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강의
줌을 이용한 온라인 강의는 처음이었다. 강의 내용은 작년에 했던 강의를 그대로 해달라고 요청받았는데, 물어보니 작년에 이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분들이 이번에도 몇 분 계시다고 했다. 그때 강의 내용을 그대로 기억할 수도 없고, 어차피 새로 준비를 해야하니 작년에 만든 강의안을 바탕으로 내용을 추가해 보완했다. 급하게 청탁을 받았고, 나도 중요한 행사를 앞두고 엄청 바쁜 기간이어서 매일 밤마다 야근을 하면서 강의 전날 밤에야 겨우 강의안을 완성했다. 주최측이 강의 장소로 지정한 곳은 강남쪽의 어느 작은 스튜디오였다. 가보니 이 교육프로그램 전체 진행을 도와주시는 강사님이 계셨다. 줌 사용법을 알려주시고, 간단히 분위기를 설명하고 도움이 될만한 팁을 알려주셨다. 그래도 이 분이 옆에 계셔서 큰 도움이 되었다. 만약 혼자 그 방에서 떠들어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훨씬 더 힘들었을 것이다. 3시간 연강이었는데, 휴식 후 다시 강의를 시작할 때마다 마이크 연결상태에 문제가 생기거나 카메라가 말썽이거나 하는 등 사소한 문제들이 계속 발생했다. 이래저래 시간을 제법 뺏겨서 내 강의 시간도 줄어들 수 밖에 없었고, 나는 이번에도 또 시간 배분에 실패해서 막판에 엄청 시간에 쫓겼다. 말이 빨라졌고, 발음이 잘 되지 않아 버벅거렸다. 강의를 다시 하는 것도 너무 오랜만이라 3시간째에는 목이 아프기 시작했다. 오래전 학원에서 일할 때는 하루에 7시간씩 강의를 했는데, 이젠 고작 3시간 강의도 못 버티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일단 적응이 안 되었던 게, 좌우와 정면에 3개씩이나 설치한 조명이었다. 너무 밝았고 내 얼굴이 너무 적나라하게 화면에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부끄럽기도 했다. 흉터가 잘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일부러 수염을 길렀고, 이 못난 얼굴을 좀 가리고 살았으면 싶어서 머리카락을 기르고 있긴 한데, 이렇게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여러 사람들 앞에서 강의를 한다는 것, 게다가 강의실이 아닌 온라인 강의라는 것이 내게는 부담이었다. 지인들의 조언에 따라 머리칼을 묶고, 모자를 쓴 상태로 강의를 하러 갔다. 그나마 지저분해 보이는 머리의 상태를 보완할 수 있었다. 서른개가 넘는 작은 화면들을 보면서 말을 해야한다는 것도 어색했고,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도 잘 모르겠더라. 비록 악필이지만, 칠판이나 화이트보드에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면서 설명을 하는 편이고, 계속 몸을 움직이고, 걸어다니면서 말을 해야 설명이 잘 되는 편이다. 매번 강의실에서 내가 움직일 수 있는 동선을 충분히 확보해야 원활하게 강의를 할 수 있는 편인데, 가만히 책상에 앉아 강의안을 넘기면서 입으로만 설명을 하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다행히 강의안에다 마우스로 그림이나 글씨를 쓸 수는 있던데, 이게 익숙치 않은 사람에게는 너무 삐뚤빼뚤 엉망으로 글씨나 그림이 그려져서 쉽지 않더라. 모든 게 내가 생각하는대로 잘 되지 않으니 자꾸만 핀트가 어긋나고, 말이 자꾸만 헛 나오고, 발음이 자꾸만 뭉개졌다. 아! 결국 최악의 강의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이 절망감!
