕적 양심, 희생 등의 윤리적 개념을 읊고 있거든요.


재밌는 점은 이 소설이 이상주의자와 자본주의자의 충돌을 극적으로 묘사하면서도, 선과 악의 단순한 대립 구도를 완전히 벗어났다는 데 있습니다. 저마다의 복잡한 모순을 드러내며,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기준을 부수는 순간들이 꽤 많이 등장합니다.


"뭐가 옳은지는 사실 아무도 모르잖아. 내 말은, 뭐가 옳은지 안다고 생각할 수 있고, 안다고 자신에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선택하는 시점에는, 그러니까 그 순간에는 절대 확신하지 못하잖아. 그냥 바랄 뿐이지. 그냥 일단 행동하고 최선의 결과가 나오길 바라는 거지." - p333


작가는 옳은 선택이란 무엇인지, 도덕적 불확실성에 대해 질문을 던집니다. 옳은 일과 그른 일의 경계는 점점 모호해지고, 우리의 선택은 종종 확신보다는 희망에 기반합니다. 소설 속 인물들이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갈팡질팡하는 것처럼요.





'버넘 숲'의 젊은 활동가들은 기성세대가 남긴 환경 문제와 사회적 불평등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세대입니다. 그들의 이상주의와 현실 사이의 갈등은 오늘날 청년들이 경험하는 딜레마를 반영합니다.


작가는 소설 <버넘 숲>에서 자본주의와 환경 위기, 기술 발전과 인간성 상실에 대한 비관적 전망을 보여주면서도, 인간의 작은 저항과 연대가 가져올 수 있는 변화의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완벽하지 않은 인간들, 모순과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선택과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잘 보여줍니다.


테크 스릴러 장르에서 기대하는 특유의 긴장감 넘치는 스토리 전개가 일품입니다. 영화적인 속도감과 생생한 장면 묘사가 재미있습니다.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동시에, 장르적 재미를 놓치지 않는 <버넘 숲>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