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주 운동
퇴근 후 운동하러 갈 생각이었다. 운동은 공복에 하는 것이 좋긴 하지만 운동 시작시간인 저녁 7시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 운동 중에 도무지 힘이 안나는 것 같고, 운동을 마치고 씻고 나서 9시경 저녁을 먹으면 너무 배가 고파 오히려 과식을 하는 것 같다. 가능하면 너댓시쯤 간단하게 뭔가 먹어주는 게 좋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일하다가 뭘 간단히 먹기는 쉽지 않다. 사무실 근처에는 빵 가게가 여럿 있는데, 이상하게 나이 먹어가면서 빵에 손이 안가게 되더라. 어릴 때는 무척 좋아했었는데. 어제 5시가 되기 직전쯤 뭘 간단히 위장에 집어넣어줄까 고민을 하는데, 갑자기 사장님께서 1시간 일찍 정리하고 간단하게 한잔 하자고 묻는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좋다고 하고, 나도 일찍 마치는 걸 마다할 이유는 없다. 다만 앞에 간단히란 단어가 붙긴 했지만 한잔 하고나서 운동을 하러 갈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는데, 다른 사람이 붙잡을까봐 걱정이 아니라 내 의지가 술을 중단하고 운동을 택할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일을 정리하면서 "간단히 한잔만 하고 운동하러 갈거예요." 라고 미리 못을 박아 두었다. 나중에 체면 때문에라도 술을 중단하고 운동을 택할 수 있도록 말이다. 모처럼 비가 멈춘 날, 바람은 선선했다. 어딜갈까 고민하다가 고기집을 택하는 사장님. 난 치킨집에서 맥주 한두잔 가볍게 먹을 생각이었는데, 고기집이면 소주가 땡겨서 쉽지 않겠는데. 운동하러 갈 생각에 다른 사람들이 모두 소주를 마셔도 나 혼자 맥주를 홀짝였다. 한 시간 일찍 마친 탓에 고기를 배불리 먹고 맥주를 네 잔쯤 마셨을 때쯤 운동하러 갈 시간이 다 되었다. 분위기를 보니 1차는 대충 마무리 단계였다. 신발을 신고 나오니, 사장님께서 묻는다. 운동하러 갈 거냐고. 아주 짧은 순간 한번 더 고민을 했지만, 앞서 밝혔듯이 체면 때문에라도 운동을 택했다. 다른 사람들은 2차를 가고, 나는 지하철을 향했다.
운동은 공복에 해야하는데, 이렇게 배가 불러서 무슨 운동을 하나 생각을 하며 지하철 안에서 열심히 숨쉬기 운동을 해서 배를 꺼뜨리려고 노력 중이었다. 고기를 조금만 덜 먹을걸. 맥주를 한 잔만 덜 마실걸. 후회를 해봐야 소용없다. 이 헬쓰클럽은 크로스 핏 전용 체육관이 아니라 딱 정해진 시간에만 크로스 핏 수업을 한다. 그런데 1차가 끝나갈 무렵에서 자리를 일어서서 나오기까지 조금 더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크로스 핏 수업엔 이미 늦었다. 차라리 잘되었다 싶었다. 이렇게 배가 부른 상태로 그 고강도의 운동을 해낼 자신은 없었다. 조금 천천히 가서 오랜만에 헬쓰머신들을 돌면서 근력운동이나 빡세게 해야겠다 싶었다.
스퀏과 런지로 가볍게 몸을 푼 후에 덤벨과 바벨을 들었다. 많이 안 마셨고, 취기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땀을 좀 흘리고 나니 역시 알콜의 기운이 느껴졌다. 며칠째 잠을 잘 못자서 좀 피곤했고, 몸 상태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 그래도 한번 운동을 시작하면 몰두하는 편이라 제법 오래 이것 저것을 했다. 그 약간의 알콜 기운 때문에 그랬는지 바벨 무게를 점점 올렸다. 평소라면 적당히 들다가 다른 운동으로 넘어갔을텐데, 이번에는 어느 정도까지 올라가나 싶어 무게를 좀 올렸다. 막판에 좀 힘들었다. 무게를 늘리니 두어번만 들어도 땀이 쏟아졌다. 물을 마시고 잠시 쉬다가 케틀벨 스윙으로 운동을 마무리 했다. 오늘은 음주 운동을 했구나. 아주 나쁘지는 않았지만, 썩 개운하지도 않았으니, 앞으로는 음주 운전은 물론 음주 운동도 가능하면 하지 말아야지 생각했다.
