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을 순례하다 - 건축을 넘어 문화와 도시를 잇는 창문 이야기
도쿄공업대 쓰카모토 요시하루 연구실 지음, 이정환 옮김, 이경훈 감수 / 푸른숲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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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에서  창은 외부와 내부를 연결해 주는 유일한 공간이다. 창이 때로 눈에 비유되는 이유도 두 공간을 연결해 주기 때문이다. 또한  창 하나로 건물의 분위기가 달라지기도 하며 지역마다 시대마다 전혀 다르게 변화해 왔다. 창으로 로맨틱한 건물이 될 수도 있고 감옥 같은 건물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창문의 특징을 오랫동안 연구해 온 도쿄공업대 쓰카모토 요시하루 교수는 세계 28개국을 답사하여 세상 모든 창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저자가 세상의 모든 창문을 구분하는 방법은 세 가지고 빛과 바람, 사람과 함께,교향시로 나누어 창문의 다양한 가치를 이해할 수 있도록 분류설명해 주고 있다.

 

《창을 순례하다》는 총 136장의 도판과 295장의 사진이 실려 있고, 각 나라를 대표하는 건축 거장 26명의 작품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빌라 데스테, 중국 4대 정원 류위안 등의 명소, 두브로브니크의 액세서리 상점, 런던의 서점, 사라예보의 카페, 아말피의 주택와 같은 일상의 공간까지 실어놓았다. 28개국의 76개 도시에서 만난 139개 장소는 마치 여행기처럼 생동감이 가득하다.

 

시대를 초월한 창의 본질은 이렇게 실천적인 동시에 시적인 상상력을 안겨주는 곳에 존재한다.

 

저자는 희미하게 빛나며 고르지 않은 표면의 미묘한 음영을 보여주는, 질감으로 둘러사인 작은 공간을 형성하는 창을 '빛이 모이는 창'이라 한다. 반대로 '빛이 흩어지는 창'은 직사광선이  날카로운 빛다발처럼 내리꽂는 창을 말하는데 빛이 하나의 덩이가 아니라 수많은 입자들이 움직이는 것처럼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창에 나무 격자를 설치한 터키, 튀니지,빌라 데스테의 옛 인쇄공방에 있는 기와로 만들어진 창, 일본의 가나자와에 있는 다다미 방등이 해당된다. 스리랑카와 같은 더운 나라에서는 유리 없는 창을 만드는데 유리가 없는 창의 용도는 처마와 함께 강한 햇빛을 차단하고 그늘을 만들어 시원함을 얻는 데에 목적이 있다, 외부에서 보면 마치 창이 그늘 속에 어둡게 가라앉는 듯 보인다 하여 '그늘 속의 창'이라 부른다. 베트남 중부 호이안의 민가와 남산 한옥의 한지로 마감한 들문이 이러한 창에 해당된다. 스리랑카 네곰보에 있는 민가에서는 꽃 모양의 쇠격자의 꽃 모양 창문은 '빛이 흩어지는 창'에 속해 보이기도 한다.

 

바람을 시각화한 듯한 느낌을 주는 '바람 속의 창'은 바람의 궁전이라 불리는 하와마할의 창문을 보면 알 수 있다. 비스듬히 위쪽으로 조각된 구멍을 타고 들어온 뜨거운  바람은 안쪽의 돌 필터에서 걸러지며 냉각된 후 미풍으로 변환되는 창구조를 가졌다. 말라카 박물관, 말레이시아 프랜시스 푸의 자택은 바람을 순환시키는 창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도 점점 열대기후로 변하고 있으니 바람 속의 창이 유행하는 시대가 올지도 ^^;;) 이외 빛이 가득한 방, 그늘 속의 창, 바람 속의 창, 정원 안의 창, 일하는 창, 드나드는 창, 앉는 창, 잠자는 창, 구경하는 창, 이어지는 창, 중첩하는 창, 창 속의 창까지 각국의 다양한 창이 사진과 함께 실려 있다.  

