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워요. 안아주세요.

꿈을 꾸었다. 차가워 바람이 얼굴을 때리고 지나가 무척 추웠다. 나는 눈이 가득 쌓인 어느 넓은 공간에서 길을 찾고 있었다. 걷고 또 걸어도 그 공간을 벗어나지 못했다. 무한히 반복되는 어느 지옥인듯, 저주 혹은 마법에 걸린 듯, 나는 살을 에는 추위 속에 갇혀 있었다. 왜 그렇게 거길 걷고 있었던 것인지, 목적지가 어디였는지 등은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나는 누군가를 찾아가고 있었다. 추위에 몸이 얼어붙고, 오래 걸은 탓에 너무 지쳐 나는 결국 눈 위에 쓰러졌다. 잠시 눈을 감았다 떴을 때, 공간이 드넓은 눈 쌓인 평야에서 바닷가 언덕으로 바뀌어 있었다. 탁 트인 넓은 바다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어느 큰 나무 아래 누워있었고, 누군가 내 곁에서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래. 그 부분은 그렇게 바꾸는 것이 좋겠어. 아니. 거기는 고치지 말라고 저번에 말했잖아. 어. 그래. 그래. 그렇게 해줘. 여성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약간 짜증이 묻어 있었다. 누구와 무슨 통화를 하는지 궁금했지만 내 시야에 그 사람이 보이지는 않았다. 아니, 그가 누군지 더 궁금해야 했다고 꿈을 깬 후에 생각했지만, 꿈 속의 나는 마치 그를 아는 듯, 그가 누구인지 궁금하지는 않았다. 나는 누워있다가 몸을 일으켰고, 그제서야 전화기를 들고 있는 그를 보았다. 그는 내가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전화를 끊었고 곧 내게 다가왔다. 넓고 푸른 바다와 그만큼 넓고 파란 하늘이 시야를 가득 채웠고, 강한 바다 바람이 그의 머리칼과 내 머리칼을 날렸다. 내게 다가오는 그의 머리 뒤쪽에 해가 있어서, 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마구 날려서 그의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내게 다가와 내 귀에 입술을 가까이 대고 말했다. 추워요. 안아주세요. 그리고 잠에서 깼다.

깨고 보니 나는 이불을 차고 맨 몸으로 자고 있었다. 그래서 추웠구나. 화장실을 다녀오면서 보일러 온도를 올렸다.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가 꿈의 여운에 잠시 빠져있었다. 익숙한 목소리라고 꿈 속의 나는 생각했지만, 깨고 나니 그 목소리가 누군지 기억하지 못했다. 얼굴은 보지 못 했다. 꿈 속의 나는 그 존재 자체를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아마 내가 그 눈 쌓인 평원을 헤매어 찾아가던 이가 그였던 것일까? 갈증을 느껴 물을 마시고 시간을 확인한 후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휴대폰을 찾아 오늘 일정을 보았다. 일터의 일정은 두어개 있었고, 개인 일정은 없었다. 더 자야지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다시 잠들면 그 장면에 이어서 계속 꿈을 꿀 수 있을까? 간혹 그런 날들이 있었다. 꿈에서 깼다가 비몽사몽 간에 잠시 알람을 끄거나 화장실을 다녀온 후 다시 잠들었을 때 그 다음 장면으로 이어지거나 같은 장면을 조금 다르게 다시 반복하거나.

다시 꿈 속에서 그를 만나 그가 누구인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눈을 감고 있어도 잠이 들지는 못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깜깜한 창 밖을 보며, 꿈에서 보았던 바다 풍경을 떠올렸다. 최근에 꿈에서 바다를 자주 보았던 것 같다. 실제로는 마지막으로 바다를 보았던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부산이었다면,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바다를 볼 수 있었다. 중학생이었던 시절에는 산 허리에 있었던 우리 집에서 저 멀리 바다가 보였다. 집은 좁고 낡았지만, 그 풍경 하나만은 참 좋았다.

