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길
벚꽃 구경에는 크게 흥미가 없다. 벚꽃이 만개한 모습은 예쁘기는 하지만, 그런 벚꽃길이 근처에 있다면 산책 삼아 걸어볼 만하다고 생각하지만, 굳이 일부러 시간을 내서 찾아갈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예전에 일터가 영등포에 있을 때는 여의도 벚꽃길도 걸어 다녀봤고, 우리 동네 불광천 벚꽃길도 해마다 걸었지만, 모두 가까이에 있었기에 갔던 곳이고, 마침 같이 일하는 일행이나, 같이 식사했던 일행이 원해서 같이 갔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 속초 여행에서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벚나무들을 보면서 조금 생각이 변했다. 일단 공간 자체가 관광지라서, 일상을 벗어난 공간이라는 인식이 강해서 그런지 몰라도 이 벚꽃길이 정말 예쁘고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공간이라면 억지로라도 시간을 내서 찾아올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다시 생각해보면 이건 벚꽃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이 속초라는 관광지를 좋아하기 때문일 수 있다고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암튼 중요한 것은 이번에 다녀온 속초 곳곳에서 만난 여러 벚꽃길들이 모두 엄청 예뻤다는 것이다. 영랑호 둘레를 걸으면서 계속 마주친 벚꽃들, 숙소로 드나드는 길에 양쪽 길가에서 우리를 맞이해 준 벚꽃들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특히 숙소를 드나들며 여러번 마주친 그 꽃길은 마치 꽃으로 만든 터널 같은 느낌이었다. 꽃길이란 단어를 한번도 내가 직접 써 본적은 없는 것 같은데, 어쩐지 낯익은 이유는 노래를 통해 많이 들어서 때문이겠지. 암튼 처음으로 이런 걸 두고 꽃길이라고 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봤다.
이번 속초 여행은 여러모로 내게 인상적이었다. 우선 20년도 훨씬 더 전에 제대한 이후로 이쪽 동네를 여행 온 것이 처음이었다. 아, 가끔 짧게 스치듯 지나친 적은 여러번 있었다. 무박2일 설악산 산행을 하느라 다녀간 적도 있었고, 양양이나 강릉 쪽도 가끔 볼일이 생겨 짧게 머물다 가기도 했다. 하지만 속초와 고성 쪽으로 놀러갔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신병교육대를 마치고 곧바로 GOP로 배치를 받아 통일전망대가 있는 동쪽 끝 소초에 배치되었었고, 나중에 전방 근무를 마치고 일반 대대로 철수한 후에는 간성에 있는 부대에서 지냈다. 말년에 다시 한 번 전방으로 투입될 수도 있었으나, 당시 편재가 좀 바뀌고 연대와 대대가 막 뒤섞이면서 다행히 전방 투입 전에 제대했었다. 기억을 떠올려보면 평생 살면서 다시 경험하기 어려운 나름 재미있고 독특한 일들이 많았지만, 어쨌거나 군대는 군대였기에 고달프고 힘들었던 것은 당연하다. 고배율 망원경으로만 보긴 했지만 북한 땅 금강산도 여기저기 둘러보고, 야간에 각 초소를 돌며 근무서면서 늘 바라보는 건 아름다운 동해안과 멀리 북한 해금강이었다. 자연환경이 정말 아름다운 곳에서 근무했지만, 그 삶 자체는 지옥이었기에 모순이라는 생각이 늘 들었다. 암튼 그래서 그런 것인지, 그냥 우연이었는지는 몰라도 군 생활을 했던 속초 위쪽 고성 쪽으로는 이상하게 갈 일이 없었던 것이다. 무의식이 갈 일을 일부러 안 만들었는지, 그냥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한편 이번 여행은 함께 간 사람들에게서 많은 응원과 위로를 받았던 시간이었다. 종종 떠올리는 말이지만, 주위에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들, 따뜻하게 나를 걱정해주고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많아서 감사하다. 함께 간 사람들과의 매 순간 순간이 정말 즐겁고 행복했었다. 아마 살면서 이렇게 많이 웃었던 적이 없었을 정도로 정말 많이 웃고 즐기는 여행이었다. 이런 행복한 기억을 간직할 수 있어서 함께 다녀온 분들께 고마움을 느낀다.