저자는 이처럼 단순히 외부와 내부를 이어주는 공간으로서의 창이 아니라 공간을 형성하는 창의 특징에 주목한다.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스리랑카와 같이 더운 나라에서  외부의 더운 공기를 차단하기 위해 창 안에 돌 필터라는 것을 만들어 사용하는 부분이었다. 지역과 시대에 따라 창의 형태가 변하여 왔듯이 저자는 각국의 나라에서 사용하는 창의 특징과 더불어 일상적인 삶과 연결짓는 라이프 스타일로서의 창을 재조명 하고 있다. 실려있는 도판과 사진으로 충분히  외부와 내부를 연결해 주는 창문만이 아닌 창문이 본질적으로 담고 있는 바람과 사람과 시의 이야기를 이 책에서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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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언 하우스
존 하트 지음, 박산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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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김혜수 주연의 차이나타운을 보았다. "쓸모가 없으면 살 가치가 없다" 라는 자본주의 공식을 철저히 따르는 누와르 영화였다. 중간중간 선혈이 낭자하고 칙칙한 뒷골목이 살풍경하게 그려진다. 아이를 지하철 사물함 10번에 버려 아이 이름을 일영이라 지은 것도 인간의 존재가 이름 모를 들꽃처럼 취급되는 현실의 신랄한 조소다. 일영이라는 이름도 서러운데 한 술 더떠 그 아이를 부패경찰이 사채업자한테 팔기까지 한다. 뒷골목 사채업자 김혜수(엄마)는 그런 아이를 다시 길에 버린다. 살아 돌아 온 아이만 킬러로 길러진다.   

 

 

인생이란 게 원래 엿 같은 거니까

 

<라스트 차일드>로 만났던 작가 존하트의 작품이다. 왜 뜬금없이 차이나타운 이야기가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일영이 킬러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고통이 이 책의 주인공 마이클과 비슷해서? 아니면 냉혈한 엄마 밑에서도 가족이라는 책임과 희생을 감수하는 일영의 인간적인 면이 마이클이 지닌 감수성과 같기 때문에?. 

 

변호사였던 저자의 필력에 반해 그의 작품을 찾아 읽었는데 역시나 재밌다. 고아였던 마이클이 킬러로 살게 된 이유, 그것은 단 하나뿐인 동생 줄리앙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가 킬러를 그만두려고 하는 이유 또한 사랑하는 여인 엘레나를 위해서이다. 한 번도 평범한 삶을 살아본 적 없던 마이클에게 '가족'이란 의미는 어떤 희생도 감당할 수 있게 하는 사랑이다.

 

정의롭고 충성스러울 뿐 아니라 믿음직스러웠던 넘버 원 마이클은 사랑하는 엘레나가 임신을 하자 평범한 삶을 살기로 한다. 그러나 누구나 다 알다시피 조직은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죽어가는 보스의 소원은 마이클의 손에 죽는 것, 아버지와 같았던 보스를 죽인 후 조직의 표적이 되어 쫓기는 신세가 된 마이클과 엘레나.

 

어렸을 때 입양 된 동생 줄리앙의 안전을 확인하기 위해 찾아 간 저택에서 마이클은 약물치료를 받고 있는 동생과 조우한다. 광기의 눈빛과 정신 분열 증세를 보이는 동생을 보며 마이클은 줄리앙의 신변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고 양어머니 아비게일은 줄리앙이 오랫동안 아파왔다는 말을 해준다. 고아원 시절, 병약했던 줄리앙은 고아원 동기들에게 폭행과 학대를 심하게 받아왔고 그 충격이 트라우마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입양한 줄리앙을 어머니보다 더한 사랑으로 보살피는 아비게일은 마이클에게도 지나친 호의를 보이는 부분이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조직을 피해서 도망가야 하는 상황에서도 아비게일은 줄리앙의 상태를 핑계로 떠나지 못하게 한다. 게다가 보트 창고에서 발견한 로니의 시체는 뭔가 석연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감지하게 하고 , 시체를 호수에 버리는 모습을 본 엘레나는 충격으로 마이클을 떠난다. 레스토랑의 접시닦이인 줄 알았던 마이클이 시체를 능수능란하게 처리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던 것. 마이클이 시체를 호수에 던지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본 이웃의 신고로 경찰이 들이닥치고 수색작업이후 몇 구의 시체가 발견된다. 잇달아 발견되는 시체로 미국상원의원 저택은 매스컴과 경찰의 집중조명을 받게 되고 과거의 사건과 연계하여 용의자는 줄리앙으로 지목된다. 이들은  줄리앙과 마이클이 자랐던 고아원 '아이언 하우스'의 가족이었고 모두 줄리앙을 끈질기게 괴롭혔던 이들이었다.  

