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토끼 - 개정판
정보라 지음 / 래빗홀 / 2023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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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갑고 서늘하고 섬뜩한 10개의 단편. 부커상 수상작이라는 수식이 없었어도 제목 때문에 궁금해서 펼쳐봤을 것 같다. 맨 뒤 작가의 말을 보면 이 책은 부커상을 받은 후에 다시 낸 개정판이다. [저주토끼]는 2017년 출간되었다가 와우북페스티벌을 통해 만난 안톤 허 라는 번역가에 의해 번역되어 해외 출판되었고, 그 덕분에 해외에서 큰 상을 받게 되었다고 했다.

10편의 단편은 모두 인상적이었지만, 역시 표제작인 [저주토끼]가 가장 좋았다. 그 다음은 [흉터]인데, 이 책에 실인 단편들 중 가장 분량이 많다. 단편의 미덕은 짧은 이야기 속에 실린 깊은 주제의식이거나 반전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단편의 단점은 짧은 이야기로 인한 정보 부족이나 결말의 아쉬움이다. 단편이라는 형식 자체가 장점이자 단점인 것. [흉터]는 다른 이야기들에 비해 분량이 많아서 이야기의 완성도가 좀 더 높았던 것이 아닐까. 다른 이야기들은 그 나름으로 괜찮지만, 상대적으로 조금 아쉬운 측면도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아무리 뛰어난 단편이나 중편을 읽어도 그 자체의 완성도를 인정하더라도 늘 아쉬움을 느끼는 편인 듯하다.

작가의 말에도 등장하는 환상호러 라는 장르에 대해 잠깐 생각해본다. 환상이라는 단어는 여러 느낌을 주는데, 내게는 엉뚱한 상상이나 기상천외한 이야기 같은 느낌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호러는 당연히 무서운 이야기. 그게 피 튀기는 무서움이면, 살짝 거부감이 들고 유령이나 미스터리 같은 쪽으로 가면 좀 더 끌리기는 한다. 어쨌거나 추리물이나 SF 뿐 아니라 환상호러 라는 장르에도 확 끌리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정보라 라는 작가를 앞으로 잘 기억해두고 더 많이 읽어야겠다.

아래는 각 단편들에 대한 개인적인 단상들이다.

저주토끼: 악행, 인과응보, 안개, 보이지 않는 두려움, 스산함, 불특정 다수를 향한 공격, 불행, 저주가 우연히 목표를 잘 찾아가서 다행

머리: 불쾌감, 섬뜩함, 생리, 여성, 기괴함, 일단 변기라는 물건 때문에 읽는 내내 계속 불쾌한 기분을 느낄 수 밖에 없었음, 결말은 조금 뻔한 느낌

차가운 손가락: 신선함, 답답함, 기억상실, 시각 차이, 입장 차이, 재미있었는데 조금 더 정보를 주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

몸하다: 미지에 대한 공포, 막연함, 사랑과 집착, 허무함

안녕 내사랑: 많이 봤을 법한 이야기, 집착, 동기화, 짧은 이야기의 한계

덫: 잔인함, 인과응보, 피, 친족 강간, 돈에 눈이 멀어버린 인간, 어쩌면 현대인 대다수는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흉터: 시작 부분은 마치 무협지를 읽는 느낌이었음, 그것에 대한 정보를 마지막까지 통제한 것은 좋았으나 끝까지 시원하게 밝히지 않은 정보들은 아쉬움, 결말 아쉬움, 방황하고 복수하는 내용까지는 정말 좋았음, 앞의 작품들과 다른 결과 느낌, 그러니까 이게 호러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음, 피가 낭자해서 호러인가?

즐거운 나의 집: 왜 꼭 무능한 남편들은 돈 사고에 바람까지 피우는 걸까? 현실고증인가? 확증편향인가? 요즘 말로 고구마 백 개 먹은 기분, 작품 내에서는 (역시 요즘 말로)사이다 결말인데, 정작 나는 별로 사이다 라는 느낌이 안 들었음, 초반 부터 아이의 존재를 좀 더 부각시키며, 묘한 공포심을 줄 수 있었다면 훨씬 더 좋지 않았을까?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 개인적으로 집중을 잘 못했음, 분량도 짧고, 뭘 말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음. 배신에 대한 이야기일까?

재회: 앞 날개로 돌아가서 저자가 폴란드 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음을 확인함, 2차 세계대전, 유령, 수용소, 트라우마, 어려서 학대받은 사실과 묶이는 걸 원하는 성향이 매끄럽게 이어지지 못 하는 것처럼 여겨졌음, 왜냐하면 앞에서는 계속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다가 뒤에 가서야 엄마 이야기가 나오는데 너무 뒤에서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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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05-18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저주토끼에서 무서움이 느껴져야 하는데 그리고 그런 건 내가 질색인데
그렇지 않아서 좋았어요. 뭐랄까... 메시지는 고스란히 전해지면서도 독자가 차분해지는... 인과응보여서 그랬을까요...

감은빛 2023-05-18 16:36   좋아요 1 | URL
그렇죠? 저도 환상호러 라는 장르에서 호러는 별로 느끼지 못하고 환상은 많이 느꼈어요. 물론 어떤 섬뜩함이나 서늘함 같은 느낌은 들긴 했지만, 그게 공포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