생각이 부산으로 이어졌을 때, 문득 기억났다. 꿈에서 깨기 직전 들었던 귓속말. 추워요. 안아주세요. 라는 말.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 때 나는 선수촌을 방문하는 귀빈들에게 영어 통역을 하는 자원봉사를 했었다. 영어를 그 정도로 잘 하지는 못했지만, 큰 역할은 선수촌을 소개하는 것이어서 그 정도는 외워서 할 수 있었고, 간단한 질문에는 대답이 정해져 있었다. 게다가 우리 팀에는 미국에 살다와서 영어를 정말 잘하는 친구가 있어서 대부분 중요한 사람들이 방문했을 때에는 그 친구가 메인으로 나갔고, 나를 비롯해 나머지 사람들은 보조로 귀빈을 모시고 온 일행들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곤 했다. 실제로 내가 메인을 맡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우리 팀은 영어를 주로 하는 이들이 서너명, 중국어가 한 명, 일본어가 아마 두 명이었고, 아랍어를 맡은 여대생이 여러 명 있었다. 부산 외국어대학교 아랍어 전공 학생들이었다. 정확하게 기억하는 건 아니지만 이 아이들은 대부분 신입생이어서 아랍어를 썩 잘하지는 못 했다. 그래서 아랍어를 사용하는 나라의 귀빈들이 와도 메인은 아까 말한 영어를 네이티브 처럼 하는 친구가 맡았고, 이 여학생들은 보조만 맡았었다.

기억나는 상황 중 하나는 이 친구들이 젊고 예뻐서 아랍쪽 수행원들 중 귀족(혹은 왕족) 남성들이 자주 꼬드기곤 했다는 것. 일부다처제 국가에서 온 어느 왕족이 자신의 일곱번째(혹은 여덟번째) 아내가 되면 평생 돈 걱정 없이 잘 살 수 있다고 꼬드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실제로 이 사람은 꽃다발을 들고 몇 번이나 찾아와서 나도 그 털이 많은 외모를 기억한다. 이 여학생 무리(아마 서너명이었던 것 같다.)에서 거의 유일하게 신입생이 아닌, 즉 2학년 혹은 3학년이었던 여성이 있었다. 이 친구는 활달해서 우리 팀의 다른 남성들(대부분 나처럼 복학생이라 나이가 많았던)과도 친하게 지냈었다. 그는 귀빈이 방문하지 않아 쉬는 시간일 때, 주로 다른 팀원들에게 다른 언어를 알려달라고 하기도 했었는데, 가장 먼저 배우고 싶은 말이 저거였다. 추워요. 안아주세요. 그는 이 말을 거의 모든 언어로 다 익혀서 어느 나라 남성을 만나더라도 이 말 한 마디로 꼬실 수 있다고 믿었다. 당시는 더운 여름이었다. 우리가 대기하던 사무실에는 에어컨도 없이 더운 바람만 나오는 선풍기 두 대가 전부였다. 차라리 선수촌 외곽 나무 그늘에 나가 있는 것이 더 시원했다. 그런 때에 그는 우리 앞에서 마치 추위에 떨듯 몸을 떠는 연기를 펼치며, 영어와 일어, 중국어 등으로 추워요. 안아주세요. 라는 말을 과장스럽게 말했다.

지금 기억을 아무리 떠올려봐도 이 아이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 이 외대 학생들 무리 중 그나마 나와 대화를 가장 많이 했던 아이였을텐데. 어렴풋이 얼굴이 기억나는 건, 신입생 중 가장 예뻤던, 그래서 아까 어느 일부다처제 국가 왕족이 여러 번 찾아왔었던 아이 밖에 없다. 콧등이 오똑하고 눈이 깊고 컸던 얼굴이 떠오른다.