 

보스가 죽으면서 남긴 수천만 달러의 행방을 찾기 위해 마이클을 찾아다니던 지미는 엘레나를 납치하고 마이클은 아비게일과  줄리앙을 위해 사건을 조사하며 아이언 하우스를 추적한다. 여기에서도 공식은 통한다. '쓸모 없으면 살 가치가 없다.'

 

한 자리에 앉아서 밥을 먹는다는 의미의 () 구를 가르치는 것처럼 영화 <차이나타운>에는 핏줄 하나 섞이지 않은 이들이 밥 먹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밥 먹으면서도 따뜻한 대화 한 마디 오가는 법은 없지만 가족은 함께 앉아있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다는 듯. <아이언 하우스>는 그런 가족 드라마다. 동생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달려가주고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을 내놓는 킬러는 파편화 되어 가는 가족의 의미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따뜻한 심장을 가진 킬러, 차이나타운의 영일과 아이언 하우스의 마이클이 겹치는 이유였다.   

 

"내게는 남동생과 누나도 있고, 내 가족이 있어. 그런 당신은 뭐가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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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7-06 18: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 개그프로에서 기획사의 유명한 y씨를 따라한답시고 식`구를 직˝구 (ㅅ 발음에 유독 문제가 있던 설정인 )라고 풍자할 땐
미쳐 깨닫지 못했는데 아마도 이미 한 식구라는 개념(같이 한상에서 밥을 먹는 것은 가족보단 회사가 (또하나의 가족?))자체가
무너졌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타인과 어우러져 식사하는 시간이 더 많은거죠. 가족은 어쩌다 상을 같이 하지만 격식차린 상이
아닌 경우가 많고 전업으로 가사일을 하는 경우도 매우 드물테니 모두 전문인의 손에서 나온 것을 돈을 써 가져다 올려 놓는 정도 일 ,(뭐 하는 분도 있겠죠.아직 한국이니까요)누가 더 타인에 가까운지 모르겠어요. 그런 연장선에서 황정은의 소설[계속해보겠습니다]에서 나나와 결혼하려던 모세의 집에 있던 아버지의요강˝을 남이 비우는게 당연하냐 남이다 아니다,따지던 것이 보여주는 것과 같지 않나..(아,이것은 좀 그래요)당연하다 여겨지던 일이 돈으로 치환되어서 일일이 모든 계산되어지고 있는, 지금..쓸 모˝란...대체 뭘까..요? 요강이라도 비울능력을 말하는 것일까요..(폭력적이라고 생각이 드는) 영화 차이나타운~을 봤는데 저는 그냥 가난한 삶도 형벌이라 는 거구나..이시대는 밟고 누군가의 위에서지 않음 죽는구나.라고만 읽혀서..무거웠다는 기억만..가득했는데..식구라...타인이..밥만 같이 먹는 데 식구가 될리없지않냐고..법으로 강제해도 스르르 풀리는(배신은 있는) 인간사..인데..쓸모라는 것이...의미하는 것은 (밥)피를나눈 사람들을 말함인건지..먹어야 사니..(음?!)어렵구나...덕분에 영화생각을 한번 더 했네요. 책도 다시 생각나고요.. 드림 모노로그님 건강한 여름 보내세요!^^

드림모노로그 2015-07-06 1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이나타운이 느아르 중에서도 블랙 느와르에 가깝죠~..... 밥 먹는 장면이 가장 처량했어요.
매일 같이 짜장면에 밥상머리에서 담배나 피워물고.....저런 식구들도 있구나싶더라구요.
쓸모 없으면 폐기처분 되는 것이
자본주의에서 상품만이 아닌 인간에게도 적용된다는 건. 킬러의 세상을 보면 더 선명해지죠.
쓸모를 누가 정하는지는 모르지만
살면서 익숙해진 공식같기도 하네요.
그장소님도 건강한 여름나기 하세요~~!!!!