정말 다행히도 옆에 계신 강사님께서 계속 이것저것 도움 말씀을 주시기도 하고, 휴식 시간에는 강의 내용에 대한 질문들을 해주면서 계속 말을 걸어주셔서 절망감에 침잠되지 않고 빠져나와서 다시 강의에 집중할 수 있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일부러 내 자신감을 올려주려고 계속 그렇게 말을 걸어주신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만약 작년처럼 강의실에서 할 수 있었다면 훨씬 더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을 텐데, 여러모로 아쉬움이 많이 남는 강의였다. 일을 쉬고 있는 동안 감도 많이 무뎌졌고, 구체적인 수치나 조항들도 많이 잊어버렸다는 걸 깨닫기도 했다. 질문이 들어올 때마다 이렇게 간단한 것도 바로 답이 생각이 안 난단 말이지 생각이 들면서 머뭇거리고 있는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강의가 끝나고 나서는 정말 어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접촉을 통한 충전
지하철을 타고 돌아오면서는 일부러 강의에 대한 생각을 빨리 머리에서 지워버렸다. 이 바쁜 날에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해 자꾸 미련을 가지면 준비해야 할 일들에 실수가 생길 수도 있으니. 음악을 들으려고 무선 헤드폰을 착용했는데, 전원이 켜지지 않았다. 아침에 이동할 때 듣고 분명 전원을 꺼뒀을텐데, 그때 전원이 꺼지지 않고 계속 켜져 있다가 방전된 것일까? 무선 이어폰이나 헤드폰의 가장 큰 단점은 꼭 필요한 순간 예상치 못하게 배터리가 방전된 것이다. 가방 안에 무선 이어폰이 하나 더 있었는데, 꺼내기가 귀찮아 헤드폰을 목에 걸고 그냥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처리해야 할 업무들을 머리속에서 미리 하나씩 해보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을 만나는 날이라 미리 아이들과 시간 약속을 정해뒀다. 큰 아이가 리조또가 먹고 싶다고 하길래, 동네에 있는 파스타 가게에서 만나기로 했다. 시간 상 무리가 없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중요한 순간 예상이 빗나가곤 하는 일은 생각보다 자주 일어난다.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해 시간이 늦어졌고, 아이들은 이미 파스타 가게로 출발했는데, 나는 아직 사무실을 벗어나지 못했다. 마음이 급하니 자꾸만 손이 엉뚱한 동작을 했고, 머리가 집중을 못했다. 일터 동료가 내 허둥대는 모습을 보면서 ˝국장님, 제가 마무리 할테니까 먼저 출발하세요.˝ 라고 말해줬다. 그 친구는 이미 아이들이 기다릴까봐 허둥대는 내 상황을 간파한 것이다. 고맙다고 잘 준비해달라고 말하고 급히 사무실을 나왔다. 아이들은 이미 가게에 도착했고, 먼저 주문해서 음식이 나오면 먹고 있으라고 했다. 내가 먹을 음식도 미리 주문하라고 했다.
택시를 타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리인데, 퇴근시간이라 차가 막혔다. 이 서울이란 도시는 이 외곽에서조차 늘 교통체증에 시달려야 하는 곳이다. 급해서 택시를 탔는데, 기사님은 너무나도 느림보처럼 차를 몰았다. 앞 차에 바짝 붙어서 갔으면 충분히 신호가 바뀌기 전에 지나갔을 것 같은데, 거리를 한참 두고 있다가 신호가 바뀔 즈음에야 천천히 움직이더니 신호가 바뀌니 그냥 그 자리에 멈춰섰다. 하!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내가 운전석에 앉았다면 벌써 도착했을 것 같은데. 자꾸만 급해지는 마음을 심호흡을 하며 가라앉히려 애썼다. 우회전해도 되는 상황에서도 멈춰서 기다리고, 미리 차선을 바꾸면 좋을 곳에서도 깜빡이만 켜고 쉽게 들어가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택시 기사가 왜이렇게 운전을 못 하는지 따지고 싶은 마음을 참고 참고 또 참았다. 결국 내가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는 큰 아이의 문자에 근처인데 차가 밀려서 조금 더 걸린다고 답장을 보내고 뒷좌석에 등을 기대버렸다. 이 기사님 정말. 마지막에 내릴 때조차도 차를 횡단보도 한 가운데 세우는 어이없는 짓을 저지른다. 뭐라고 한 마디 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기다리는 아이들 때문에 참았다.
아이들을 만나자마자 내가 원하는대로 강의를 못한 것에 대한 아쉬운 마음과 일이 꼬여서 늦어진 것에 대한 스트레스와 택시 기사에 대한 화가 모두 눈 녹듯이 사라졌다. 늦어서 미안하긴 했지만, 아이들이 별 것도 아닌 일로 투닥거리며 파스타를 먹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 만으로 세상 모든 근심과 걱정이 사라졌다. 애들 먹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는 말. 믿기 어렵지만 정말 사실이다. 강의 장소로 이동하는 시간이 애매해서 제대로 점심도 먹지 못했고, 택시를 타고 오는 동안 허기를 느꼈지만, 나는 눈 앞에 음식 보다는 애들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이 더 급했고, 더 좋았다.
인간이라는 건 어쩌면 타인과 접촉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평소 다른 누군가와 신체 접촉을 할 일이 거의 없다. 코로나-19 사태로 너무나도 당연했던 악수조차 하지 못하게 된 마당이니 더욱 그렇다. 그나마 일터 동료의 어깨를 툭 건드리거나, 오랜만에 만난 친한 후배들과 악수 대신 주먹을 마주치거나, 팔을 건드리는 등의 행위들이 가끔 일어나는 접촉이다.