꿈 속에서 저 귓속말을 했던 그는 과거 선수촌 귀빈팀의 그 학생들 중 누구도 아니었을 것이다. 얼굴은 보지 못 했지만 느낌이 그랬다. 아마도 어쩌면 실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인물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기억나지 않는 꿈 속의 인물을 떠올리려 노력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다만 꿈 속의 그 바다 풍경이 더 잊히지 않는다. 이번 주말에는 차를 빌려 겨울 바다를 보러 가보고 싶어졌다. 이제 여의도에 나가지 않아도 되니까. 아, 헌재 앞에는 좀 더 있다가 나가도 괜찮지 않을까.

안주가 친절하고, 사장님이 맛있어요.

어제 어느 유흥가 술집 앞을 지나며 본 문구다. 이거 말고도 말이 되지 않는 다른 문구들도 더 붙어 있었는데, 이 말이 제일 어이가 없어서 기억해두었다. 안주가 어떻게 친절할 수 있으며, 사장님이 왜 맛있을까? 먹어봤나? 이런 말이 안되는 문구를 붙여놓으면 젊은 친구들이 재미있다고 막 찾아오려나? 나라면 오히려 더 안 갈 것 같은데.

가끔 온라인에서 요즘 젊은 사람들이 자주 쓰는 말들 중,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는 단어들을 만나기도 한다. 검색해서 알 수 있는 것들도 있지만, 검색을 해봐도 딱 명확한 뜻을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어떤 때에는 아이들에게 물어보기도 했는데, 아이들도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 하더라. 그런데 최근에 보면 유행하는 어떤 표현들, 밈이라 부르는 것들을 온라인이 아닌 일상에서도 자주 쓰는 것을 볼 수 있다. 아주 옛날식으로 생각해보면 유행어 같은 것이려나. 옛날에도 주로 티비에 나오는 유명한 배우나 코미디언들의 유행어가 있었다. 그것들과 요즘 주로 사용하는 밈들은 어떻게 다를까? 또 얼마나 비슷할까?

티비가 없고 남들이 자주 본다는 예능 프로그램이나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는 나는 사람들의 수다에 잘 끼어들지 못한다. 예를 들면 최근에 사람들이 이븐하게 라는 아니 이분하게 라고 써야하나? 암튼 이 말을 자주 쓰던데, 이게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 어떤 상황에서 쓰는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남들은 다 웃고 있는데, 나 혼자 멍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 웃고 떠들던 사람들도 나 때문에 흥이 깨져 버리곤 한다. 그래서 내가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으면 약간 질린 표정으로 그냥 그런 게 있어요. 하고 만다.

지금 읽고 있는 책들

북플에서 글을 쓸 때는 피씨에서 쓸 때와 달리 여러 책들을 본문에 넣기가 불편하네. 책을 가져올 때마다 별점을 체크해야만 할 것 처럼 만들어놓았다. 지난 달 SF읽기 모임은 다들 일정이 생겨 한 달 뒤로 미뤘는데, 이번 달에는 윤석열 때문에 또 모임이 미뤄지고 있다. 이 책 [어둠의 속도]를 아직 다 읽지 못해 다행일 수도 있는데, 얼른 이 책을 마치고 다른 작가로 넘어가고 싶은 마음도 크다.

누군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 중에 한 권만 추천한다면, [가면 산장 살인 사건]을 권한다고 하길래, 곧바로 구매했다. 확실히 몰입감이 대단한 이야기다. 다만, 급한 일 때문에 잠시 미뤄뒀다가 나중에 한 번에 읽을 여유가 생길 때 읽어야지 하고 미룬지 조금 시간이 지났다. 과연 어떤 반전이 기다리고 있으리 기대가 크다.

