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밤'을 읽는 내내 속이 울렁거린다. 모두에게 적어도 발가락 하나 정도는 꼬투리가 될 만한 이야기라서 그럴까. 이 이야기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증조할머니, 할머니, 엄마, 나에게로 이어지는, 할머니의 이야기로 전달된다. '할마이는 언니에게 지나간 사람이라고. 지나간 사람이 언니 발목을 잡을 수 없다고(298쪽)', 지나간 사람이 현재의 사람의 발목을 잡으면 안된다면서, 그러면 안된다고 하면서 모두들 부여 잡고 있다. 누군가에게 하는 말은 자신에게 하는 말로 반복된다. 사람이 사람을 기억하는 일이 부질없지 않고 의미가 있음을, 결국 나로 되돌아와서 나에게 집중해야 하는 거다... 

"내가 지금의 나이면서 세 살의 나이기도 하고, 열일곱 살의 나이기도 하다는 것도. 내게서 버려진 내가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도. 그 애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관심을 바라면서, 누구도 아닌 나에게 위로받기를 원하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큰글자책, 453쪽)

'고려거란전쟁' 마지막 회를 보았다. 적군에 대한 두려움을 버리고 단단한 마음을 가지기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오래전 그 상황을 떠올려보면 무너질 거 같은 마음이 먼저 드는데.. 그래서 귀주대첩이 아직까지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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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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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남편을 위해 그만큼 울었을 거이고 남편을 다시 만나서도 그만큼 행복했을 것이다. 내가 잃은 것은 기만을 버리지 못한 인간이었지만, 그가 잃은 건 그런 사랑이었다. (131쪽)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사람은 세상천지 어디에도 없다고. 사람이 저지른 일이야. (162쪽)

왜 내 한계를 넘어서면서까지 인내하려고 했을까. 나의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언제부터였을까. 삶이 누려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수행해야 할 일더미처럼 느껴진 것은. (206-207쪽)

불행은 그런 환경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겨우 한숨을 돌렸을 때, 이제는 좀 살아볼 만한가보다 생각할 때. (266쪽)

아깝다고 생각하면 마음 아프게 되지 않갔어. 기냥 충분하다구. 충분하다구 생각하고 살면 안 되갔어? (3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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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문체 연습'이다. 이야기 하나로 아흔아홉 가지 방식으로 변주 된 글을 읽을 수 있다. 첫 번째 요약한 이야기, '약기'에서 새로운 형식과 문체로, 무형식으로, 일상에서 사용되지 않는 문체, 외국인이 말하는 문체, 고문으로, 외국어가 침범한 문체 등으로 아흔아홉 개의 문체를 가진 아흔 아홉 개의 글이 있다. 그리고 원문과 해제까지 들어있다. 번역자의 노고가 느껴진다.  

레몽크노 글을 읽다 보면, 생각지 못한 문체의 글을 저절로 수용하게 된다. 그러고 보면 수많은 작가들은 제각각 고유의 문체를 가지고 글을 쓴다. 하지만 이들은 독자가 수용할 수 있는 폭에 들어 있다. 

레몽크노 '문체 연습'은 가히 실험적이다.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글쓰기, 발상의 전환, 무한의 상상력, 실험 정신, 아주 다양한 문체로 독자에게 독서의 폭을 상상 너머까지 넓혀 준다.

하지만 나는 뻔한 문체로 글을 쓴다.  

