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연속 삽질


어느날 제보가 들어왔다. 감자를 수확한 이후 한동안 바빠서 방치해 둔 텃밭이 거의 밀림 수준으로 풀이 자라고 있는 사진이었다. '녹색당'이라고 명패를 꽂아둔 텃밭이 방치된 모습을 사진으로 보니 무척 부끄러웠다. 명패가 없으면 몰라도, 생명의 정당 녹색당에서 텃밭을 방치한다는 소문이 돌면 곤란하다. 마침 무와 배추를 심어 가을 농사를 제대로 지어보자는 당원들의 뜻이 모였다. 일요일에 밭을 갈아엎고 가을농사 준비를 하기로 했다.


다만 다른 당원들은 비교적 선선한 오전에 밭일을 하길 원했으나, 나는 토요일에 녹색당 전국운영위원회에 참가했다가 밤 늦게 서울로 올라올 예정이라, 일요일 아침에는 도저히 일어날 자신이 없었다. 사실 평일에는 늘 잠이 모자라기 때문에 주말에는 늦잠을 좀 자야하는데, 토요일 전국운영위 회의에 일요일 텃밭이라니! 어쨌거나 의무감에 참가를 약속했다.


일요일 낮, 아이들과 함께 텃밭에 갔다. 아이들은 알아서 뛰어 놀기 시작했고, 나는 또 한 명의 남성 당원과 함께 밀림으로 변한 텃밭의 풀들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한참 정신없이 풀과 사투를 벌이다가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어렸을 때 동네 뒷산에는 도둑가시풀이 많았다.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길을 가다 옷에 도둑가시가 붙으면, 튼튼한 나뭇가지를 구해 전투를 시작했다. 마치 지구를 침략한 외계인을 물리치는 것처럼 도둑가시와 치열한 싸움을 벌이곤 했다. 당시에는 티비에서 외화시리즈 V를 보여주던 때였다. 넓은 들판을 가득 덮은 도둑가시는 외계인이었고, 나는 '칼'이나 '도노반'이었다. 간혹 친구가 전투에 동참할 때는 서로 '도노반'을 맡겠다고 내분이 일어나기도 했다. 아마 초가을 무렵이 아니었을까 싶다. 학교를 마치면 매일 전투에 몰입하곤 했다. 넓은 들판의 도둑가시를 다 없앨 때까지 싸움을 이어갈 생각이었을 것이다.


오전반이었던 아이가 오후반이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갈 때까지도 들판에서 나무가지를 휘두르고 있었고, 어느날은 해가 저문 후에도 한 마리의 외계인이라도 더 죽이고 가려고 지친 팔을 휘두르기도 했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며칠동안 전투를 벌였건만, 외계인의 세력은 전혀 줄지 않아 보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그 싸움에 지쳐 결국은 포기해버렸으리라.


한참 딴 생각을 하다가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밀림이 정리가 되어 있었다. 이제 눈에 보이는 줄기를 뽑아 냈으니, 땅을 갈아 엎을 차례다. 삽질을 시작했다. 햇빛은 뜨거웠고, 날은 더웠다. 몇 번의 삽질만으로 옷은 땀으로 완전히 젖어버렸다. 머리칼을 타고 흐른 땀이 안경 위로 뚝 떨어진다. 같이 삽질하던 친구는 비료 포대를 가지러 갔고, 잠시 후 여성 당원이 왔다. 내 몰골을 보고 도와주겠다며 삽을 들었지만, 잡풀들의 뿌리로 얽힌 땅에 삽이 쉽게 들어가지 않았다. 몇 차례의 시도 끝에 그는 삽을 포기하고 다른 일을 거들기로 했다.


도시에서 나고 자라 농사라곤 농활 몇 번 가본 게 다였다. 잠시 농사짓는 마을에서 살았어도, 직업은 활동가였던 터라 시내에 있는 사무실에 출근했기 때문에 농사의 농자도 몰랐다. 몇 해 동안 텃밭 일구는 일을 거들기는 했지만, 늘 누군가 시키는대로 힘쓰는 역할만 했다. 일의 요령이 없었기 때문에 몸은 더 힘들기 마련이다. 마침내 한 차례 밭을 갈아엎고, 비료를 뿌리고 다시 흙을 골고루 섞어주면서 평평하게 만드는 작업을 했다.


다음날 어깨와 등에 근육통이 느껴졌다. 평소 운동할 때 쓰는 근육에서 느껴지는 기분좋은 뻐근함이 아니라 제법 날카로운 통증이었다. 덕분에 운동을 이틀 쉬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방과후 협동조합 아이들이 분양받은 텃밭을 갈아 엎어야 한다는 연락이 왔다. 지난 주말 녹색당 텃밭 갈아엎고 근육통이 왔었다고 하소연 했지만, 일할 사람이 없었다. 이번 주를 지나면 무, 배추를 심기에 너무 늦어진다. 하지만 시간을 낼 수 있는 부모가 없었다. 하긴 아이들 텃밭은 몇 평 되지도 않는다. 잠시 힘쓰고 맛있는 장작구이집에 가기로 약속했다.