아직 제대로 읽지 못한 작가들 중, 가장 읽고 싶은 작가는 어슐러 K 르 귄이다. [어둠의 왼손]이라는 유명한 책을 읽고 싶으나, 평생 전두환 아들 출판사 책은 사지도 읽지도 않겠다고 마음 먹고 20년 훨씬 넘게 그 다짐을 지키고 있는 상황이라 읽지 못하고 있다. 그럴 확률은 희박하지만, 혹시 시공사가 망하거나(제발 그랬으면 좋겠지만!) 시공사가 르 귄의 판권을 모두 포기하거나 할 날을 기다리고 있는데, 과연 내가 죽기 전에 그런 날이 올지 모르겠다. 누군가는 그냥 빌려 읽으면 되지 않냐고 말했는데, 그 이름이 박힌 책을 손에 쥐고 싶지 않은 내 기분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아, 물론 전재국이 시공사를 팔아치웠다는 기사를 읽기는 했지만, 그 이면에 어떤 속사정이 있는지 알 수 없고, 시공사 외의 다른 출판사와 유통사는 그대로 갖고 있는 사실을 보면 대외적으로만 매각한 것으로 하고, 뒤로는 어떤 다른 형태의 거래가 있었을 수도 있다고 본다. 설사 완전히 팔았다고 해도 긴 시간 전두환 부정 축재 재산을 기반으로 설립하고 성장한 출판사라는 사실은 변함 없으므로 시공사 책을 사거나 읽을 수는 없다.

거의 20년 가까이 지켰던 삼성 불매는 엘지가 휴대폰을 만들지 않아서 무너질 위기에 처했었고, 값싸고 성능이 괜찮다는 중국산 폰으로 몇 해를 더 버텼는데, 이게 가성비는 좋지만 본질적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한계들이 있어서 결국 다른 대안을 찾지 못하고 삼성 휴대폰과 태블릿을 구매하며 깨졌다. 그럼 시공사 불매도 그냥 깨버리면 되는 것 아닌가 싶긴 한데, 아직은 그러고 싶지 않은 것이 내 마음이다. 긴 시간 지켜온 삼성 불매를 깰 때의 그 마음이 참 쉽지 않았다. 정말 전화도 많이 하고, 이동 중에 휴대폰으로 업무도 많이 보는 상황이라, 본질적인 기능에서 다른 대안을 찾을 수 없었다. 아이폰은 일단 가격에서 내가 감당하기 어려웠고, 안 써봤지만 그게 참 쉽지 않다고 내 주위 아이폰 이용자들을 보면서 느꼈기 때문에 고려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암튼 르 귄의 책들을 계속 포기하고 살았는데, 그래서 검색해 볼 생각도 못하고 지냈는데, 이번에 검색해보니 황금가지 출판사에서 낸 책들이 여러 권 있었다. 그리고 어스시 전집을 보았다. 음, 이건 지난 1년간 고생한 나에게 주는 선물이야. 라고 나를 설득하며, 빠른 속도로 장바구니에 담고 결제했다. 이번 연말에는 사람들과 어울리기 보다는 조용히 책이랑 지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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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12-19 1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스시가 그렇게 좋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신뢰하는 친구로부터 강한 추천을 받아 사두었는데 아직 읽지는 못했습니다. ㅎㅎ

감은빛 2024-12-19 22:12   좋아요 0 | URL
오늘 책 받았어요. 제가 먼저 읽을게요. 물론 시간이 걸릴테니 그 중간에 다락방님께서 먼저 마치실 수도 있겠지만. ㅎㅎ

잉크냄새 2024-12-19 12: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아직 삼성 불매 쭉 이어가고 있어요. 그다지 고민할 만한 제품도 없지만요.

감은빛 2024-12-19 22:14   좋아요 0 | URL
부럽습니다. 잉크냄새님. 그렇다면 혹시 휴대폰은 아이폰을 쓰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드네요. 이 글에도 썼지만, 당시에 정말 열심히 알아봤는데, 아이폰을 제외하면 삼성 밖에 답을 찾지 못했거든요.

transient-guest 2024-12-27 04: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르귄의 책은 다 좋아하는데 어스시는 그 중에서도 가장 좋아합니다. 판타지와 함께 더욱 묵직한 느낌을 주는 것 같습니다

감은빛 2024-12-27 06:14   좋아요 1 | URL
네, 어스시는 좀 여유가 있을 때 확 몰아서 읽고 싶어서 아직 아껴두고 있어요. 요즘은 이런 저런 상황 때문에 가볍게는 읽어도 막 몰입하기 쉽지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