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요하네의 우산
김살로메 지음 / 문학의문학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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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소설을 좋아해서 편식하듯 읽어온 날들에 비하면, 한동안 읽지 않고 지냈다고 해도 그 기간은 잠깐일지 모른다. 그래도 이 책을 앞에 두고 보니 참으로 오랜만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이 한국 소설과 떨어져 지내온 나를 다시 흔들어 깨워줄 것인가.

표지 안쪽의 저자 소개글을 읽어본다. '안동에서 태어나 열두해를 살고 대구로 터전을 옮겨...'

안동이라. 글을 읽어보기도 전에 안동 출신이면서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 이름이 주루룩 떠오른다. 유안진, 권여선, 김서령... 나의 넘겨짚음일까. 이들의 글은 다르면서도 어딘지 공통점이 느껴졌었다. 뭐라고 분명하게 표현할 수 없는 그 분위기와 느낌. 김살로메의 이 책을 읽고나면 그 느낌이 혹시 더 선명해질까 아니면 그저 우연에 불과한 느낌이었다는 쪽으로 기울게 될까.

열개의 제목에서 처음 골라 읽은 것은 역시 책 제목과 같은 <라요하네의 우산>이었다. 나중에 다른 작품들을 읽고보니 이 작품 속 인물은 그래도 평범했다. 지미와 샌드리라는 이름도, 라요하네라는 특이한 여행지 이름도, 샌드리의 강박증도, 교도소 신세를 지고 있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출소하는대로 다른 여자와 살기로 선포한 지미 남편도, 모모의 아르튀르라는 우산과 연결시켜 맺는 결말도. 극히 모범적이고 전형적인 단편을 읽었다는 느낌을 가지고 다음에 읽은 작품은 <알비노의 항아리>. 제목만 봐서는 어떤 내용인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 소설 중에는 다 읽고 나면 그래서 더 좋은 작품이 있고, 제목에 비해 식상한 수준의 내용에 실망스러운 작품이 있는데, 억지스럽지 않으면서 참신한 내용이기가 쉬운가. 수백년이 흘러도 여전히 버티고 있는 가부장적 사고방식, 여자의 희생과 양보가 강요되는 사회의 한 풍경을 들여다보고 있는 나도 그 사회의 일원임을. <암흑식당>의 배경과 인물들은 또 얼마나 기발한지. 암흑식당이라는 아이디어의 출처가 어디든 상관없이, 배경과 주제와 인물 묘사가 딱 떨어진다는 느낌이었다. 개인의 내력은 곧 가족의 내력. 떨치려 몸부림치지 않는한 가족의 내력은 그대로 나의 몸과 정신에 자리잡고 내 인생 속에 되풀이된다. 좋아할 대상으로서 남자를 늘 옆에 두어야만 하는 주인공도, 도벽을 버리지 못하는 여동생도. 그래서 <귀휴>는 인정해야하는 쓸쓸함이었다. 적당히 추리 기법이 도입되어 궁금증에 끝까지 단번에 읽어야했던 <피의 일요일>. 작가는 뻔한 반전의 결말 대신 마지막 한줄에 해당하는 말은 비워둠으로써 이야기의 격이 살아있도록 했다. 이것은 <누가 빈지를 잠갔나>에서도 마찬가지. 누가 빈지를 잠갔을까? 빈지문이란 어떤 문을 말하는지 작품속에서 작가는 이렇게 저렇게 묘사하느라 애썼는데, 정확한 명칭은 몰랐어도 그게 어떤 문을 말하는지 나는 금방 떠오르더라. 지난 일을 기억하고 있다고 할때 과연 나의 기억은 얼마나 객관적일까. 무엇을 기억하고 있느냐보다 어떻게 기억하고 있느냐를 풀어나가다 보면 그 사람의 내면이 술술 드러나게 될 것이다. 빈지문이 무엇인지 금방 알아차렸듯이 <강 건너 데이지>에 나오는 듀란듀란의 리플렉스라는 노래를 일부러 검색해보지 않아도 알만한 세대인 나는 그 오래전의 그룹과 그들의 노래를 작품 속에 끌어다가 쓸 수 있는 작가의 솜씨가 부러웠다. <왼손엔 달강꽃>까지 읽으니 작가가 얼마나 자유자재로 작품 속 인물을 다양하게 설정하는지 탄복하게 되었다. 한지를 뜯어 인형을 만드는 일을 하는 여자. 그녀가 만들고 있는 인형은 단순히 장식품이 아니라 그 속에 이야기가 있고 그녀의 소망이 있고 상처가 있었다. 왼손에 달강꽃을 들려준다는, 인형 만들기의 마지막 단계를 남기고 이야기는 끝난다. 인형의 완성까지가 아니라 완성 이전 마지막 단계를 남기고 끝내는 것은 작가의 의도였을까? <아폴로를 씹었어>의 아폴로는 물론 우주선 아폴로가 아니라 나 어릴 적 구멍가게에서 팔던, 불량식품이라며 먹지 말라고 해서 쉽게 손이 안가던 추억의 주전부리 명칭이다. 글 쓰고 싶어하는 새터민 오희와 다른 새터민 사이의 갈등을 이렇게 의뭉스럽게 이야기 속에서 풀어내다니 작가가 다루지 못할 인물이란 없나보다 싶었다. <아빠는 시인이다>, 비교적 내용 예측 가능한 제목답게 장래 시인을 꿈꾸는 아들이 본 시인 아빠의 이야기이다. 요즘 같은 때 서사시를 주로 쓰는 아빠를 비록 삼류 시인이라고 단정할 수 밖에 없는 아들이지만, 그래서 시인이라는 자기의 꿈을 포기하는 대신 오히려 아빠를 위로하고 싶어하는, 자기의 꿈에 힘을 주고 싶어하는 따뜻한 아들이다.

