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이유로 여행기를 쓰게 될까?                                                                                      여행을 하는 내내 나는 쉽게 엎어지는 일상에 대해 생각했다. 악마처럼 튼튼해 보여도, 그 중에 가장 핵심적인 '직작생활'을 지워버리면 금새 생활공간과 내용이 바뀐다. 회사를 그만 두었으므로 여행도 떠나올 수 있다. 이것만큼 자명한 건 없다.

현재 내 삶의 정체성은 과거의 영향 아래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롭다. 아직 미래가 불안할 정도는 아니어서 다행이다. 이럴 때 떠난 여행이었으니, 여행기 또한 한없이 가벼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여행의 2/3는 우울했으며, 애달펐다.

하루키의 여행기는 일의 연속선상에 있었다. 3년간의 여행에서 소설 2편을 완성했고, 에세이를 수 십편 썼으며, 2권의 책을 번역했다. 그것도 모자라 나중에는 <먼 북소리>라는 여행기마저 출간했다. 그의 여행기는 따라서 '공적인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부담감이 없었던 나는 무작정 놀면 되지 생각했다. 노는 것이 남는 거란 생각에. 음... 그런데 노는 것 또한 부담으로 다가왔다. 결국은 여행도 '일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된 것. 하나의 사이클 처럼 직장을 그만두면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여행에서 돌아와 새 일자리를 잡고 다시 열심히 일한다. 그리고 다시 긴 틈이 나면 여행을 떠난다. 어디까지나 재충전을 위한 여행이다. 따라서, 하나라도 더 보고 돌아가야 한다. 그림, 궁전, 정원, 도시 분위기 무엇하나 허투루 넘길 수 없다, 같은. 지금 본 것들이 언제 어떻게 쓰일지 모른다는 강박관념. 그래서 몸은 자유로웠으나, 정신은 자유롭지 못했다.

마음의 긴장. 독을 알게 된 후(나는... 여행 초반엔 뭐가 문제인지도 몰랐다. 전혀! 날아가는 총알처럼 잽싸게 관광지를 돌았을 뿐) , 이번 여행에서 이것부터 무장해제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러나 적당히 해야지 너무 많이 하면, 삶은 시금치처럼 될까 그것도 걱정되었다. 긴장과 이완, 어떤 타입에도 완전히 매몰되선 안 된다. 그 사잇길을 찾을 것, 중간의 중간을 걸을 것. (아, 무슨 여행이 이렇게 어렵담! 흑흑흑...ㅠㅠ)

여행은 마음의 추를 제자리에 놓는 일이 되었다. 어디쯤이 제자리인지는 알 수도 없었지만. 평상심을 찾을 것... 이것이 화두였다. 본래의 마음을 찾을 것. 재촉하지도 느긋하지도 말 것.

이런 생각을 안고 돌아다니는 사이, 나는 사는 게 어쩜 이리 비슷할까 신기했다. 유학생들이나, 파리지엔이나 다 불확실한 미래를 어떻게라도 확정지어보려고 애쓰고 있다. 현재에 집중하는 거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현재로서는 최선이라는 믿음 하나로 버티기. 버티기에 무릎끓은 자들은 다시 실업상태에 놓이거나, 고국으로 돌아간다. 매일 스스로를 시험하는 것이다. (시험은 하지만, 되돌아보기는 할까? 지금까지 쭉 이 길만 보고 살았으니까 오늘도 주어진 길을 걷고 있는 건 아닐까? 나에게는 다행히 지금이 그런 시기다. 반성적으로 사유하기.)

그리곤 생각했다. '다들 똑같잖아? 헤-... 나만 힘들고, 나만 괴롭고, 나만 불확실한 거 아니잖아? 뭐야... 별것도 아닌 걸, 여기와서 배우네'라고. 그러고 나서 세계의 끝에서 하루키 할아버지가 웃었던 것처럼 "우호우호, 우호우호" 웃었다. 삶이 기이했다.

과연, 내 마음의 추는 제자리를 잡았을까? 역시 알 수 없지만, 나는 뭔가 자란 느낌이다. 애처럼 떼쓰지 않을 수 있다고 스스로를 믿게 된 것이다. 큰 수확, 감사하다.

늘 조급했는데, 그 조급함을 한 뜸 늦춘 여행. 여행기는 그 이야기가 될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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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4-10 1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요다 2004-04-12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곡사, 저는 처음이에요. 좋은 절 같은데 가기 전에 공부 좀 해야겠네요. 자세한 건 핸드폰으로 문자 쳤습니다.^^

플라시보 2004-04-13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어떤 곳이건 여행이라 불리울 만한 곳을 다니지 않았던 저로써는 저런 님의 갈등마저 한없이 부럽게만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