다시 일상
그렇게 즐겁고 행복한 여행이었지만, 여행에서 돌아온 일요일 저녁부터 다시 기분이 다운되었다. 다음날부터 머리 아픈 일들이 잔뜩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미 해야 할 일들이 많은데, 회의에 한 번 참석할 때마다 새로운 일들이 생겼고, 참석해야 할 회의는 자꾸 또 새로 생겼다. 엊그제 그러니까 화요일 오후에는 갑자기 급하게 성명서 초안을 써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어지간하면 이렇게 급한 요청은 거절해야 하지만, 워낙 바쁘고 할 일이 많은 선배가 부탁하시길래, 어쩔 수 없이 수락했다. 그날 해야 할 일이 이미 많았고, 또 그날은 유난히 전화도 많이 오고, 매장 손님도 끊이지 않고 계속 들어왔다. 글 쓰는 일은 좋아하지만, 성명서와 같은 딱딱하고 공식적인 글은 좋아할 수가 없다. 관련 내용을 잘 아는 분들께 전화로 조언을 구하고 자료를 찾아보고 밤 늦게까지 성명서를 썼다. 그리고 다른 해야 할 일들을 마무리하느라 결국 새벽까지 일을 해야 했다. 늦은 저녁 일단 매장을 정리하고 나서야 저녁을 못 먹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무척 배가 고팠지만, 우선 성명서 초안을 넘기고 뭐든 먹어야지 했는데, 결국 새벽까지 제대로 밥을 먹지는 못했다. 그냥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찾아 허기만 면하는 정도로 버텼다.
월요일 오후 강의는 그 자체는 재미있었지만, 강의를 준비하는 공무원들의 태도가 좀 어설퍼서 약간의 착오가 있었고, 강의에 참석한 주민 조직 간부들의 태도 때문에 조금 화가 나기도 했다. 강의를 마치고 바로 다음 회의에 참여하느라 바쁘게 움직여야 했고, 회의가 길어져서 매장을 봐야 하는 시간에 늦어져서 마음을 졸였다. 급하게 매장으로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그때까지 점심도 못 먹었다는 걸 깨달았다. 같이 회의에 참석했었던 선배 한 분이 전화로 왜 저녁을 같이 먹지 않고 바로 갔냐고 물어봐 주셔서 고마웠다. 저녁에 매장을 봐야 하는 상황이 바뀌지 않는 한, 저녁은 늘 매장 문 닫고 늦게 먹어야 하는데, 뭐 현재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치지 말아라
여행에서 돌아온 일요일 저녁에 큰 아이랑 통화를 하니, 아이가 다쳤다고 했다. 전날 자다가 침대에서 떨어지면서 침대 옆 화장대 모서리에 눈 바로 옆을 찍혀서 찢어졌다고. 일요일 아침에 여기저기 병원을 찾아다녔으나 치료를 받지 못하고 시간만 허비했다고 들었다. 아이는 담담하게 말을 했지만, 나는 속으로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아이가 다쳤다는 사실도, 애들 엄마와 아이가 찾아갔던 여러 병원에서 이런저런 핑계로 다친 아이를 치료해주지 않았다는 사실도 너무 화가 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즐겁게 여행을 다녀왔는데, 아이는 다쳐서 치료도 못받고 병원을 찾아다니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왔구나. 다친 아이 곁에 있어주지 못한 사실도 화가 났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아이를 찾아가 얼마나 다쳤는지, 지금은 어떤지 보고 싶었지만, 전화 통화를 한 시간은 이미 너무 늦은 때였고, 월, 화 이틀을 늦게까지 일하느라 가지 못했다. 어제 비로소 아이들을 만나러 다녀왔다. 내가 직접 큰 아이의 상처를 소독해주면서 살펴보니 생각했던 것보다는 상처가 크지 않아 다행이었고, 벌써 거의 아물어 있었다. 다만 모서리에 부딪힌 충격으로 인해 눈가에는 멍이 들었다가 회복되고 있었다.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프지 말고 다치지 말라고 속삭였다.