 

작가는 열 편의 작품 속에서 다양한 인물 상을 그리고 있지만 그들이 딱히 우리 사회의 낮은 지대 인물을 대표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당신의 삶이고 나의 삶이기도 한, 겉으로 드러나는 직업이 무엇인가를 떠나서 우리가 과거에 걸어갔던 길일수도 있고 지금 걷는 길일수도 있는, 그런 인생들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니 일희일비 하지 말자고.

첫 소설집이라는데 이렇게 문장이 자연스럽고 원숙하고 넘침도 모자람도 없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오래 공들이고 가꾸어온 시간들이 작가에게 주는 보상일까. <아폴로를 씹었어>에서 화자가 새터민 오희에게 그러지 않던가. 쓸 사람은 누가 뭐래도 쓰고 만다고. 쓰지 않고는 못배기기 때문에 쓰는거라고.

 

근래 주로 번역된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말임에도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신경을 곤두세워 어색한 문장을 반복해서 읽어야했다면, 우리말로 우리말답게, 우리 정서에 맞게 잘 쓰여진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대단한 만족이었다. 저자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문장 여기 저기서 느껴지는 한국적인 정서, 민중의 삶, 우리 전통의 음과 양. 피부를 찌르고 지나가는 짧고 통렬한 재미가 아니라, 낮고 깊게, 서서히 퍼져나가는 재미. 오랜만에 한국 소설 읽는 재미를 만끽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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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22 09: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7-02-05 00:36   좋아요 0 | URL
아이쿠, 아닙니다. 그렇게 봐주시니 고맙습니다만 ^^
객관적으로 쓴다고 썼는데 모르겠네요. 저는 아주 재미있게 읽었답니다.

세실 2017-01-22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신의 삶이고, 나의 삶이기도 한.......우리 주변의 이야기일듯한.
벌써 읽으셨군요.
공들여 쓴 소설, 맛있게 익었죠. 참 멋진 팜므님^^

hnine 2017-01-22 19:33   좋아요 0 | URL
읽던 책이 있었는데 안그래도 진도가 안나가고 있던터라 결국 집어던지고 이 책 부터 읽었답니다. 가독성있더라고요. 다음 소설도 계속 내실게 틀림없다고, 저는 믿습니다!

2017-01-23 0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23 05:5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