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어와 막걸리


홍어에 막걸리를 마셨다. 쉰김치와 돼지고기 수육도 함께였다. 오랜만에 먹어서 무지 맛있었다. 김치가 진짜 맛있어서 막 감탄하고 있었는데, 옆에 있던 선배가 알려줬다. 그거 작년에 300포기 김장했던 그 김치야. 거의 1년이 다 된것 같은데. 그날 김장했던 김치가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 김장할 김치보다 더 많을 것 같다. 이제서야 이 김치가 그렇게 맛있었던 이유를 알았다. 그 고생을 하면서 담았던 김치인데, 어떻게 맛이 없을 수가 있겠나. 나에게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김치일 수 밖에 없었다.


그날따라 막걸리도 엄청 맛있었다. 톡쏘는 맛이 전혀 없이 무척 부드러우면서 감칠맛이 났다. 아스파탐이라던가 그런 인공감미료 같은 건 전혀 안 들어간 막걸리였다. 전날 저녁에 가볍게 술을 마시고, 밤새 일을 했고, 아침부터 저녁까지는 무척 바빴다. 시계를 보니 36시간 동안 한숨도 자지 않고 있었다. 졸리고 피곤해야 할 상황인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게다가 막걸리를 엄청 마셔도 취하지도 않았다. 그 맛있는 막걸리가 다 떨어지고, 냉장고에 보니 잣 막걸리가 있어서 가져다 마셨다. 한 두어잔 마셨는데, 시큼한 맛이 나서 이상하다 생각하긴 했지만, 뭐 좀 시큼할 수도 있지 그러고 그냥 마셨다. 옆에 있던 선배가 한 잔만 먹으려고 그 막걸리를 잔에 따르다가 냄새를 맡더니, 이거 상한 거라고 말했다. 유통기한을 보니 벌써 지나도 한참 지난 술이었다. 바로 옆에 있던 후배가 내 어깨를 치며, 미련하게 이걸 마시고 있었냐며 뭐라고 했다. 이상하다. 좀 시큼하긴 했지만 먹을만 했는데, 결국 그 술은 버렸다. 남아잇는 다른 잣 먹걸리도 죄다 마찬가지였다. 후배가 막걸리가 없는데 소주 마실래 라고 묻길래 고개를 끄덕였다.


새벽 1시 혹은 2시쯤 대부분의 일행이 돌아가고, 친한 선배와 친한 후배랑 셋만 남아서 소주를 더 마셨다. 선배가 김치찌개를 끓여왔는데, 맛이 영 별로였다. 평소 음식 잘하는 사람인데, 이건 영 못 먹겠는데 싶었다. 그래서 안주 없이 소주만 마셨다. 술을 섞어 마신게 아마 잘못이었을 거다. 완전히 취해서 필름이 끊겼다. 간간히 기억이 떠오르는데, 비틀거리다 넘어지면서 전봇대에 부딪혔다. 뺨을 만져보니 살짝 부어오른데다 작은 상처가 있었다. 


오래전 막노동을 할 때, 화장실에서 타일 깨는 일을 한 적이 있다. 큰 망치로 타일을 치면 타일이 깨지면서 벽에서 떨어진다. 작은 타일 조각이 사방으로 튀어서 무척 위험한 일인데,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긴팔 셔츠와 긴바지를 입어야 했다. 난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반바지에 반팔 셔츠를 입고 마스크도 없이 들어갔다. 타일 조각이 튀면서 팔과 얼굴 등에 작은 상처가 여럿 났다. 그때 타일조각이 뺨을 베었을 때 났던 상처와 비슷한 느낌이다. 