[그장소] 2015-07-10 01:15   좋아요 0 | URL
네~ 드림모노로그님도 건강히^^
 
옛 그림에 숨어 있는 열두 동물 옛 그림에 숨어 있는 시리즈
이상권 지음 / 현암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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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그림에 숨어 있는 열 두 동물> 은 말그대로 옛 그림에서 찾아 낸 동물 이야기다. 십이지 신이라 하는 열 두 동물 이야기는  구전설화나 민요로 자주 들어왔던 친숙한 이야기들과 옛그림에서 풀어내는 이야기 보따리이다.  <옛 그림에 숨어 있는 상상의 동물> 을 통해서  상상의 동물이야기를 들려준 저자가 이번에는 십이지 신인 열 두 동물 이야기를 들려준다.

 

십이지 신은 때론 미신이라 설화처럼 치부되지만 우리의 삶과 뗄레야 뗄 수 없는 문화의 일부이기도 하다. 가령 쥐띠는 부지런하다거나 소띠는 일복이 많다거나 돼지띠는 복이 많다는 속설등은  태어난 해의 동물의 성격에서 유추된 속설이다.  

 

십이지 신의 기원을 거슬러가면 도교의 영향을 받아 방향과 시간을 지키는 신들이었는데  불교의 세력이 커져 도교를 흡수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불교를 수호하는 신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수호신으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방향이나 시간을 지키는 것뿐만 아니라 사방의 잡귀나 악신을 몰아내는 신의 의미가 더해졌고 무서운 외모에 무기를 든 장수들도 나타나게 되면서 민간신앙의 상징으로 자리잡아 왔다. 

 

십이지 신의 순서는 어떻게 정해졌을까?  석가모니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열 두 동물을 불렀는데 맨 먼저 도착한 동물이 쥐, 그다음이 소, 다음이 호랑이, 토끼... 이렇게 해서 열두 신의 순서가 정해졌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십이지 신에는 고양이가 들어 있지 않은데 그 이유가 쥐가 고양이에게 잘못 알려 주었고 쥐말만 믿고 있던 고양이는 다음 날에나 도착을 했기에 십이지 신에 빠졌다고 한다. 그래서 개와 고양이는 사이가 나쁘다는 것. (우리나라 전래동화에도 개와 고양이는 사이가 안좋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일부 나라에서는 십이지 신에 토끼를 빼고 고양이를 넣는 나라도 있다고 한다. 순서도 우리나라는 쥐부터 시작하지만 호랑이부터 시작하는 나라도 있고 각 민족의 문화에 따라 순서 역시 달라진다고 한다.

 

 

십이지 신의 첫 시작인 쥐 그림은  [서설홍청]과 [초충도 중 수박과 들쥐]라는 옛그림에서 그리고 있는 쥐의 이야기이다. [서성홍청]에선 당근을 훔쳐먹는 쥐가 나오고, [추충도]에서는 수박을 훔쳐먹는 쥐가 나오는데 옛 사람들에게 쥐가 도둑의 상징이 되어 버린 이유는 들에서 자라던 들쥐들이 인간들이 사는 집에 숨어 들어 집쥐가 되면서부터 음식을 훔쳐먹는 동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옛그림을 풀이하며 쥐에 관한 설명 뿐만 아니라 대화형식으로 쓰여있어 아이들과 재미있게 대화하며 읽기에 좋은 책이다.

