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ma 2004 전시 때문에 갔지만, 그보다는 '피에르&쥘' 회고전 "Beautiful Dragon"이 훨씬 인상깊었다. 피에르&쥘은 1970년대부터 함께 동거하면서 작품활동을 해온 게이 예술가. 피에르는 사진가고, 쥘은 화가였는데 둘이 함께 작업하면서 사진에 회화적 윤곽선을 입히는 활동으로 크게 주목받았다. 이번 전시는 1970년대부터 비교적 최근(2003년) 작품까지 회고전 형식으로 열렸다. 레드와 엘로우를 기본색으로 전시벽 전체에 감쌌다. 한쪽 벽이 모두 빨간색이면, 잇대어 있는 다른 벽은 온통 노란색이다. 이런 식으로 전시관을 꾸미고 그 위에 작품을 디스플레이했다.
액자 역시 작품성이 뛰어나다. 액자 장식은 사진의 느낌을 고스란히 이어주는 무늬, 색을 사용해 작품의 완결성(통일감)을 높였다. 치밀한 예술가란 점은 이런 데서 알 수 있다. 반짝이는 펄은 이들이 주로 사용하는 데코레이션 방법. 반짝임 때문에 사진의 느낌은 굉장히 키치적이다. 마치 고급스럽게 꾸민다고 꾸몄는데, 그 때문에 더 싸구려 같아 보이는 사진관 배경(돌이나 결혼 사진 배경)처럼 설정이 굉장히 생경스럽다. 그런데, 모델의 표정이나 포즈만큼은 너무나도 진실해서 이 둘이 묘하게 어울린다. 예상외로 깜찍한 것이다. 환상적이랄까? (가서 보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을 게다.)
모델의 바디라인은 에로틱하고, 몽환적이어서 사진을 보고 있으면 어떤 달콤함에 빠져드는데... 그 달콤함은 젊은 남성의 몸이 주는 탄력적인 느낌과 그 몸을 바라보는 작가의 사랑스런 시선에서 비롯된 것 같다. 뭐랄까. 연정을 품은 눈길이랄까? 모델은 거의 90%가 동양 남자(일본, 베트남, 중국)인데, 이들을 사진에 담는 작가는 서양인이다. 어쩔 수 없이 동양의 젊은 남자에게 보내는 연모의 정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이다. 뭐, 오리엔탈리즘이 아니라곤 말 못하겠지만 막연히 좋고, 막연히 사랑스럽고, 막연히 정이 가는 느낌은 비단 서양->동양의 경우만 있는 건 아니니까. 게다가 작가들은 꿈많은 게이다. 전시실이나 작가나, 작품이나 꽤 앙증맞다.
작품들이 일단 거부감이 없고, 작업솜씨가 산뜻하다는 점에서 추천하고 싶은 전시다. 보고 있으면 '풋!' 웃음이 터질 법도 한, 피에르&쥘의 동양예찬이 파리 시각예술계에 던졌을 파장이 어림되는 재밌는 전시. 전시실의 아름다움을 느끼기도 좋고, 피에르&쥘의 (아시아) 환상을 엿보는 재미도 있다.
한편 2,3층 전시실에서는 'Sema 2004' 전시가 한창이다. 동시대의 사회문화적 코드를 작가마다의 독창적 시각과 방법으로 작품화 시킨 전시로, 크게 6개의 주제로 구분된다. '소비게임-공룡의 트릭', 'Replay-이식', '키덜트(Kidult)', '루키즘-외모지상주의', '농담-현실의 틈새를 스며드는 아햏햏스러움', '혼자놀기-섬,꿈, 변신'이 그것이다.
이중 가장 재밌었고 또 자연스러웠던 전시는 네번째 주제를 표현한 '키덜트'. 작품 수는 많지 않았지만 키덜트의 감성을 억지스럽지 않게 잘 표현했다. 이차원의 벽면에 검정 테잎을 부쳐 Cyworld 미니홈피처럼 꾸민'Welcome to my room'이 첫번째 작품. 만화적인 디테일이, 앙증맞은 집을 온라인상에 지어놓고 즐거워 하는 키덜드의 감수성을 잘 말해준다.
바로 그 옆에는 아이의 몸에 30대의 얼굴(이마의 작은 주름, 거친 피부, 그리고 수염)을 붙인 미니어쳐 인물조각이 놓여 있다. 손에는 얼굴 없는 어린애를 들고 있다.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데 그렇게 당연할 수가 없다. 과장이나 왜곡 없이 사실을 그대로 보여준 작품. 아이디어도 새롭지 않은데 그런 조합이 의외로 충격적이다. 보면 그냥 '섬뜩'하다. 바로 내 모습이니까. (이 작품이 맘에 들어서 사진 좀 찍으렸더니, 전시관리자가 한시도 고삐를 늦추지 않고 감시중이었다. 몇 번이나 기회를 노리다가 마침내 찍으려는 찰나, 갑자기 나타난 감시자 때문에 놀라서 손이 흔들렸다. 으아... 찍기는 했으나 형태가 허물어진 사진이 되고 말았다)
가장 표면적이라고 느꼈던 전시는 제5주제 '아햏햏스러움'과 제6주제 '혼자놀기'. 물론 그 중에서도 아기자기하게 주제를 잘 표현한 '넓적 오리너구리의 하루'(아... 작품 제목 정확히 생각 안남, 사진 전시)가 있었다. 참 아햏햏다웠던 소품을 이용해(특별제작한 '넓적 오리 너구리', 아래 사진 중 첫째줄 두번째) 사진 전시를 했는데, 마지막에 사진의 모델 '넓적 오리 너구리' 실물을 전시해 더 즐거웠다. ^^
전시5는 작품의 완성도가 좀 떨어지고 노력이 부족해 보였던 반면, 전시6은 큐레이팅이 부족해 보였다. 가는 철사로 조형물을 만들어 벽에 걸거나 부착한 작품이 있었는데, 작품의 존재감이 너무 없어서 거기에 작품이 있었는지도 모른채 지나갔다가 전시 카달로그를 보고서야 찾아냈다. 조명에 좀더 신경써서 관람자의 시선을 끌어주면 어땠을까 싶다. 또 투명고무로 만든 '물웅덩이' 작품은(바닥에 깔려 있었음) 사람들이 밟고 지나갈 정도로 팽개쳐져 있었다. 세심하게 보지 못한 나 같은 사람을 욕해도 할 수 없지만, 관람자들이 본의 아니게 작품을 밟고 지나가는 일은 없도록 신경써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다 관람하는데 3시간이 걸렸다. 좀더 볼 수도 있었는데 폐관시간이 다 되어서 어쩔 수 없었다. 혹시 가까운 시일에 시립미술관에 갈 생각이라면 넉넉히 시간을 두고 찾았으면 한다. 또, 초입에 있는 분수를 놓치지 말길. 물줄기가 가져다주는 청량함과 리듬감, 그리고 물줄기가 바닥에 부딪힐 때 나는 소리가 귀를 즐겁게 한다. 전시도 좋지만 이 분수대부터 미술관 앞마당까지 이르는 포장길이 참 예뻐 사진찍기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