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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 - 거장의 재발견, 윌리엄 해즐릿 국내 첫 에세이집
윌리엄 해즐릿 지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24년 8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버지니아 울프가 "강하고 두려움을 모르는 당대 최고의 문장가"라고 극찬했던 인물, 로버트 루이 스티븐슨이 "오늘날 우리는 해즐릿처럼 쓰지 못한다"라며 경의를 표했던 에세이스트, 조지 오웰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영어권 최고의 수필가 윌리엄 해즐릿.
200년 전 영국 최고 지성의 신랄한 통찰, 윌리엄 해즐릿 에세이 선집 3부작 중 첫 번째는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입니다. 이 책에는 표제작이 된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를 비롯해 「죽음의 공포에 관하여」, 「질투에 관하여」,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들에 관하여」, 「학자들의 무지에 관하여」, 「맨주먹 권투」까지 인간 본성과 행동에 관한 에세이를 엄선하여 담았습니다.

낭만주의 시대를 살았던 해즐릿은 셰익스피어를 최고의 반열에 올려놓은 문예비평가이자 탁월한 저널리스트였으며, 평생 소수파로 남아 보수주의를 비판하고 자유와 혁명의 신조를 옹호했던 급진적 이상주의자였습니다. 그의 묘비가 사망 40년 후인 1870년에 사회적 갈등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유로 파괴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파격적인 인물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해즐릿의 목소리가 사후 백 년이 지나서야 버지니아 울프에 의해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아이러니합니다. 버지니아 울프의 '해즐릿론'으로 시작하는 해즐릿 에세이집은 200년이 지났음에도 놀라울 정도로 오늘날의 이야기와 거리감이 없습니다.
해즐릿의 가장 유명한 에세이이자 이 책의 제목이 된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는 인간이 타인의 불행과 실패에서 느끼는 미묘한 즐거움을 냉철하게 분석합니다.
혐오할 게 없으면 생각과 행동의 원천마저 잃어버릴 것 같다. 삐걱거리는 이해관계, 제멋대로인 열정으로 계속 파문을 일으키지 않으면 삶은 고인물이 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사고와 범죄에 관한 신문 기사를 최고의 잡담거리로 삼는다. 불이 나면 온 마을 사람들이 현장으로 달려가 구경한다.
우리는 왜 재난 뉴스에 끌리는지, 왜 타인의 실패담에 귀를 기울이는지, 왜 유명인의 스캔들에 열광하는지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신가요? 해즐릿은 이런 현상이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인간 본성의 근본적인 부분이라고 짚어줍니다.
그는 "감정은 이해보다는 열정과 한편이다. 버크가 말하듯이 옆길에서 공개 처형이 벌어지면 공연 중인 극장도 텅 빌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SNS에서 벌어지는 경악스러운 장면들, 실시간 검색어를 장악하는 논란들, 유튜브의 드라마 콘텐츠가 큰 인기를 끄는 현상은 어쩌면 200년 전 해즐릿이 간파했던 인간 본성의 연장선일지도 모릅니다.

흥미로운 점은 해즐릿이 이러한 혐오의 감정을 단순히 비난만 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오히려 이것이 사회의 역동성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요소라고 봅니다. "사회적 골칫거리가 본질적으로 공익적 요소인 셈이다"라는 그의 말은 갈등과 불만, 비판이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근본적인 이유와 그 두려움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해 탐구하는 「죽음의 공포에 관하여」. 해즐릿은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단순히 끝남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현재의 순간들과 인연들을 놓아야 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고 말합니다. 현대인들이 버킷 리스트를 작성하고 욜로를 외치며 현재의 삶을 최대한 누리려는 모습은 해즐릿이 관찰한 인간 심리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닐까요.
해즐릿은 "죽음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을 없앨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삶에 적절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단순히 "억제할 수 없는 기분과 견디기 괴로운 격정을 만족시키려고 인생의 무대에 머물" 뿐이라면 오히려 "즉시 떠나는 편이 좋을 것"이라고도 말할 정도입니다.
인간관계의 중심에 자리한 질투라는 감정의 근원과 역할에 대해 탐구하는 「질투에 관하여」. 여기서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우리는 죽은 사람들을 질투하지 않는다는 점을 짚어주거든요. 죽은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현실의 이익이나 경쟁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해즐릿은 질투를 단순히 부정적인 감정으로 치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질투가 일종의 가치 판단 시스템으로 작동한다고 봅니다. 진정한 가치와 허식을 구분하는 감정적 메커니즘인 셈입니다.

불쾌함의 심리학을 이야기하는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들에 관하여」가 이어집니다. 왜 어떤 사람들은 첫 만남에서부터 우리의 비위를 거스르는지, 그리고 그런 감정이 어떻게 형성되고 작용하는지 분석합니다.
「학자들의 무지에 관하여」에서는 진정한 지식과 텅 빈 박식함의 차이를 짚어줍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도 의미심장한 글입니다. 인터넷을 통해 무한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게 된 오늘날, 우리는 과연 진정한 이해와 지혜를 획득하고 있는지, 아니면 더 많은 '앵무새'가 되어가고 있는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지막 에세이 「맨주먹 권투」는 당시 영국에서 인기 있던 맨주먹 권투 경기를 두고 펼치는 이야기입니다. 해즐릿은 권투에서 보이는 육체의 한계에 도전하는 인간의 모습이 정신적 용기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묘사합니다.
오늘날 UFC나 복싱 경기, 심지어 리얼리티 쇼까지, 우리는 여전히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극단적 상황을 '구경'하는 것에 열광합니다. 해즐릿은 이러한 현상이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근본적인 측면을 반영한다고 보았을 테지요.
산업혁명이 진행되고, 프랑스 혁명의 여파가 유럽을 뒤흔든 시기에 활동했던 윌리엄 해즐릿. 당시 격변의 시대를 관찰하고 분석하면서,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변하지 않는 인간 본성의 작동 방식을 포착했습니다.
그가 묘사한 질투와 혐오, 죽음에 대한 공포, 지식의 한계에 대한 통찰은 2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시니컬한 톤의 칼럼, 논평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윌리엄 해즐릿 에세이를 읽어보세요.
윌리엄 해즐릿 에세이집은 인간 본성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서이자, 정보의 홍수 속에서 진정한 지혜를 찾는 방법에 대한 안내서이며, 때로는 우리 자신의 불편한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