날씨는 변덕이 심하지만 봄이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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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 연습
레몽 크노 지음, 조재룡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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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고, 핑계였다. 서있는 자도 아니고, 쓰러진 자도 아니고, 앉아서 존재하기를 바라는 자였다. 전날도 아니고, 이튿날도 아니고, 같은 날이었다. 북역도 아니고 리옹역도 아니고, 생라자르역이었다. 부모도 아니고,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어떤 친구였다. 욕설도 아니고, 조롱도 아니고, 의복에 관한 조언이었다. (29쪽 부정해가며)

남자를 생라자르역 앞에서 다시 보았는데 시간이 얼마 지나, 나는 그 조금 올려 달라고 그에게 말하는 그는 자신의 외투 위로 단추를 동료와 큰 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89쪽, 어절 단위로 늘려가며 바꾸기)

결국 두 시간 후, 생라자르역 앞에서 의복 개량을 그에게 제안하고 있는 우아한 친구 하나와 동행중인 이 인물이 다시 출현하여 내게 준 인상을 어떻게 진술하면 좋을까? (119쪽, 뭐라 말하면 좋을까?)

문학적이지도 않고, 유달리 흥미를 끈다고 할 수도 없으며, 아슬아슬한 모험담도 아니고, 서스펜스가 가득한 추리들도 아니며, 유머러스한 콩트도 아니고, 삶의 지혜나 심오한 철학이 배어있는 에세이도 아니며, 유려한 시나 웅장한 연설도 아닌, 그저 (중략) 어느 날 오후, 정오 무렵에 벌어진 이야기 하나를 우리는 보고 있다. (154-1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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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노년이란 연속적인 상실의 통과의례다. 마흔일곱 살이나 쉰두 살에 죽는 것보다 전체적으로 그게 더 바람직하다. 탄식하고 우울해해 봤자 좋아지는 건 없다. 종일 창가에 앉아 새와 헛간과 꽃들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는 편이 낫다. 나의 일상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기쁨이다.(13-14쪽)  인생사에 좋기만 하나거나 나쁘기만 한 일은 없는 법(49쪽)' 

여든 너머까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노인, 노화를 피할 수 없다면 즐기면 되는 노년, 쓸쓸함과 불편함도 있지만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는 삶, 실제로 지은이 같은 노인은 많지 않다. 하루하루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애쓰는 노인들도 있다. 개인의 성격, 자라온 환경, 다양한 부분이 노인의 삶을 좌우한다. 이미 정해져 있는 상황에서 정작 늙어가는 노인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일, 기쁘게 글을 쓸 수 있다면, 수십 번 수정하여 글을 쓸 수 있는 환경이라면, 비록 사랑하는 여인은 잃었지만 지금까지 곁에서 도와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늙는다면 암에 걸리더라도 늙는 걱정 안하고 살 수 있을 거 같다. 그래서 당신이 마음대로 말한 살고 싶은 나이가 지나게 되면 안도하게 되는 거지. '노령이라는 세계는 미지의 우주이자 뜻밖의 영역일 수밖에 없다(18쪽).' 오직 그때가 되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고, 늙어가는 당사자만 알 수 있다. 여든 이후에 쓴 도널드 홀 에세이, 글이 참으로 맑고 담담하다. 관조하며, 진짜 현재를 살고 있는 노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덕분에 늙어가는 방식을 미리 맛 본, 모범 답(?)을 알았다고 할까. 

하지만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이런 생각이 든다. 매일이 똑같고, 이렇게 계속 산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쩌면 내 몸 하나 잘 건사하여 주변의 도움을 최소로, 늦추게 하는 게 삶의 의미일까. 아직도 하고 싶은 것이 있어, 그것을 위해 애쓰고 있다는 게 살아가는 의미가 될까.  

어느 순간 "죽는 것보다 늙는 게 걱정인"게 맞는 말이 된 나이가 되었다. 

건강 검진 결과로 몇 가지 더 검사를 받았고(결과 나오는 시간 동안 지금 죽기에는 아니다 싶은, 별별 생각이 들었다. 매일 눈뜨면 별 볼일 없는 하루를 보내는데도), 설날에는 해랑 열차 여행을 다녀왔다. 아직도 잘못된 선택으로 여기고 있는 결혼한 날이 코앞이다. 그때도 눈이 오고 추운 날씨에 모두가 얼었었다. 아들이 결혼기념일을 축하한다고 초대했다. 맞아, 결혼해서 제일 잘한 일, 자식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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