그러다 아이들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손이 자꾸만 나간다. 머리를 쓰다듬고, 뺨을 손등으로 문지르고, 귓불을 만지고, 손을 꼭 붙잡게 된다. 특히 아직도 내 무릎에 앉는 걸 좋아하는 작은 아이는 꼭 껴안고 있게 된다. 이건 내가 생각하고 일부러 하는 행동이 아닌 마치 본능처럼 저절로 일어나는 일들이다. 방전되어 버린 배터리를 다시 충전해야 하듯이, 일상에 지친 내 마음을 아이들의 손을 붙잡고 있는 동안, 아이들을 꼭 껴안고 있는 동안 충전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만약 아이들이 없었다면 나는 누구를 통해 충전할 수 있을까? 충전 없이 계속 방전만 일어나는 삶은 상상하기도 싫다. 끔찍하다.
어떤 죽음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이 당연한 진실을 받아들이는 일은 언제나 어렵고 힘겹다. 최근 김기홍 활동가와 변희수 전 하사의 소식 때문에 마음이 많이 흔들렸다. 오랜만에 다시 죽음에 대해 생각해본다. 오래 전 노동당 박은지 부 대표의 선택 이후로 꽤 오랜만이긴 하다. 사회학자 에밀 뒤르껨은 자살이 전염되는 사회적 현상이라고 밝혔다. 그 의견에 동의한다. 신기하게도 자살은 전염된다. 나는 청소년기부터 여러 번 자살충동에 시달렸는데, 매번 마지막 행동을 실행할 용기가 없어서 실패했고, 지금까지 그 실패가 반복된 결과를 살아내고 있다.
코로나19 판데믹과 아프리카 돼지 열병과 조류 독감의 유행, 점점 심각하고 다양해지는 전세계의 이상 기후 현상들(기후 위기의 증거들) 때문에 점점 삶이라는 것에 대해 회의가 생길 수 밖에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어차피 단 한번도 오래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늙고 병든 몸으로 사는 것보다는, 사회를 바로 보지 못하고 기득권과 언론이 가르키는 대로만 바라보는 사람들(그토록 경멸했던 사람들)처럼 늙어갈 바에야 날카롭고 예민한 정신을 갖고 있는 상태로 죽고 싶다는 생각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 없다.
다만 아이들이 태어나고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지금은 적당한 시기가 아니라는 것은 머리로 알고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그 생각은 변함없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들이 제 힘으로 사회를 견딜 수 있고, 제 삶을 찾아 내 품에서 벗어날 때까지는 아이들 곁에 머물러 줘야 하는 것을 의무라고 여긴다. 그 이후에 대해서는 지금은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박은지 부 대표의 선택이 내게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의 아이가 아직 어렸기 때문이다. 아이가 아직 어린데도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걸 용기라고 해야할지, 절망이라고 해야할지,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 마지막 실행을 할 수 있는 어떤 것이 그에게는 있었고, 나에게는 없었다.
지금은 잃어버린 MP3 플레이어 폴더 중 하나에는 다양한 버전의 [글루미 썬데이]가 수십곡 들어있었다. 문득 며칠 연속 오로지 그 곡만 반복해서 들으며 지냈던 어떤 시절들이 떠올랐다. 그 곡을 그렇게 다양한 버전으로 다시 들어보기는 이제 어려울 것 같다. 암튼 다시 그 노래를 들어보고 싶어졌다. 이왕이면 영화 [글루미 썬데이]의 주인공 에리카 마로잔의 목소리로, 헝가리어 버전으로. 독일어 버전은 검색해서 찾았는데, 헝가리어 버전은 못 찾겠다. 오전 동안만이라도 노래를 들으며 가만히 내 속으로 침잠하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오후부터는 다시 바빠질테니.
추신) 성폭력으로 공석이 된 서울시장을 선출할 재보궐선거 판이 너무 엉망이라 보고 있기가 괴로워 신경을 끄고 지냈다. 투표소에도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지금까지는 아무리 표를 줄 사람이 없어도 투표장에 가서 당당히 무효표를 제출하는 것이 내 권리이자 의무라고 여겼도, 투표권을 얻은 후 단 한번도 투표소에 가지 않은 적은 없었는데, 이제는 귀찮다고, 지쳤다고 생각했다. 부산 시장 자리에 눈이 멀어 가덕도 신공항이라는 미친 선택을 한 민주당과 정권에 대한 분노와 역겨움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라 괴롭고 힘들었다. 그렇게 노무현도 문재인도 환경운동가의 눈으로 보면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와 별로 다르지 않다고 평소에 떠들고 다닌 내 주장을 증명해줘서 고맙다고 해야할까?
암튼 이제 그 분노를 쏟아낼 수 있는 방법이 생겼다. 신지예 여성정치네트워크 대표가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할 것을 선언했다. 투표소에서 내 한 표를 던지는 것 외에 도움이 된다면 뭐든 그를 돕는 것이 이 국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