다행히 이번 토요일에 함께 삽질한 분은 텃밭 경험이 많았다. 텃밭에 가면 재미없다고 따라가지 않겠다는 아이들을 억지로 꼬셔서 가느라 약속시간보다 좀 늦었는데, 이미 그 분이 절반이상 해놓은 상태였다. 미안한 마음에 열심히 삽질을 했다. 확실히 지난 주에 한 번 삽질을 했기 때문에 요령이 생겼다. 밭도 훨씬 작았고, 유능한 경험자와 함께였기 때문에 수월하게 작업을 마쳤다. 즐겁게 땀흘린 후에 시원한 맥주 한 잔! 기분 좋은 토요일이었다.


바로 다음날, 일요일에는 지난 주 갈아엎은 녹색당 텃밭에 무와 배추를 심으러 갔다. 아이들은 이번에야 말로 절대 따라가지 않겠다고,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아내는 다른 일로 외출을 해야 하고, 나도 약속된 시간이 다 되었건만,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집에 있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냥 내버려두고 가려다가도 밥 때문에 계속 맘이 쓰였다. 지들끼리 뭐 제대로 챙겨먹을 수 있나 싶은 걱정이 드는 것이다. 아무리 달래고 유혹해도 안 통하길래 결국 두고 나왔다. 하긴 나는 훨씬 더 어렸을 때부터 맞벌이 하는 부모님 대신 나와 동생 밥을 챙겼다. 그 나이에 아직 라면 하나 못 끓이는 큰 아이를 보면서 미리 하나씩 가르쳤어야 했나 싶기도 했다.


오래된 미래
















텃밭에는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여사가 와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았다. 사람들은 호지 여사와 함께 산책을 하고, 정자 앞에 모여 여사의 말씀을 들었다. 나는 먼 발치에서 그 모습을 보다가 배추 모종 심기에 집중했다. 


나중에 행사를 마무리 지으면서 다같이 손잡고 '지구와 우리를 위로하는 몸짓'인 생명의 춤을 추었다. 그때 여기저기 밭에서 일을 마무리하던 녹색당 당원들도 춤을 추러 갔는데, 나는 남은 배추 모종을 마저 심느라 남았다. 사람들은 호지 여사와 함께 춤을 추고 나서, 기념사진도 찍었다. 나중에 왜 기념사진 찍으러 안 왔냐고 묻길래, 별로 같이 사진 찍고 싶지 않다고 답했다.


사실 호지 여사에 대해 조금 석연찮은 점이 있다. 녹색평론에서 [오래된 미래]가 나와 널리 알려지고, 필독서가 되었건만, 어쩐 일인지 호지여사는 판권을 중앙북스로 넘겨버린다. 녹색평론에서 10년간 좋은 책을 알리고 판매했건만, 전혀 어울리지 않는 대규모 상업 출판사에 판권을 넘겨버리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 이유가 돈 때문이라는 것은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저작권료를 둘러싼 호지 여사와 김종철 선생과의 상황에 대해서는 몇 개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두 사람은 서로 소통하던 사이였고, 충분히 대화를 통해 풀어갈 수도 있는 상황이라 생각되는데, 일방적으로 판권을 넘긴 것은 이해할 수 없다. 게다가 그 후 중앙에서 나온 책의 꼴을 보면서 더 기분이 나빴다. 정말 제목과는 어울리지 않는 책이었다.


예전에 샀던 녹색평론사 판 [오래된 미래]가 어느 날 보니 없어졌더라. 누군가에게 빌려줬던 걸까? 다시 사려고 하다가 중앙북스 판은 아무래도 사기 싫더라. 이 책의 정신에 위배되는 출판사에서 나온 책을 산다는 것은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중앙이란 말이다. 중앙!) 아무리 훌륭한 책이라도 시공사에 나온 책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중앙도 마찬가지다. 이 글에 절판된 녹색평론사 판 표지를 첨부한 것도 중앙북스의 책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텃밭 일을 끝내고, 다시 긴 회의를 하고, 저녁 늦게 간단하게 밥과 맥주를 먹으면서 그 이야기를 했다. 이 책은 한동안 나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책이다. 다시 녹색평론사로 돌아가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중앙이 아닌 다른 출판사에서 나오기 전에는 없는 책이나 마찬가지다. 안타깝다.


※ 함께 배추 모종을 심던 당원이 "저 연세에도 저렇게 열심히 활동하는 모습은 존경스럽다." 고 말했다. 먼 발치에서 호지 여사를 보면서 나도 같은 생각을 했다.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과연 나는 저 나이에 저렇게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봤다. 글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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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5-09-07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저도 기회가 되면 텃밭구경 꼭 가고 싶네요 ^^ 해가 그래도 엄청 뜨겁던데 고생하셨겠어요.

오래된미래 출판권이 넘어간 과정 정말 생각하면 속상하지요.. 저희집에 있나 좀 뒤져봐야겠네요.

