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자신이 태어난 식민지 시대에서, 전쟁, 포로수용소, 독재시대, 4.19로 이어지는 지난한 외부 환경을 뚫고서 자신의 삶을 고스란히 시로 담아내고 있다.  

시를 읽는 내내, 시를 해체하여 밑줄 긋고 이게 의미하는 것은, 주제는, 기법은 등등 알려주는 이가 필요한데. 그러면 우리는 동일하게 이해하고, 우격다짐으로 외우고, 이러이러하다로 정의할 건데. 얼마나 어리석은 공부였는지,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한 줄로 정리하고 재단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세월을 보냈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시인이 말 한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144쪽)'를 줄곧 하고 있는 셈이다.  

10개의 주제 아래 장장 80편의 시는 읽는 이의 눈에서 멈춰 있는 게 태반이고, 간간히 입으로 내뱉어 보지만, 어렵다. 화가들의 그림들도 들어있는데, 이 또한 강렬하면서 어렵다.

그러나 문장을 곱씹어 읽고 그림을 자세히 보면 가슴까지 쓱 들어오는 뭔가가 있다.  

애정이 생기면서 공감에 이르기까지, 더 나아가 그 시대에 살았던 이들의 생이 가엽다는 마음으로 확장된다.

시인이 온 몸으로 외친 시어들이 작금에서도 울림을 주고 있으니, 폐허에도 눈은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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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에 폐허에 눈이 내릴까 - 김수영 탄생 100주년 기념 시그림집
김수영 지음, 박수연 엮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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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은 꽃들
그리고 별과도 등지고 앉아서
모래알 사이에 너의 얼굴을 찾고 있는 나는 인제
늬가 없어도 산단다 (13쪽, ‘너를 잃고‘ 중)

지나간 생활을 지나간 벗같이 여기고
해 지자 헤어진 구슬픈 벗같이 여기고
잊어버린 생활을 위하여 불을 켜서는 아니 될 것이지만
천사같이 천사같이 흘려버릴 것이지만 (16쪽, ‘구슬픈 육체‘ 중)

제각각 자기 생각에 빠져 있으면서
그래도 조금이나 부자연한 곳이 없는
이 가족의 조화와 통일을
나는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냐 (59쪽, ‘나의 가족‘ 중)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기 벽화 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 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 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 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78쪽, ‘달나라의 장난‘ 중)

우리의 사랑이 죄악이라는 것은
시를 쓴다는 것이
옳지 않은 일이라고 꾸짖는 것이나 같은 일

(중략)

늬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랑의 궁극에 대하여 차라리
늬가 냉담하기를 원하는 것은
우리의 사랑이 잊어버리기 위한 사랑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101쪽, ‘겨울의 사랑‘ 중)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을 배웠다 너로 해서

그러나 너의 얼굴은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에 꺼졌다 살아났다
너의 얼굴은 그만큼 불안하다

번개처럼
번개처럼
금이 간 너의 얼굴은 (105쪽, ‘사랑‘ 전문)

어깨를 아프게 하는 것은
노후의 미덕은 시간이 아니다
내가 나를 잊어버리기 때문에
개울과 개울 사이에
하얀 모래를 골라 비둘기가 내려앉듯
시간이 내려앉는다

머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
두통의 미덕은 시간이 아니다
내가 나를 잊어버리기 때문에
바다와 바다 사이에
지금의 삼월의 구름이 내려앉듯
진실이 내려앉는다 (118-119쪽, ‘백지에서부터‘ 중)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126쪽, ‘풀‘ 중)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 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142쪽, ‘김일성 만세‘ 중)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
나는 인제 녹슬은 펜과 뼈와 광기-
실망의 가벼움을 재산으로 삼을 줄 안다
이 가벼움 혹시나 역사일지도 모르는
이 가벼움을 나는 나의 재산으로 삼았다 (144쪽, ‘그 방을 생각하며‘ 중)

나는 왜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중략)

아무래도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1원 때문에 (149-150쪽,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중)

사람이란 사람이 모두 고민하고 있는
어두운 대지를 차고 이륙하는 것이
이다지도 힘이 들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 깨달은 것은
우매한 나라의 어린 시인들이었다 (183쪽, ‘헬리콥터‘ 중)

익살스러울 만치 모든 거리가 단축되고
익살스러울 만치 모든 질문이 없어지고
모든 사람에게 고해야 할 너무나 많은 말을 갖고 있지만
세상은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 무언의 말
이 때문에 아내를 다루기 어려워지고
자식을 다루기 어려워지고 친구를
다루기 어려워지고
이 너무나 큰 어려움에 나는 입을 봉하고 있는 셈이고
무서운 무성의를 자행하고 있다 (224쪽, ‘말‘ 중)

눈이 온 뒤에도 또 내린다

생각하고 난 뒤에도 또 내린다

응아 하고 운 뒤에도 또 내릴까

한꺼번에 생각하고 또 내린다

한 줄 건너 두 줄 건너 또 내릴까

폐허에 폐허에 눈이 내릴까 (229쪽, ‘눈‘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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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학의 시를 오랜만에 읽는다.