머리만 김원준


출근 준비를 하면서 거울을 보는데, 작은 상처가 좀 신경이 쓰이긴 했다. 분명 사람들은 술 먹고 다쳤다고 한 소리씩 할텐데, 그런 얘기 듣는 건 좀 싫었다. 문득 머리가 길었다면 머리칼로 가릴 수 있었을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딱 한번 머리칼을 길러본 적이 있다. 대학 2학년때였다. 앞머리가 입술 근처까지 내려왔고, 뒷머리는 목을 덮을 정도였다. 반곱슬이라 머리카락이 길면 끝이 말려서 올라간다. 그래서 길르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그땐 그냥 좀 보기 싫어도 참고 길렀다. 나중에 많이 길러서 묶고 다닐 생각이었다. 그때 그렇게 옆머리와 뒷머리가 말려 올린 헤어스타일을 김원준이 하고 티비에 나왔다. 여동생이 그걸 보더니, 바쁜 아침에 드라이기를 가져와 내 머리를 손 봐줬다. 그러고 학교에 갔더니 '머리만' 김원준 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런데 여동생이 매일 머리를 손 봐줄 순 없었다. 내가 그런 걸 익혀야 했지만, 아무래도 안 되더라. 귀찮아서 그냥 다녔더니 점점 더 보기가 싫었다. 그 시절 했던 많은 일들은 다 여성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했던 거였다. 그런데 머리 모양이 점점 더 보기 싫어지니 더 길러야 할 이유가 없었다. 겨우 묶을 만큼 머리를 길렀던 거였는데, 결국 그만두고 말았다.


긴 머리의 소녀


실제 사귄 걸로는 첫 사랑은 아니지만, 그 전에 만났던 여성들은 그냥 잠깐씩 스쳤던 거라고 보고, 진심으로 좋아했던 걸로 첫 사랑이라 부를만한 여자아이는 머리칼이 아주 길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 아이들이 만화 라푼젤을 보고 있으면 나는 그 아이가 생각난다. 밤 12시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그 아이 학교 근처에서 기다리다가 만나, 골목길을 걸어다니며 짧은 데이트를 하기도 했고, 동전을 주머니 가득 채워 독서실 근처 공중전화 박스에서 밤새 통화를 하기도 했다. 어느 날 수화기 너머 목소리가 유난히 울리고, 말하는 중에 물소리가 들리기도 해서 뭐냐고 물었더니, 욕실에 들어와 있다고, 머리 감으면서 통화하는 거라고 했다. 머리가 길어서 머리 감는데 시간이 오래걸린다고 했다. 목욕 중이라는 말만 들어도 아랫도리에 변화가 일어날 만큼 혈기왕성한 고등학새이 아니었던가? 지금의 자세와 모습을 상상하려 애쓰면서 서너시간 통화를 했던 것 같다. 그 아이는 통화가 끝날 때까지 계속 목욕중이었으니, 서너시간 이상 목욕을 했던 거였다.


찬 바람이 한참 불었으니 지금 이맘때였던 것 같다. 함께 손 잡고 골목길을 거닐다가 그 아이의 머리칼이 바람에 날려 내 뺨을 스쳤다. 샴푸 냄새가 코를 자극했고, 부드러운 감촉이 뺨을 어루만졌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 부드러운 감촉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머리칼을 가져와 얼굴에 부비고 싶었지만, 아직 수줍었던 나는 그럴 용기가 없었다. 함께 팔짱을 끼고 걸으면 내 팔 근육을 만지곤 했다. 나도 모르게 팔과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럽게 되곤 했다. 그렇게 팔을 만지면 부끄러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다른 공간에서는 난폭한 고등학생이었건만, 왜 그 아이 앞에서는 그렇게 수줍어서 어쩔줄 모르는 소년이 되었을까? 그 아이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여전히 긴 머리칼을 바람에 날리며 환한 웃음을 짓고 있을까?


긴 머리의 남자들


내 주위 남성 중에 머리를 길게 기르고 다니는 사람이 둘 있다. 예전 출판사 겸 잡지사였던 곳의 기자 한 명은 늘 머리를 묶고 다녔다. 그렇게 묶은 걸 포니테일이라고 하던가? 일본 만화에서 '포니테일 모에'란 단어를 본 적이 있는데, 아, 내가 저런 머리 모양을 좋아하는 구나 싶었던 기억이 난다. 암튼 그 사람의 머리 모양은 늘 한결 같다. 술자리에서 왜 항상 그렇게 하고 다니냐고 물은 적이 있었는데, 머리숱이 적어서, 그냥 이렇게 다니는 것이 편해서 라고 답했다. 


