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는 늙지 않는다
현기영 지음 / 다산책방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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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현기영이라는 이름은 낯설지 않다. <순이 삼촌>이란 소설이 제일 먼저 떠오르고 거의 동시에 그가 제주 출신의 소설가라는 것도 따라올 정도로 그에게 제주는 특별하다.

정작 내가 그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것은 그의 아내 양정자 시인때문이다. 중학교 영어 교사인 양정자의 시집을 나올때마다 한권 한권 다 사서 읽을 정도로 그녀의 시를 좋아하는데, 그녀는 자극적이고 도발적인 시를 쓰기 보다 자기가 가르치는 아이들, 가족 등, 시인이 옆에서 가장 많이 관찰할 수 있는 대상들, 하지만 누구의 눈에더 보일 것 같지는 않을 것들을 발견하여 시로 쓰고 있었다. 현기영이 그녀의 남편이라는 것을 안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이 책 <소설가는 늙지 않는다>에서도 저자는 본문에 아내 양정자의 시를 한편 인용하고 있는데 그 시인이 자기 아내라는 말은  밝히고 있지 않다. 그냥 일행 중 한 시인이라고 했을 뿐.

한 문장 건너마다 제주와 바다가 나오는가 싶을 정도로 지금까지 그의 칠십 오년 인생을 관통하고 있는 것이 제주와 바다가 아닌가 싶다. 이젠 비록 물리적으로는 떨어져 있지만 심리적으로는 그 끈이 조금도 느슨해진 것 같지 않게 마음 속에 항상 그 둘을 품고 사는 그가 무엇에 대해 얘기하든지 결국은 이 두가지와 연결되는 듯, 아니 스스로 연결시키는 듯.

 

첫 페이지, 첫 두 줄.

노년은 도둑처럼 슬그머니 갑자기 온다. 인생사를 통하여 노년처럼 뜻밖의 일은 없다. 아등바등 바삐 사느라고 늙는 줄 몰랐다.

누구에게나 오늘은 어제보다 하루 늙어있는 건 마찬가지인데 왜 특별한 연령층을 노인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혼자 쿨한척 했는데, 이 문장을 읽으면서 마음이 벌써 툭 내려앉는다.

화초 키우기를 좋아하시는 아버지 덕분에 집 안팎에 그렇게 꽃, 나무가 넘쳐남에도 한번도 관심을 갖고 본 적 없을 정도로 무심했던 나인데, 언제부터인가 시간 나면 안 가본 곳으로 멀리 떠나는 여행보다는 가까운 동네를 발로 흙을 밟으며, 이름은 잘 몰라도 풀과 꽃과 나무에 눈길을 주며, 그들의 변화에 혼자 감동받고 사진도 찍고, 누가 시키면 하지 않을 일을 즐기고 있는 나를 보고 아이가 그랬다. 이상하게 젊은 사람들 보다는 나이든 사람들이 식물을 좋아한다고. 그 말을 들을 땐 무심히 들었는데,

자연은 노년과 잘 어울린다. 조만간 돌아가야 할 곳이 거기이기 때문에 더욱 그럴 것이다. (14쪽)

아이의 말은 전혀 근거 없지 않았나보다.

 

저자가 중학생때 일. 별로 평판이 좋지 않은 동네 청년이, 아무리 그가 부리는 말(馬)이라지만 혹사시키고 심하게 대하는 장면을 친구들과 목격하고는 격분한 나머지 한밤중에 그 청년 집앞으로 가 친구들과 힘을 모아 그의 마차를 풀어 끌고 풀더미 속에 처박아 버려서 못된 동네 청년이 일을 할 수 없도록, 말이 일 안하고 쉴 수 있도록 해주었다는 일화를 보면 그가 정의감과 감성만 풍부한 것이 아니라 직접 실천에 옮기는 성격임을 눈치챌 수 있다.

고등학교 영어 교사로 재직을 한 경력이 있으나 문학의 사회적 의무를 중요시했던 그에게 쉽지 않은 날들이 있었을 것이다. 제주 4.3 사건과 관련있는 그의 첫소설집 <순이삼촌>이 제주 4.3 사건이후 30년후에 쓰여졌다고 한다. 그만큼 현기영에게 제주 4.3은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슬픔과 분노 자체, 자기라도 어떻게 세상에 드러내놓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절실함의 원천이었다.

 

칠십을 훌쩍 넘은 작가는 이제 돌아갈 곳을 생각한다. 그래서 또 수시로 제주를 찾고 바다를 찾는다. 풀위에서 여치가 죽어가는 모습도 그냥 예사로 보아넘기지 못한다.

드디어 여치가 개자리풀 위에서 옆으로, 가볍게, 기울어진다. 가는 다리들에 최후의 경련이 일어난다. 정적, 온 세계가 숨을 죽여 그 죽음을 지켜본다. 최후의 경련을 끝으로 여치는 깊은 적막 속으로 들어간다. 슬프지 않은 죽음, 완벽한 죽음이다. (242쪽)

이렇게 나이가 들어가면서 울분이 수그러들고,  돌아갈 곳을 생각하느라 한풀 꺾였다고 생각하면 오산. 오히려 연륜이 더해지며 생긴 삶에 대한 통찰, 문학에 대한 통찰은 더욱 번뜩이며 날카롭다.

승자 독식이야말로 한국 사회의 작동 원리인데, 그 이데올로기에 일상적으로 혹독하게 시달리는 우리는 예능 엔터테인먼트를 보거나 인터넷에 정신 팔린 채, 얼마 안 되는 여가 시간을 허비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이런 세상에서 작가는 독자를 설득하지 못한다. 문학이 읽히지 않는 것이다. SNS에 범람하는 언어의 홍수를 보면, 이제 남을 위한 말은 사라졌다는 것이 실감된다. 이성적 설득의 말 대신에 막무가내식 공격의 말이 중구난방으로 난무하고 있다. 모두들 남의 말에는 귀 닫고 자기 말만 한다. 저마다 지껄인다. (243쪽)

지금 문학이 서있는 자리를 이렇게 얘기하면서 오래된 것이 새로운 것이라고 말한다. 세계 보편성을 지향한다는 명분아래 미국식 사고방식, 향락적 상품소비문화를 쫓아가려 하지 말고, 오래된 우리의 것에서 뿌리를 찾고 그것을 새로이 하는것이 진정한 세계보편성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다.

엔터테인먼트가 최상의 가치가 되어버린 세상. 즐거운 것만 좋아하는 저능아처럼, 우리는 대책 없는 구경꾼이다. 우리가 구경하는 엔터테인먼트 속에 명령이 있고 명령자가 숨어 있음에도 우리는 그것을 모른다. (249쪽)

얼굴이 후끈거린다.

 

다소 힘이 들어갔던 목소리를 낮추어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 그는 말한다.

포기하는 대신 얻는 것은 자유이다. 그 자유가 내 몸과 정신을 정갈하고 투명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256쪽)

정갈하고 투명하게 매일 새로 태어나는 사람에게, 늙음이란 없다. 늙음의 정의마저 새로이 한다.

 

 

 

 

 

※ 애이불비 (哀而不悲)

슬프지만 비통하지 않은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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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a 2016-10-19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치 제가 읽은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글, 좋습니다.

hnine 2016-10-19 18:17   좋아요 0 | URL
우앙~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