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20년 만에 영화 [타락천사]를 봤다. 한창 젊었던 시절 봤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당시 그 영화를 보고나서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는 이가흔의 섹시한 눈빛 때문에 밤마다 꿈에 그가 나왔었다. 이번에는 그를 봐도 그저 섹시하다! 예쁘다! 정도의 느낌만 있었을 뿐, 그때와 같은 강렬한 인상을 받지는 못했다. 좀 놀라운 사실은, 등장인물 대다수가 시도때도 없이 담배를 물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끝없이 담배를 피우고 또 피웠다. 한때 우리나라 영화나 드라마에도 담배를 피우는 장면이 제법 많았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내가 소설이랍시고 쓴 허접한 글에도 늘 담배 피우는 장면은 빠지지 않았었다. 지금 보면 이렇게 낯설지만, 당시로서는 크게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이가흔이 여명의 방을 청소하고, 그 쓰레기를 가져와 하나씩 살펴보는 장면을 보다가 소설 하나를 떠올렸다. 90년대에 내가 참 좋아했던 작가 하성란의 단편 [곰팡이 꽃]이다. 여기 주인공은 밤마다 쓰레기를 뒤진다. 더럽고 역겨운 쓰레기 속에서 그는 쓰레기를 버린 사람에 대해 아주 많은 것들을 알아낸다. 처음 이 작품을 읽었던 당시에 진짜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아마 이 작품의 영향일 것이다. 지금도 나는 쓰레기봉투에 개인정보가 담긴 내용은 버리지 않으려고 애쓴다. 별 것 아닌 흔히 사소한 거라고 느낄만한 것이라도 누군가가 마음 먹으면 내 개인정보를 노출하게 될 수도 있다.
하성란 작가는 97년 [두 개의 다우징]을 읽고 완전히 반해, [풀]을 찾아 읽고 나중에 단편집 [루빈의 술잔]을 사서 읽었던, 그 당시에 가장 좋아했던 작가였다. 그 특유의 섬세한 묘사와 마치 영화와도 같은 전개가 인상적이었다. 세번째 단편집 [푸른 수염의 첫번째 아내]가 나올 때까지 하나도 빼지 않고 다 찾아 읽던 작가였다. 단편들은 대부분 재미있고, 일정한 수준을 유지했지만, 장편의 경우에는 구성과 이야기 전개가 다소 힘이 없었다. 이후 소위 말하는 순수 문학 자체에 대한 관심을 잃으면서 더이상 작품을 찾아 읽지 않았다.
타락천사를 본 후에 곰팡이 꽃을 찾아 읽으려고 책장을 뒤졌는데 없었다. 분명 이 작품이 실린 두 책(동인문학상 수상작품집과 두번째 단편집 옆집여자)을 다 사서 읽은 기억이 있는데, 왜 하나도 보이지 않을까? 그제서야 떠올렸다. 아마 고향 집에 있을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고향을 떠나 여기저기 떠돌던 시절에는 그 전까지 열심히 읽었던 소설들을 대부분 집에서 갖고 오지 않았다. 읽고 싶을 때 못 읽는 건 괴로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일상으로 돌아온 후로는 곧 읽고 싶었다는 사실조차도 잊어버린다.
몇 달 전에 서울연구원에서 쓰레기 정책에 대해 연구하는 분의 강연을 들었는데, 정부나 지자체에서 쓰레기 실명제를 하려는 생각을 예전부터 갖고 있으나, 사회적으로 큰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당장 실행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 지금도 재활용 쓰레기나 종량제 봉투를 뒤지면 그게 누구 쓰레기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그 집에 몇 명이 살고, 구성원이 어떤 사람들인지, 수입은 대략 어느 정도일지, 주로 어디에 돈을 쓰는지 등을 알 수도 있다. 만약 쓰레기 실명제를 시행한다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개인정보 유출로 이어질 지도 모른다.
바다 위에 플라스틱으로 된 섬이 있다는 이야기, 인도나 아프리카 등에서 쓰레기 더미를 뒤지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아이들의 이야기, 아니 먼 나라 이야기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바닷가나 계곡에 구석구석 쌓여있는 쓰레기들, 그런 쓰레기들 때문에 다치거나 삶을 위협받는 생물들 또 하루에도 수십만 개씩 생산하고 또 버리는 온갖 일회용품들을 생각하면 쓰레기 문제를 쉽게 넘기기 어렵다. 아는 사람 중에 늘 숟가락과 반찬통을 갖고 다니는 분이 있다. 일회용 젓가락이나 용기를 쓰지 않기 위해서다. 물론 당연히 텀블러와 장바구니, 손수건을 갖고 다니는 건 기본이다. 나도 가끔 깜빡하는 날을 제외하면 요 세 개는 늘 휴대한다. 하지만 그래도 세상은 일회용품과 쓰레기로 넘쳐난다. 아무리 커피를 주문하고 텀블러를 내밀어도, 커피숍에서 사용하는 일회용컵은 줄어들지 않고 더더욱 늘어나기만 한다. 예전에는 그래도 들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매장에서 마시는 경우 당연히 머그 컵에 나왔는데, 요즘은 매장에서 마셔도 늘 종이컵에 나온다.
쓰레기를 줄여야 한다. 줄이지 못한다면 정부가 어떤 이유를 들어 쓰레기 실명제를 실시하고, 우리들의 일상을 점점 더 많이 통제해도 뭐라 할 말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 양철나무꾼님의 댓글을 보고 생각나서 영화에서 '망기타(忘记他)'가 나오던 장면을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