내용증명
지난 글에 쓴 것처럼 집 주인이 계약금을 곧 주겠다 해놓고는 시간을 질질 끌다가 다시 못 주겠다고 말을 바꾸는 바람에 스트레스를 좀 많이 받았다. 아내와 밤 늦게까지 대책을 논의 했는데, 우리의 입장을 명확하게 전달하는 내용증명을 보내기로 했다. 벌써부터 내용증명에 대한 얘기를 했던 데다가, 예전에도 여러차례 문제가 생겼을 때 내용증명을 통해 해결된 적이 있어서 크게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막판까지 돈을 안 줄 경우에는 좀 피곤하겠다 싶었다.
의외로 어이없게 내용증명을 보낸 다음 날 집 주인에게 연락이 왔다. 늘 연락하던 영감이 아니라 서류상 집 주인인 영감의 딸이었다. 아버지가 내용증명을 받았다고 했고, 그간 좀 오해가 있었던 것 같고, 계약금을 보내줄테니 잘 풀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렇게 쉽게 보내줄거였으면 그간 한 달이상 사람을 괴롭힌 이유는 뭘까? 진짜 어이가 없다는 생각에 좀 따질까 생각이 들었다가 곧바로 그것도 좀 피곤한 일이다 싶어 마음을 바꿨다. 정식으로 제대로 사과를 한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미안하다는 입장은 전달 받았고, 금방 계약금을 보내주겠다고 하니 갈등의 원인은 해결이 되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곧 다시 전화가 왔고, 방금 입금했다고 다시 한번 잘 마무리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전해왔다. 통장에는 정확하게 전세 보증금의 10%가 입금되어 있었다.
음주 독서
책 읽기 딱 좋은 시간과 장소는 언제, 어디일까? 오래전 대학생이었을 때는 학교 뒷산 어딘가 널찍한 바위를 발견하고 종종 거기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담배를 피우고, 책을 읽고, 기타를 치기도 했다. 그때 그 바위에서 책을 제법 읽었다. 도서관이나 강의실 등 답답한 실내에서는 잘 눈에 안들어오던 전공서적도 이 바위 위에서 담배를 물고 읽으면 이해가 잘 되었다. 아마도 평소 대부분의 시간을 실내에서 보내기 때문에 가끔 밖에서 책을 읽으면 뭔가 자유로운 느낌과 편안한 느낌이 들어 집중도 더 잘되었다고 생각한다.
어제는 차에서 한 시간 조금 넘게 누군가를 기다려야 했다. 의자를 뒤로 제끼고 잘까? 라디오를 들을까? 스마트폰으로 게임이나 할까 고민을 하다가 잠시 내렸는데, 바로 근처에 풀과 나무와 벤치가 있었다. 책을 갖고 나와 읽었는데, 야외에서 읽는 느낌이 좋았다. 처음 한동안은 집중이 잘 되었는데 잠시 후엔 잠이 쏟아졌다. 최근 며칠 잠이 좀 부족했다. 꾸벅 꾸벅 졸다가 책을 덥고 벤치에 누웠다. 눈을 감고 바람소리와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 소리와 풀벌레의 날개짓 소리를 들었다. 스르르 잠이 몰려왔다. 얼마나 잤을까? 문득 정신을 차려 앉았는데, 주위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바람이 살랑살랑 불었고, 풀벌레가 여기저기 날아다녔다.
다시 책을 펼쳐 읽다가 문득 이런 삶이 참 바라던 삶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딘가 조용하고 한적한 곳, 답답한 실내가 아닌 나무와 풀과 곤충들이 있는 자연 속에서 편안하게 책을 읽고, 졸리면 잠시 눈을 붙이고, 깨면 또 책을 읽고 자연 속에서 사색을 즐길 수 있는 삶 말이다. 얼마 후 기다리던 사람이 돌아와서 차를 몰고 나오면서 내내 그 짧은 독서와 낮잠에 대해 생각했다. 평생 못 잊을 기억 중 하나가 될 것 같다.
