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과 분노
로런 그로프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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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이 책을 읽게 되었는가 생각해본다. 예전에 시드니 쉘던 이라는 작가의 소설도 생각나고 근래 몰아서 읽고 있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들도 생각한다. 전자는 비슷한 계열에 놓아보기 위해, 후자는 대조적이라는 이유로.

600 쪽에 이르는 분량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지루할 염려 필요없다는 것은 인정한다. 설사 다 읽고 별점 3점 주는 사람에게도 읽는 동안엔 흥미를 놓치지 않게 한다는 점.

통속적이고 드라마 같은 줄거리라고 쓸까, 사는게 그럼 통속 드라마 같은 것이지 뭘 더해야 하느냐, 어떻게 포장되길 바라느냐 라고 쓸까? (이 리뷰를 말이다).

그해 최고의 소설이라고 극찬했다는 오바마에게 실망했다는 말은,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었을 오바마의 그 한마디에 낚이고, 그것을 앞에 내세운 출판사의 기획에 낚여 책 구매 결정한 나는 또 뭔가 싶어 하지 말기로 한다.

번역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한풀 꺾였을지도 모르는데 여전히 등장인물들의 센스있고 축약적인 대화 방식, 세익스피어 작품 속 문구의 재치있는 인용등도 돋보인다는 것도 인정.

소설은 크게 두 파트, 운명과 분노로 나뉘어져 있는데 운명은 남자인 로토 편에서, 분노편은 여자인 마틸다 편에서 기술하는 방식이다. 책 소개글을 보면 운명과 분노라는 제목의 단어를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과 관련지어서, 그리고 두 인물 로토와 마틸다의 성격과 행동, 걸어온 길과 관련지어 설명을 해놓았던데 나는 읽으며 딱히 그런 생각이 들지는 않았고 다 읽고 나서도 별로 공감이 되지 않아서 유감이었다.

 

그래도 다음 처럼 읽으며 표시해놓은 구절도 있기는 했다. 로토가 다른 여자 극작가에게 여성의 창의성에 대한 자기의 생각을 말하는 부분이다. 이 말을 하고서 장내의 웅성거림과 분노를 일으킨 그 구절. 길지만 옮겨적는 이유가 있다.

 

우리가 태어날 때 수명이 제한되어 있듯 창의성의 양도 제한되어 있어요. 만약 여자가 자신의 창의성을 가상의 삶이 아니라 실제의 삶을 창작하는 데 쓰기로 한다면 그건 영예로운 선택이라는 말입니다. 여자가 아기를 낳는다는 건 종이 위에 허구의 세상을 써내려가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걸 창작하는 겁니다. 단지 삶의 복제품이 아니라 진짜 삶을 창작하는 거니까요. 세익스피어가 어떤 작품을 남겼건 그건 같은 나이의 평균적이고 학식 없는 여자가 아기를 낳은 것보다 훨씬 못한 일입니다. 그 아기들이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를 만드는 데 필요한 조상이니까요. 어느 누구도 연극 한 편이 인간의 한 생명만큼 가치있다고 진지하게 주장하진 못할 겁니다. 무대의 역사가 지금 이 말을 뒷받침합니다. 역사적으로 여자가 남자보다 창의적인 천재성을 덜 드러냈다면, 그건 여자가 창의적인 에너지를 삶 그 자체에 쏟아부어 그들의 창작을 내면적인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258)

 

남자 주인공의 입을 빌어 얘기했지만 여자인 작가의 생각이라고 봐도 될지 모르겠다. 저자가 작품 전반적으로 세익스피어를 자주 인용하긴 했지만, 그리고 실제 그리스 신화와 세익스피어에 빠져 산 시간이 있었다고 어느 인터뷰 기사에서 얘기하기도 했지만, 아기 낳는 일을 세익스피어에 비교하여 지지하고자 한 글은 여기서 처음 본다.

 

그녀 주변의 이 여자들은 그런 유령 같았다. 얼굴 피부는 팽팽했다. 그들은 주방장이 만든 맛좋은 요리를 세 입 야금거리고는 배가 부르다고 선언했다. 백금과 다이아몬드를 주렁주렁 달고 다녔다. 그것들은 자아의 종기였다. (519)

 

마틸다가 주위의 다른 여자들을 보면서 혼자 생각하는 대목인데, 자아의 종기라는 표현이라니. 외워두고 싶었다.

'그레이트 아메리칸 아티스티티스 (Artistitis)' 라는 말도 나오는데 (521), 늘 더 커지고, 더 요란해지고, 헤게모니의 가장 높은 지점에 올라가려고 떠밀고 다투는, 이 나라 (여기선 미국을 말함) 에서 남자들이 예술을 하겠다고 덤빌 때 걸리는 일종의 병이라면서 어느 여자 평론가가 신랄하게 꼬집는 말이다. 접미사 -itis 는 염증이나 병의 이름에 붙이는 어미인데, 아티스트에 이 접미사를 붙여 만든 말이라고 주석이 붙어 있다. 우연인지, 실제 병 이름 Arthritis (관절염) 와 철자도 비슷하다.

 

결혼 전 뿐 아니라 결혼하여 부부가 된 후에도 로토와 마틸다의 관계는 육체적인 끌림이 전부인 것처럼 묘사되어 있는 것이 가장 큰 비공감 이유였다. 결혼 후 발견된 배우자의 결혼 전 과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한다.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소설 속에 담는 방법이 한가지는 아닐 것이다. 그것이 깊은 성찰의 결과물로 전달되는 소설도 있지만 줄거리의 전개, 인물의 행동, 거듭되는 반전을 통해 전달되는 소설도 있는게 당연하다. 그런데 내 경우엔 후자의 경우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기가 더 어렵다. 왜 썼을까? 그래서 뭘 말하고 싶은 걸까? 작가가 인간의 삶을 꿰뚫어보는 통찰의 흔적은 어디서? 리뷰를 쓰는 중에도 여전히 생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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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01-22 0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 아침에 일찍 하루 시작하시는 hnine님, 오늘도 기분좋고 즐거움 가득한 하루 되세요.^^

hnine 2018-01-22 06:47   좋아요 1 | URL
요즘 서니데이님도 하루를 일찍 시작하시는 것 같아요 ^^
저희는 일단 아들을 6시 30분에 깨워야 하기 때문에요.
우리 같이 오늘 하루를 잘 살아내기로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