 

풍요로움과 우직함을 상징하는 소는 [뇌경]과 [기우귀가]의 옛그림에서 읽어내고 [맹호도]와 [까치 호랑이]에서는 용맹스럽지만 착한 호랑이의 모습을 읽어주고, 선하고 지례로운 동물인 토끼는 [토끼와 자라],[호취응토] 라는 옛그림에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동물들의 특성이 이 책 옛그림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지혜의 동물이나 충직한 동물, 상상의 동물, 재물복이 있는 동물에 대한 이미지는 오랜 역사를 흘러오며  만들어진 문화의 산물들이다. 옛그림이 들려주는 동물이야기도 재미있고 그 안에 삽화들도 정겨움이 넘쳐나고 십이지 신에 대해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어  유익함이 넘쳐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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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경전
해이수 지음 / 자음과모음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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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를 벗어나는 일이 예삿일이 아니니

승두(화두)를 단단히 잡고 한바탕 공부할지어다.

추위가 한 번 뼈골에 사무치지 않으면 어찌 코를 찌르는 매화향기를 얻을 수 있으리오.

-[난세보세한심]-황벽 희운

 

 

어느 날 시작된 새벽산행으로 나는 많은 것을 새로 배우고 있다. 새벽산행을 시작하기 전에는 건강한 사람들의 전유물 정도로 생각했지만 절대 아니었다. 산행을 하는 것이 살아가는 일만큼이나 녹녹치 않다는 걸 알게 된 건 시간이 흐를수록 몸에서 아픈 신호가 감지될 때이다.  어떤 날은 다리가 아파 파스를 붙이고 올라야 하고 어떤 날은 현기증이 일어 앞이 깜깜해지기도 한다. 파스를 붙이고 빈혈약을 먹으면서 산을 오르는 이유는 멈추면 더 아프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아픔만큼 얻게 되는 계절의 정수는 기꺼이 희생을 감내하게 할 정도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해이수의 [눈의 경전]은 주인공이 폭풍설이 몰아치는 4,700미터의 히말라야 산중을 헤매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그의 이름은 김완. 환영과 환청에 사로잡혀 과거를 부여잡고 있는 한국인 완에게서 처절함이 보인다. 히말라야의 길에 뿌려진 유밍과의 추억이 너무 많았던 걸까. 소설은 완이 히말라야 종주와 함께 과거 회상씬이 교차되어 서술된다.

 

완이 시드니에서  유일한 한국인 유학생으로 공부하며 축축한 샌드위치와 주스로 배를 채울 때 다가온 중국인 유학생 유밍과의 만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 유학생 유밍은 뇌에 손상이 올 정도로 공부하지 않으면 받기 힘든 최고 ‘HD’ 등급을 받는 전학년에서 독보적인 장학생이다. 

 

모든 과목에서 압도하는 성적을 자랑했지만 유밍은 항우울증 약을 복용할 정도로 불안과 우울증에 시달렸다. 유밍 덕에 완은 공부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고 그 덕에 'F' 학점을 면한다. 유밍의 적극적인 구애로 애인 아닌 애인의 사이로 지내게 되지만 완은 유밍을 이성이상의 감정으로 생각하지 못한다. 유밍은 완의 머리보다 두 배는 크고, 허리는 찾아볼 수 없는데다 엉덩이는 펑퍼짐했다. 그리고 가끔씩 묘사되는 유밍의 기묘한 패션감각은 상상만으로도 비호감이 느껴진다.

 

 완의 기억에서 재생되는 유밍은 늘 그런식이었다. 기기묘묘한 느낌. 완은 유밍을 집착적으로 한 군데만 모든 에너지를 불사라는 스타일’이라 표현하는데 둘의 관계는 전적으로 유밍에 의해 주도되는 것이었고 완은 늘 제 삼자의 시선에 머물러 있다. 유밍의 감정은 솔직하게 보여지는 반면 완은 시종일관 답답함으로 일관한다.  

 

집착이 점점 심해지자 완은 유밍을 상대하기 힘들어 했고 마침 수연이 프로젝트로 시드니에 방문한다. 완의 이기적이고 우둔하며 유약한 면모는 여자친구 수연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유밍의 위태로움과 불안에 질린 나머지 완은 수연에게 속한 균형과 절제, 고요와 안정의 세계가 마음에 끌렸다. 유밍은 힘겹게 계속해서 감당해야 하는 반면 수연은 최소한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점도 달랐다.

