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의 경전
해이수 지음 / 자음과모음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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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를 벗어나는 일이 예삿일이 아니니

승두(화두)를 단단히 잡고 한바탕 공부할지어다.

추위가 한 번 뼈골에 사무치지 않으면 어찌 코를 찌르는 매화향기를 얻을 수 있으리오.

-[난세보세한심]-황벽 희운

 

 

어느 날 시작된 새벽산행으로 나는 많은 것을 새로 배우고 있다. 새벽산행을 시작하기 전에는 건강한 사람들의 전유물 정도로 생각했지만 절대 아니었다. 산행을 하는 것이 살아가는 일만큼이나 녹녹치 않다는 걸 알게 된 건 시간이 흐를수록 몸에서 아픈 신호가 감지될 때이다.  어떤 날은 다리가 아파 파스를 붙이고 올라야 하고 어떤 날은 현기증이 일어 앞이 깜깜해지기도 한다. 파스를 붙이고 빈혈약을 먹으면서 산을 오르는 이유는 멈추면 더 아프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아픔만큼 얻게 되는 계절의 정수는 기꺼이 희생을 감내하게 할 정도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해이수의 [눈의 경전]은 주인공이 폭풍설이 몰아치는 4,700미터의 히말라야 산중을 헤매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그의 이름은 김완. 환영과 환청에 사로잡혀 과거를 부여잡고 있는 한국인 완에게서 처절함이 보인다. 히말라야의 길에 뿌려진 유밍과의 추억이 너무 많았던 걸까. 소설은 완이 히말라야 종주와 함께 과거 회상씬이 교차되어 서술된다.

 

완이 시드니에서  유일한 한국인 유학생으로 공부하며 축축한 샌드위치와 주스로 배를 채울 때 다가온 중국인 유학생 유밍과의 만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 유학생 유밍은 뇌에 손상이 올 정도로 공부하지 않으면 받기 힘든 최고 ‘HD’ 등급을 받는 전학년에서 독보적인 장학생이다. 

 

모든 과목에서 압도하는 성적을 자랑했지만 유밍은 항우울증 약을 복용할 정도로 불안과 우울증에 시달렸다. 유밍 덕에 완은 공부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고 그 덕에 'F' 학점을 면한다. 유밍의 적극적인 구애로 애인 아닌 애인의 사이로 지내게 되지만 완은 유밍을 이성이상의 감정으로 생각하지 못한다. 유밍은 완의 머리보다 두 배는 크고, 허리는 찾아볼 수 없는데다 엉덩이는 펑퍼짐했다. 그리고 가끔씩 묘사되는 유밍의 기묘한 패션감각은 상상만으로도 비호감이 느껴진다.

 

 완의 기억에서 재생되는 유밍은 늘 그런식이었다. 기기묘묘한 느낌. 완은 유밍을 집착적으로 한 군데만 모든 에너지를 불사라는 스타일’이라 표현하는데 둘의 관계는 전적으로 유밍에 의해 주도되는 것이었고 완은 늘 제 삼자의 시선에 머물러 있다. 유밍의 감정은 솔직하게 보여지는 반면 완은 시종일관 답답함으로 일관한다.  

 

집착이 점점 심해지자 완은 유밍을 상대하기 힘들어 했고 마침 수연이 프로젝트로 시드니에 방문한다. 완의 이기적이고 우둔하며 유약한 면모는 여자친구 수연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유밍의 위태로움과 불안에 질린 나머지 완은 수연에게 속한 균형과 절제, 고요와 안정의 세계가 마음에 끌렸다. 유밍은 힘겹게 계속해서 감당해야 하는 반면 수연은 최소한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점도 달랐다.

 

극단으로 치닫는 유밍을 피해 도망치듯 한국으로 돌아온 후 수연과 결혼식을 올린 완은 유밍으로부터 오는 수십통의 이메일을 외면한다. 마음 한 구석에 유밍을 향한 죄책감을 지닌 채 수연과의 관계는 부부라기보다 균형과 절제라는 사회적 관계  '컴퍼니언십'에 머문다. 둘의 관계는 고요한 호수 아래에서 물이 썩어가듯 차츰 변질되어 갔고, 완의 내면은 서서히 곪아가고 있다.

 

이렇게 대조되는 두 여인 사이에서 완은 다가가지도 멀어지지도 않은채 답답함으로 일관한다.  단 한번 그 답답함을 뚫고 자신의 감정을 표출한 순간이 오는데  유밍의 교통사고 소식을 들은 직후였다.  이후 완은 유밍의 소원이었던 히말라야로 떠나고 그곳에서 완은 유밍에게 처음으로 '사랑해' 를 외친다.  

   

'왜 나는 관계가 상처를 먹으며 성장한다는 것을 몰랐을까?' 

 

완의 사랑은 시종일관 이기적이다. 유밍의 사랑앞에서 그는 늘 도망갈 생각을 하고 있었고, 수연과는 사회적 관계를 맺는 선에서 절대 나아가지 못한다. 상처받을까 두려워서 시작조차 하지 않으려는 완의 모습은 그다지 낯설지 않다. 유밍이 꿈꾸었던 히말라야 산맥을 향해 나아가며 수없이 죽음의 고비를 넘길 때마다 유밍과의 기억은  완이 차마 깨닫지 못했던 사랑의 한 부분(눈)으로 흩날린다. 자신이 차마 두려워 보지 못했던 사랑의 실체, 그것은 고통스러운 순례길 사이로 뜨는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기억이라는 것을, 

 

소설에 등장하는 세 사람은 모두 아프다. 그 아픔은 관계에서 온다. 스펙쌓기에 열중하며 보낸 청춘들에게 세상은 '관계가 상처를 먹으며 성장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는다. 완은 청춘을 도서관에서 보냈고 수연은 프로젝트와 씨름하며, 유밍은 공부로 인해 기형적인 사랑을 하고 있다. 세 사람의 사랑은 그래서 안타깝고 가슴 아프다. 데칼코마니처럼 찍어낸 듯 젊은이들의 방황과 고통은  아프지만 그 끝에 희망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아파도 걸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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