또 다시 돌아오는 슬픈 기념일들
며칠 전에 4.3 기념일이 지났다. 대통령이라는 자리에 앉은 인간은 당선인 신분일때는 나타났었지만, 올해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저출산 대책으로 30세 이전에 자녀 3명을 낳으면 군면제 라는 황당한 이야기를 내놓는다거나, 주 52시간도 과한데, 69시간 노동제를 추진하겠다고 하다가 다시 60시간으로 바꾼다거나, 민생특별위원회 위원장이라는 사람이 쌀 소비에 대한 대책으로 '밥 한 공기 비우기'를 말했다던가 하는 이야기들을 들으며 지금 내가 정말 뉴스를 듣고 있는 건지, 코메디 프로그램이나 영화를 보고 있는 건지 헷갈렸다. 역시 우리나라는 정치인만큼 국민에게 웃음을 주는 직업이 없는 것 같다. 아,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게 아니었는데. 암튼 해마다 4.3 기념일에는 기분이 쳐진다. 그건 아마 4.16 에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고, 기억이다. 작년 4월에도 그랬고, 올해도 그렇고,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저 시간이 이렇게 허무하게 빠르게 흘러간다는 사실이 원망스러울 뿐.
살인마 전두환의 손자가 광주를 찾아가 유가족 대표들에게 사죄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가 가족과 지인들의 폭로를 인스타그램에 올렸을 때 그 영상들을 찾아봤었다. 그리고 그가 라이브로 마약을 하는 장면도 일부를 보았었다. 한 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잘 모르겠다. 우리가 부모나 가족을 선택해서 태어날 수는 없다. 태어나보니 독재자, 학살자의 손자였다면 그 삶은 과연 어떨까? 상상하기 쉽지 않다. 인간은 누구나 크고 작은 실수와 잘못을 저지른다. 내 부모님도 마찬가지였고, 나도 마찬가지다. 나는 부모님들의 여러 실수들을 기억한다. 나 역시 살면서 많은 잘못들을 저질렀다. 그렇다고 내가 부모님을 원망하거나 내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싶다고 느낀 적은 없다. 그저 이 삶 자체가 고달프고 싫어서 삶을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그건 내 삶의 문제이지, 부모님과 조상님들의 문제는 아니었다. 내 아이들 역시 나의 크고 작은 잘못들을 보고 자랐다. 아이들이 과연 나를 원망할 지는 모르겠다. 상식적인 수준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럴 것이다. 설사 이런저런 잘못으로 법의 심판을 받아 교도소 신세를 지고 있는 부모나 조모가 있다고 해도 어느 정도로 원망하거나 경멸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전두환 정도의 학살자는 정말 상식의 선을 까마득히 뛰어 넘는다. 내가 만약 전두환의 자손으로 태어난다면 어떨까? 정말 이건 상상이 안 된다.
또 하나 드는 생각은 우리가 겪어온 수많은 참사들, 성수대교 참사, 삼풍백화점 참사,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등의 큰 사고들이 일어났을 때, 사전에 그를 막을 수 있었을텐데도 자신이 맡은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았거나, 돈에 눈이 멀어 고의로 이런 사태를 불러온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했다. 그들은 과연 전두환과 비교해 얼마나 다를까? 물론 전두환은 (어디까지나 공식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으니 추정이라 단서를 달 수 밖에 없지만) 국민들에게 총구를 겨누도록 명령하고, 실탄을 발표하라고 명령한 사람이기 때문에 직접 학살자이기에 단순히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건 사실이긴 하다. 다만 그 수많은 희생자들에게 제대로 사과하지 않았고, 제대로 책임지지 않았다는 건 대부분 비슷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잊지 말고 제대로 기억해야 할 슬픈 기념일들은 너무나도 많다. 그 중에서도 특히 4월은 슬픈 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