시인이 꼭 어디론가 갈 것 같은, 큰 다짐이 들어있다. 

시인이 바라는 날들, 시를 쓰지 않아도 좋은 날들이 올 기미는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모두가 시인이 되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싶다.

그러고보니 시인을 못 본 지가 한참되었다. 

도토리 두 알이 가지런히 내일을 기다리는 듯 톡톡에 있다.  


눈이 자주 내린다. 

사서교육원에 지원한 부분으로 주변인들의 말이 무성하다. 

누군가는 민생고에 필요한 자격인데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고...

발레나 배울까, 얼마나 배부른 소리인가...  


나와는 딴 세계에 있는 시인이다. 시다. 

각각 따로 가고 있는, 멀리 있는 발과 머리일 뿐. 

그래도 내일이 있으니, 

어떻게든 시인의 세계에 애써 동참해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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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 걷는사람 시인선 27
안상학 지음 / 걷는사람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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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을 쳤다고, 오를 일만 남았다고 발을 굴렀을 때 허방처럼 빠져드는 그런 바닥은 대체 뭐라 이름 불러야 할까요. 아침이 오고 있다는, 봄이 오고 있다는 말 같지 않은 말의 타이밍은 어느 페이지에 끼워 넣어야 적절할까요. 동강난 동맥을 이어붙인다고 기도에서 호흡이 재생될까요. (11쪽, ‘바닥행‘ 중)

거꾸로 쓰는 글씨는 쓸 때는 그것이 바른 것이지만 감상할 때는 거꾸로 놓고 봐야 바른 것이 되는, 글씨를 쓰는 자신을 글씨를 보는 자신이 들여다보게 되는. (33쪽, ‘좌수 박창섭‘ 중)

꽃이 간헐적으로 이 세상에 다녀가듯이
좀 길기는 하지만 우리 사랑도 간헐적으로
이 세상에 다녀가는 것이 아닐는지요. (36쪽, ‘간헐한 사랑‘ 중)

고비에서는
길을 모르는 양은 길을 잃지도 잃을 길도 없었네
오직 길을 아는 인간만이 길을 잃고 헤매던 날이 있었네. (51쪽, ‘착시‘ 중)

마음을 가두어 놓고 살아야 한다.
내 몸은 내 몸에게 기대어 살아갈 수 없으니
내 몸은 내 몸을 품어 줄 수도 없으니
몸속 가장 먼 마음에라도 기대며 살아야 한다
그래도 마음이 몸과 한통속일 때 가장 자유로운 법 (95쪽, ‘마음의 방향‘ 중)

가고 싶은 곳에 앞장서 가는 발을 따라나서리라
머물고 싶은 곳에 발과 함께 머물리라 마음먹어 본다
발이 머리가 되고 머리가 발이 되어 생각해 본다
머리가 발 같고 발이 머리같이 살아갈 날을 생각해 본다 (105쪽, ‘발에게 베개를‘ 중)

봄소식

꽃 그림 한 점 보냅니다
나비는 그리지 않았습니다
이 그림을 보고 계실 당신이 있으니까요
벌써 향기를 맡고 계시는군요
한 폭의 그림입니다

다만 그 봄날 함께할 수 없어서 서러울 따름입니다 (112쪽, ‘봄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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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이 내 손에 들어오기까지, 그들의 노고가 아주 많이 보인다. 

'진실성'을 책임으로 가진 그들이다. 

특히, 믿고 찾아서 읽고, 선뜻 구매하게 하는 '민음사' 편집자들의 이야기다.

책은 저자와 편집자와 출판사와의 관계에서 시기적절, 시의적절하게 잘 교합될 때야, 비로소 세상으로 나와 내 손으로 들어올 수 있다. 

이러한 시의와 시기가 적절하게 맞춰질 수 있도록 큰 몫을 하는 이는 편집자들이라고 본다.


이 책, '책 만드는 일'은 팔려고 낸 책인지가 궁금하다.


*주1회 맹자를 공부하기로 했다.

*사서가 되고 싶어 지원서를 냈다. 면접이 남았지만... 

*대학을 가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아들이 돌아돌아 왔지만 졸업을 목전에 두고 취직을 하였다.

*넉넉한 시간으로 무한정 책을 읽을 수 있으며, 온전히 나에게만 몰입할 수 있는 때가 되었다. 

*항상 감사하다를 다짐한다.  

*내일부터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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