 

극단으로 치닫는 유밍을 피해 도망치듯 한국으로 돌아온 후 수연과 결혼식을 올린 완은 유밍으로부터 오는 수십통의 이메일을 외면한다. 마음 한 구석에 유밍을 향한 죄책감을 지닌 채 수연과의 관계는 부부라기보다 균형과 절제라는 사회적 관계  '컴퍼니언십'에 머문다. 둘의 관계는 고요한 호수 아래에서 물이 썩어가듯 차츰 변질되어 갔고, 완의 내면은 서서히 곪아가고 있다.

 

이렇게 대조되는 두 여인 사이에서 완은 다가가지도 멀어지지도 않은채 답답함으로 일관한다.  단 한번 그 답답함을 뚫고 자신의 감정을 표출한 순간이 오는데  유밍의 교통사고 소식을 들은 직후였다.  이후 완은 유밍의 소원이었던 히말라야로 떠나고 그곳에서 완은 유밍에게 처음으로 '사랑해' 를 외친다.  

   

'왜 나는 관계가 상처를 먹으며 성장한다는 것을 몰랐을까?' 

 

완의 사랑은 시종일관 이기적이다. 유밍의 사랑앞에서 그는 늘 도망갈 생각을 하고 있었고, 수연과는 사회적 관계를 맺는 선에서 절대 나아가지 못한다. 상처받을까 두려워서 시작조차 하지 않으려는 완의 모습은 그다지 낯설지 않다. 유밍이 꿈꾸었던 히말라야 산맥을 향해 나아가며 수없이 죽음의 고비를 넘길 때마다 유밍과의 기억은  완이 차마 깨닫지 못했던 사랑의 한 부분(눈)으로 흩날린다. 자신이 차마 두려워 보지 못했던 사랑의 실체, 그것은 고통스러운 순례길 사이로 뜨는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기억이라는 것을, 

 

소설에 등장하는 세 사람은 모두 아프다. 그 아픔은 관계에서 온다. 스펙쌓기에 열중하며 보낸 청춘들에게 세상은 '관계가 상처를 먹으며 성장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는다. 완은 청춘을 도서관에서 보냈고 수연은 프로젝트와 씨름하며, 유밍은 공부로 인해 기형적인 사랑을 하고 있다. 세 사람의 사랑은 그래서 안타깝고 가슴 아프다. 데칼코마니처럼 찍어낸 듯 젊은이들의 방황과 고통은  아프지만 그 끝에 희망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아파도 걸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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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실천하는 인문학 - 꽉 막힌 세상, 문사철에서 길을 찾다
최효찬 지음 / 와이즈베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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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고민 없이 산다. 인생에서 딱히 커다란 욕심도 없고 더 나아갈 자리도 없다. 지금의 내 삶을 안분지족이라 표현한다 하여도 딱히 틀린 표현은 아니다. 내가 현재 나의 삶에 만족하는 것은 그동안 읽어왔던 인문학자들 덕이라 여겨지기도 한다. 처음 강신주 열쇠로 들어간 인문의 세계는 장석주의 문을 지나 도정일, 신영복으로 이어졌다. 평생 한 세계만 바라보며 살아왔던 나의 세계가 전혀 알지 못한 세계의 문을 지나오면서 확장되어 갔다. 어쩌면 그것은 내 인생에서 터닝포인트라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싶다.

 

새는 알에서 깨어나려 한다. 알은 곧 세계다. 새로 탄생하기를 원한다면 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p18

 

[데미안]에 나오는 이 문구는 헤르만 헤세가 신학교를 포기한 후 시계공장 견습공과 서점 판매원을 하게 되면서 파괴했던 자신의 세계이야기이다. 인문학이란 인식의 틀을 깨는 공부라고 인문학자들이 대동소이하게 말하지만, 실천의 인문학은 가슴에서 발까지 감동이 옮겨져야 가능한 일이며 그것은 더 나아가 자신의 세계를 깨어야만 열리는 세계이다. 

