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마주한 고전 - 전문번역가 이종인이 추천하는 시대의 고전 360
이종인 지음 / 책찌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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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여기 알라딘 서재에 내가 올린 리뷰가 869편. 책을 읽고 나면 좋았든 그렇지 않았든, 짧게든 길게든, 읽었다는 흔적을 그렇게 남겨놓아야 직성이 풀렸다. 즉, 나에게 있어 책읽기 행위란 읽고 나서 감상을 기록해놓은 것 까지 라고 할 수 있다. 감상문이라고 할지 독후감이라고 할지, 이책을 읽고 나니 내가 그동안 여기에 써온 그것들은 구슬의 나열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겠다. 구슬을 엮어 목걸이를 만들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관련된 책을 연결시켜 나름대로 하나의 키워드로 묶고, 하나의 스토리를 만들어 쓸 수 있는 수준이 바로 그 목걸이를 만드는 작업에 해당한다면 말이다.

이 책의 저자 이종인은 번역가로 그 이름이 눈에 익은 분. 알고 보니 대단한 독서광이다. 360편의 책, 특히 근래에 출판된 책 보다는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책들 우선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평소 그의 독서 이력을 잘 알고 있는 출판사 사장으로부터 제안을 받고 이 책을 엮게 되었다고 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렇게 네 장으로 나누어 인생의 사계와 어울리는 책들을 모아 놓았다. 첫장 첫 책은 장영희 교수의 <내 생애 단 한 번>, 제목을 "딸에게 아버지란"이라고 붙였다. 책을 읽고난 느낌을 한 마디로 응축한 것이 서평의 제목이라고 본다면 이분의 제목 정하는 능력은 평범하지 않다. 몇 가지 예로 들어보자면, "조건의 아버지, 무조건의 어머니 <소유냐 존재냐>", "모든 문학은 가족 로망스에서 출발 <프로이트 전집 9권>", "여름이 되기 전에 읽을 것 <잎 속의 검은 잎>", "무의미한 스트레스, 유의미한 스트레스 <파블로프>", "신데렐라 스토리와 페미니즘 연구 <제인 에어>", "완벽하게 생을 마무리하려는 착각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없는 줄 알기에 꿈꾸는 그것 <유토피아>", "괴테의 정신적 자서전 <파우스트>", "카르페 디엠은 놀지 말고 뭔가를 하라는 뜻 <서정시 11, 카르페 디엠>".

특히 제인 에어를 신데렐라 스토리로 본 점, 여자를 주인공으로 한 신데렐라 스토리가 있다면 남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허레이쇼 앨저 스토리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용상 관련이 있는 책들을 같이 소개하기도 하고, 제인 에어의 경우처럼 <레베카>,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등을 제인에어에서 변형되거나 응용된 후속작으로, <오트란토 성>, <우돌포성의 신비> 같은, 나로선 제목도 처음 들어보는 이 소설들은 제인에어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는 고딕 로망스로 소개하기도 했다. 세익스피어 희곡 속의 장면이나 대사가 사실은 그보다 훨씬 전의 고전 작품에서 인용된 예도 찾아서 보여주고, 어떤 소설의 주인공이나 대사때문에 지금까지 하나의 관용적 표현으로 쓰이는 예를 소개한 것은 아마 그의 오랜 번역가로서의 연륜일지. 당연히 여기 실린 360편의 고전 중에는 그가 번역한 책들도 포함되어 있다 (로마제국 흥망사, 흐르는 강물처럼, 중세의 가을 등).

서양 고전 뿐 아니라 동양의 고전, 소설 뿐 아니라 시집, 기독교 관련 서적 뿐 아니라 불교, 유교 관련 서적, 600여 페이지, 360편이라는 분량때문이 아니더라도 그는 실로 다양한 범위의 독서를 했다.

읽은 책은 읽은 책이라서 반갑게 읽히고, 읽지 않은 책은 읽지 않았기 때문에 마치 처음 듣는 이야기를 듣느라 귀를 쫑긋 세운 어린 아이처럼 호기심을 가지고 읽게 된다.