가끔 만나는 후배는 등의 중간 정도까지 내려오는 정도로 머리칼을 길렀다. 그를 처음 만났던 10여 년 전에는 짧은 머리였는데, 몇 년 후에 다시 만났더니 머리를 묶고 다니고 있었다. 샴푸도 쓰지 않고 물로만 감으며, 머리가 길어도 그리 시간이 많이 걸리지도 않는다고 했다. 그 녀석에게도 왜 머리를 길르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는데, 뭐라고 답 했는지 잘 기억이 안난다. 술자리였으니, 그 녀석과 만나면 늘 많이 마시니 기억이 안 나는게 당연하겠다. 그 녀석은 머리결이 좋아서, 머리를 풀고 있을때 뒷 모습을 보면 마치 여성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키가 큰 편이긴 하지만, 날씬하니 그런 오해를 할 수도 있겠다. 어느날 여럿이 같이 등산을 하는데, 길고 굵은 나무 작대기를 하나 주워서 머리를 풀고 다니더라. 눈 버린다고 제발 좀 머리를 묶으라고 갈궈도 전혀 듣지 않았다. 


노래와 책


 

요즘 친구에게 받은 이 노래를 계속 반복해서 듣는다. 목소리가 참 좋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은 한편으로 참 가슴 벅찬 일이지만, 또 한편으로 참 쓸쓸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너무나도 행복한 일이지만, 너무나도 불안한 일이기도 하다. 마치 하늘을 나는 것처럼 즐거운 일이지만,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아픈 일이기도 하다. 두근두근 가슴이 뛰는 설레임이 있지만, 왠지 슬픈 일이 생길 것만 같고, 왠지 아픈 일이 생길 것만 같은 두려움도 있다. 


그래도 나는 다시 사랑을 해보고 싶다.
















시이소오님의 서재에서 보고 찜했다. 안 읽은 책도 많고, 책 읽을 여유도 없건만 이 책을 보자마자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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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6-11-09 0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께서 삼합을 드셨군요^^: 저는 맛을 잘 몰라서 홍어만 먹지는 못하는데, 삼합으로 먹으면 맛있더라구요^^

감은빛 2016-11-11 10:27   좋아요 1 | URL
네, 삼합을 먹었어요. 엄청 맛있었어요.
홍어만 먹어도 좋아하고, 홍어애탕도 좋아해요.
홍어도 좋지만, 홍어랑 먹는 막걸리가 더 좋죠! ^^

다락방 2016-11-09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감은빛님의 페이퍼를 읽으니,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의 이 구절이 생각나네요.

`종종 그 여자를 달로 보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꼭 그 마음만큼 그 여자를 달에서 도로 데려오고 싶어진다.-178쪽`

영어판에서는 이렇게 써있어요.

She teases me, irritates me-at times I could boot her into cyberspace, but then I`m just as eager to get her back again. I need her here on earth, you see. (p.120)

감은빛 2016-11-11 10:29   좋아요 0 | URL
오! 영어로 읽으니 그 뜻이 더 와닿네요.

문득 원서인 독어판은 어떨지도 궁금하네요.

인용하신 문구를 나중에 책에서 찾아볼게요.

시이소오 2016-11-09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머니에든 동전이 짤랑짤랑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네요.
제 이름이 나와서 깜놀했어요. 영광입니다. ^^
프로이트와 츠바이크와 함께
즐거운 독서 되시길 ^^

감은빛 2016-11-11 10:30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시이소님.
덕분에 좋은 책을 만날 수 있어 고맙습니다! ^^

비공개 2016-11-11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츠바이크가 쓴 모든 전기들을 저도 ‘언젠간 읽을 책들‘로 정해두었답니다 ㅎㅎ

감은빛 2016-11-11 14:15   좋아요 0 | URL
저도요. ‘언젠가‘이긴 하지만, 읽으려고 사 모으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