감은빛 2015-09-07 18:16   좋아요 0 | URL
무, 배추가 잘 자라야 부끄럽지 않을텐데,
바쁘기도하고, 게으르기도하고, 과연 잘 자랄지 모르겠네요. 작년엔 경험 많으신 선배 당원님께서 배추를 훌륭하게 키워주셔서 당원들이 같이 김장도 했어요. ^^

북극곰 2015-09-07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된 미래의 판권이 중앙에 팔렸군요....

감은빛 2015-09-08 14:14   좋아요 0 | URL
어제 퇴근길에 스마트폰으로 답을 달았었는데,
오늘보니 없어졌네요. ㅠㅠ

아마 2007년인가 2008년인가 그랬을 겁니다.
이 책은 호지 여사가 카피레프트 차원에서 다른 나라에서
출판할 때 판권 계약을 하지 않았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녹색평론에서 90년대 중반에 책을 낼 때 당시에
김종철 선생님과 합의가 있었고,
다른 나라의 경우처럼 판권 계약 없이, 저자의 허락을 받고
책을 출판했고, 녹색평론 덕분에 책이 널리 알려지고,
필독서가 되었고, 책도 많이 팔렸습니다.

그런데 10년 뒤에 갑자기 돈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중앙북스에 판권을 넘긴 겁니다.
김종철 선생은 비록 판권 계약은 하지 않았지만,
비정기적으로 호지여사에게 후원금을 보냈다고 합니다.
돈이 필요하다면 출판사를 바꾸기 전에 먼저
논의를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렇게 뒤통수를 치듯이 판권을 팔아버리는 건 이해하기 어려운 태도지요.

비로그인 2015-09-07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 고생하셨네요 ㅠ 저도 얼마전에 무와 배추를 심었어요~밭은 조금만 잊어버리고 있어도 풀이 무성해져서 끊임없이 부지런해지라고 넋놓고 있지 말라고 하는 것 같아요
오래된 미래엔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ㅠㅠ

감은빛 2015-09-08 14:16   좋아요 0 | URL
네 밭은 돌아서면 풀이 무성하게 자라더군요.
아른님의 무와 배추가 튼실하게 잘 자라길 바랍니다! ^^

많이들 아시는 줄 알고, 일부러 글에 자세히 쓰지 않았는데,
잘 모르시는 분이 많군요.
요 위에 북극곰님께 댓글로 달았습니다.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아무개 2015-09-08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오래된 미래 판권이 팔렸어요?
전혀 모르고 있었네요.....
호지 여사님의 속사정이야 알수는 없지만
좀 속상하긴 하네요. 그것도 중앙이라니..

감은빛 2015-09-08 14:21   좋아요 0 | URL
아무개님도 모르셨군요.
제 주변에는 상황을 아는 사람들이 많아서,
대부분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요 위에 북극곰님께 답글을 달았습니다.
당시 상황이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추측입니다만, 아마 호지 여사가 우리나라에 방문했을 때,
누군가 녹색평론을 비난하고,
중앙북스를 추천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어쨌거나 그런 선택을 했다는 것은
납득도 용납도 하기 어렵습니다.
저에게 저 책은 이제 없는 책이나 마찬가지입니다.

transient-guest 2015-09-09 0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운동을 아무리 해도 일에서 생기는 근육과는 다른 듯, 한번 일을 하고 나면 아주 힘들게 마련입니다.ㅎㅎ 농사는 너무 어렵잖아요. 저는 시공사에서 나오는 책을 다른 출판사에서 내주었으면 합니다. 사고 싶지 않은데, 실천할 수가 없어서 늘 전두환 아들내미한테 돈을 갖다 주는 기분이 썩 좋지는 않습니다.-_-: 푹 쉬고 다시 운동하시기 바랍니다. 건강하세요.

북극곰 2015-09-09 09:09   좋아요 0 | URL
맞아요. 시공이 돈이 많아 그런지 특히 아이들 책은 탐나는 것들이 많거든요. 시공사 건 가끔 중고로만 사주긴하지만 그래도 중고책에서 잘팔리는 것도 결국엔 새책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서 찜찜합니다.

감은빛 2015-09-14 15:53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일(노동)을 해서 생기는 근육은 운동으로 만든 근육과 다르겠군요.
일을 할때는 운동할때처럼 단순한 동작이 아니라,
훨씬 복합적인 동작을 해야 하니까요.

저도 게스트님과 북극곰님처럼
시공사에서 좋은 책이 나올 때마다 안타깝습니다.
어린이 책 중에는 정말 좋은 책이 많이 나오는데,
아이들에게 꼭 읽어주고 싶은 책이 있어도
그냥 외면할 수 밖에 없습니다. ㅠㅠ

yamoo 2015-09-12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 오래된 미래 판권이 팔렸군요!

감은빛 님 고생하시네요. 꼭 건강챙기시길!

감은빛 2015-09-14 15:54   좋아요 0 | URL
야무님도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