봄, 여름, 가을, 겨울중 가을에 해당하는 장에는 인생의 시기중 중년에 다가오는 고뇌, 반추를 내용으로 하고 있는 책들을 많이 소개하였는데 내 나이 때문인지 특히 더 공감하며 읽었다. 많이 알려진 시 <릴케의 가을날>의 마지막 연,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이후로도 오래 고독하게 살아

잠자지 않고, 읽고, 그리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이 구절의 의미가 이제서야, 이 나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해가 되다니. 지금 의미없는 삶이라도 내일은 다르겠지, 다를 수 있어라는 생각으로 이어지던 나이가 있었는데, 이제는 지금 의미없는 삶은 앞으로도 의미없으리라는 두려움으로 이어지는 것, 그것이 나의 우울의 한 축이 아니던가.

올더스 헉슬리가 <과학과 문학>이라는 책에서 했다는 말, "시인은 과학자가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는 존재다"라는 문장은 꼭 기억했다가 인용해보고 싶다.

시작하는 문장이 유명한 책도 있지만 마지막 문장이 유명한 책도 있다. 이를테면 "인생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좋지도 혹은 그렇게 나쁘지도 않다"라는 문장은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의 끝맺는 문장인데 워낙 많이 알려져 있으니까 나도 알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지금은 같은 말이 가슴으로 들어온다. 고전이란 그런 것.

독일의 문필가 빌헬름 셰퍼의 말, "작가의 임무는 단순한 것을 의미심장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심장한 것을 단순하게 말하는 것이다."는 여러 군데서 인용하고 있는데, 작가는 아니더라도 말을 하거나 글을 쓸때 참고로 하면 좋을 말이다.

 

필자도 말했듯이 책을 읽는 것은 어떤 목적이 있어서 읽는다기 보다 즐거워서 읽는다. 당시에는 일단 즐거워서 읽었던 책들이 인생의 어느 시기, 행복한 순간보다는 포기와 절망의 순간에 우리를 일으켜 세워준다. 일희일비의 경박함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신간 소개에 혹해서 읽기보다 일단 사들이고 보는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듯이 그는 상당수의 책을 읽고, 또 읽고, 또 읽어오고 있다고 한다. 나에게는 그런 책이 있던가. 없지야 않지만 그저 몇권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은 책을 읽은 후 이렇게 인터넷 공간에 기록으로 남기고 있지만 언젠가는 그동안 읽은 책들을 이렇게 정리해서 나만의 책으로 만들어보고 싶다. 그런 작은 결심을 하며 이 책 읽기를 마쳤다. 목걸이가 아니라 구슬의 나열이라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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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7-02-16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런 구슬의 1인 ㅡ 줄서고 갑니다. 고전의 향기가 물씬 나서 넘 좋게 읽었네요!^^ 독후감이든 독서 기록이든 있어야 제 스스로도 좀 편하더라는 말을 위로도 뭣도 아니게 남기고 가요!^^

hnine 2017-02-16 22:44   좋아요 1 | URL
이제 건망증까지 생겨서 기록을 해두지 않으면 어떤 책은 읽으려고 맘만 먹고 안읽은 책인지, 그러다가 결국 읽은 책인지, 읽다가 중단한 책인지, 도저히 모르는 경우도 있어요 ㅠㅠ
그리고 기록하면서 비로소 생각이나 느낌이 정리되는 느낌이 드니까요. 생각이 허공으로 날라가버리지 않게 뿌리는 픽사티브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요.
이 책은 두꺼운 것에 비해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게 읽었어요.

[그장소] 2017-02-16 22:58   좋아요 0 | URL
아ㅡ픽사티브 오랜만에 들어요!^^ 정말 딱 알맞은 단어 아닌가 싶고요!^^
음음, 그렇죠. 생각을 좀 ( 그저 잠시이든 오래든) 잡아줄 것이 우리에겐 기록 뿐이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