야외에서 아니 자연 속에서 책 읽는 얘길 했는데, 사실 책에 한번 빠져들면 장소와 시간 따위 별로 관계 없다. 책을 읽지 못하는 환경만 아니라면(가령 근무시간 사무실 처럼 대놓고 책을 읽기 쉽지 않은 시간과 장소만 아니라면) 어디든, 언제든 별로 상관없다는 말이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빤스만 입고 엎드려서 책을 읽어도, 사람 많은 지하철에 서서 읽어도 책에 빠져들기 시작하면 별로 차이가 없다. 그런데 어떤 책은 읽다보면 담배가 땡기거나 술이 땡기는 경우가 있다. 그럴때 지하철이나 도서관에 있다면 조금 곤란하다. 오래 전 김형경의 [담배 피우는 여자]를 읽을 때에는 정말 무척 담배가 땡겼다. 그때는 자취하면서 내 맘대로 살다가 잠시 본가에 들어와 있을 때였다. 하필 그때 집 안에서 맘대로 담배를 필 수 없다는 사실이 무척 괴로웠다. 한밤중에 담배와 책을 들고 밖에 나가서 가로등 밑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며 책을 읽었다.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어떤 소설을 읽다가 갑자기 술이 땡겼을 때에는 한밤중에 문을 연 구멍가게를 찾아 온 동네를 헤메기도 했다.(아직 편의점이 많이 생기기 전이었고 결국 술을 마시지는 못했다.)
혼자 자취방에 살 때는 저녁마다 술을 마시며 책을 읽곤 했다. 만약 티비가 있었다면 술을 마시며 티비를 봤을테고, 컴퓨터가 있었다면 술을 마시며 웹서핑이나 채팅을 했겠지만, 그땐 책 밖에 없었다. 이른 바 음주 독서다. 요즘도 가끔 밤에 아이들을 재워놓고 음주 독서를 한다. 여전히 집에 티비가 없지만, 컴퓨터는 있어서 더 자주 술을 마시며 영화를 보지만, 가끔은 옛날 생각하며 책을 읽는다. 확실히 영화나 웹서핑 보다 책 쪽이 몰입이 더 잘된다. 영화를 보며 술을 마시면 홀짝 홀짝 술을 비우지만, 책은 한번 빠져들어 읽다보면 술잔에 술이 있는 줄도 모르고 시간이 확 지나가버린다. 나중에 정신을 차려보면 그제서야 김빠진 맥주잔을 발견하게 된다. 한번은 소주를 마시다가 책장에서 눈에 띄는 책이 있어 꺼냈다. 조금만 살펴보고 다시 꽂아놓을 생각이었는데, 읽다보니 어느새 시간이 확 지나가 있었다. 마시던 술을 비우기에는 출근이 부담스러워지는 시간이 되어 있어서 결국 술을 버리기도 했다.
오늘은 음주 운동이 아닌 (운동을 마친 후에) 음주 독서를 해야겠다.
친한 선배에게 선물 받았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이 아닌 전교조 1세대 교사 김용택이란다.
뒷 표지에 "철학을 가르치는 학교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라는
문구에 격하게 공감한다.
학부모가 되어보니 참말로 이 땅의 교육문제가 심각함을 깨닫는다.
현명한 노 교사의 지혜를 통해
조금이라도 실마리를 찾았으면 좋겠다.
예전에 한창 필사를 많이 했던 시절에,
김형경 작가의 단편들을 여러번 베껴쓰곤 했다.
이젠 담배를 피우고 싶어질까봐 겁나서 못 읽겠다.
예전에 '다락방'님 서재에서 보고 사놓은 책.
아직 펼쳐보지 못했지만 무척 재미있을 것 같다.
바로 오늘의 '술안주' 되시겠다.
내일 아침 출근길이 좀 힘들지 몰라도
오늘 밤의 즐거운 독서를 생각하면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