 

경향신문사 기자였던 저자는 <지금 실천하는 인문학>에서 자신의 인생에서의 터닝포인트가 이었다고 한다. 기자를 그만두고 서른 권의 책을 낸 작가로 살면서 모아 두었던 세계적 인용문들이 바로 이 책에 담겨 있다. 읽으면서 저자의 전방위적 독서 내공이 엄청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적 인용문은 총 다섯 가지의 주제로 분류되어 있고 첫째가인문학이 지닌 창의적 사고에 대하여, 두 번째는 마음가짐에 대하여 세 번째,관계. 네 번째는 공부법, 다섯 번째는 인생에 대한 글들이다. 

 

생텍쥐베리와 최인호의 어머니에게 배우는 문학적 상상력과 이황에게서 입장이 아닌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법과 영국 시인인 블레이크가 인식의 문이 활짝 열릴 때, 우리는 모든 것의 진실한 모습을 볼 것이다.”라고 한 것처럼 직관과 창조적인 사고를 지향했던 잡스의 삶에서 실천의 인문학을 엿본다.

 

만족함을 알고 욕망을 그칠 줄 안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일상에서 나 스스로 실천하기를 힘쓴다면 이것이야말로 '실천하는 인문학'이 시작이 되는 셈이다.-저자의 말 중에서

 

인문학으로 깨어진 한 세계, 나는 그것을 경험했다 말할 수 있다. 스스로 실천하기 힘쓰는 아주 작은 노력들이  층위를 이루며 지금의 나를 만들어주었다. 그래서 별 걱정없이 산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지를 깨달아야 철학을 할 수 있다는 뜻이라고 한다. 지금도 매일 깨닫는 것이지만 인문학을 하면서 깨달았던 한 가지의 진리는 내가 여전히 무지하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조금 욕심을 낸다면 더 많이 읽고 더 많은 세계를 깨뜨려 나아가고 싶다는 것. 실천의 인문학을 위해서.

책에서 발췌 ▼

 

승자의 언어 조건은 바로 '입장'을 버리고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입장은 생각의 유연성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반면 승자가 되려면 새로운 관점에 대해 늘 개방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간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남의 인생을 사느라 삶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생각해 낸 결과에 얽매어 사는 도그마에 갇혀 있지 마세요. 다른 사람의 의견이 여러분 내부의 목소리를 잠식하도록 놔두지 마세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가슴과 직관을 따르는 용기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가슴과 직관은 여

여러분이 진실로 무엇이 되고 싶은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나머지 모든 것은 부차적입니다.-p60

 

그리스인을 구원한 것은 예술이다. 그리고 예술을 통해서 스스로를 구원한 것은 삶이다.-p92니체

 

때로 둔감함은 정신을 안정시키고 좋은 기분을 유도한다

-와타나베 준이치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의 경영 철학은 運鈍根(운둔근)’이다,

운은 우둔하면서도 끈기 있게 기다리는 사람에게 온다는 말이다.

운을 잘 타고 나가려면 역시 운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일종의 둔한 맛이 있어야 하고 운이 트일 때까지 버텨 내는 끈기와 근성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때 귀가 얇으면 결코 기다리지 못한다. 둔함은 때로 부정적인 요인으로 비판받지만 성공의 필수 요소인 셈이다.

 

이기적 유전자가 성공을 이끄는 시대는 지났다.

 

 

군자는 두루 어울리지만 떼거리 짓지 않고, 소인은 떼거리 짓지만 두루 어울리지 않는다.”

 

스스로 높은 자리에 오르려 하지 말고 가장 평범한 자리에 머물러라.”

 

우리 삶에는 시간의 점이 있다.

이 선명하게 두드러지는 점에는

재생의 힘이 있어

이 힘으로 우리를 파고들어

우리가 높이 있을 때는 더 높이 오를 수 있게 하고

우리가 쓰러졌을 때는 다시 일으켜 세운다.

-윌리엄 워즈워스

 

평생 성장을 멈추지 않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바로 기본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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