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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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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숙의 신간 소식을 보자마자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구매를 해버렸다. 생각해보니 한국 소설을 실로 오랜만에 구입하여 읽어보는 것 같다. 오랜만에 나로 하여금 다시 한국 소설을 읽게 한 작가 강영숙. 이 소설은 나의 그런 기대에 부응했을까?

 

귀향: 歸鄕. 고향으로 돌아감. 여자는 태어나고 자란, 오랜 시간 자기와 함께한 고향에 별로 애착이 없다. 현재 그녀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단지 짧은 기간 사귀다 헤어진 남자, 그리고 그 상처일뿐. 그 상처는 결국 그녀의 발길을 별 애착 없는 고향으로 돌리게 하는데, 가는 길 만나는 다양한 인간형들은 그동안 그녀가 살아온 행로를 대변한다고 보면, 제목 귀향 역시 중의적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된다.

 

폴록: J는 환경운동단체의 인턴사원. K는 환경단체이사. J가 K를 인터뷰하러 간다. 인터뷰 도중 K가 느닷없이 언급하는 폴록의 그림. 그림처럼 이 글의 구성은 구심적이기 보다는 원심적이라는 느낌이다. 폴록의 그림을 인용한 것은 그럴 수 있다 쳐도, 작품의 주제와도 너무 연결이 안되는 제목 아닐까.

 

불치 不治: 이건 또 무슨 얘기란 말인가. 중심도 주제도 모르겠고 앞 뒤 내용의 연결도 잘 안된다. 담배피우는 간호사들 얘기가 이 단편에서 하는 역할은 무엇인가. 제목의 의미도 역시 모르겠고. 읽어나가는 내내 부스러기를 만지는 기분이다. 뭉쳐지지 않는 부스러기.

 

맹지: 눈먼 땅 盲地. 그저그런 목숨들이 발 붙이고 있는 땅의 계급은 맹지. 비싼 돈 주고 하이힐 사서 신고 다니는 땅은 다른가? 맹지에서 붕 떠 사는 듯한 특권층들이 사는 곳. 떠 있다 뿐이지 별볼 일 없는 목숨들이 딛고 사는 땅이나 다를 바 없는 맹지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이모가 먹다 남긴 마카롱 반 조각을 입에 넣었다. 마카롱은 끔찍하게 달았다. 이 맛이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맛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119)

 

해명: 바다 해 울 명. 뭔가 있을 것 같은 제목에 비해 다 읽고도 마음에 남겨지는 것이 없다. 중심 없이 주변 묘사만 어지러울 뿐. 제목마저 내용과 아무 연결이 안된다. 내가 무엇을 놓쳤는지. 사탕을 입에 넣자 갑자기 치통이 느껴져 주저 앉고마는 마지막 장면은, 감춰져 있던 통증을 우연한 단맛이 일깨워 몸 전체를 통째로 주저앉게 만든다는, 삶 전체를 마비시킨다는 상징으로 해석해보지만 이것 역시 나의 억지일지 모른다는 석연치 않음.

 

검은웅덩이: 검은웅덩이는 암울한 정체를, 건물의 벽은 제압, 제한을, 주인공 정연이 지하철에 갇히는 상황은 절실하고 급박한 주인공의 상황을 대변한다. 25년간 몸담은 직장 은퇴후의 삶이 제발 이 작품에서처럼 웅덩이 같이 고여있는 삶으로 이어지지 않기를. 고여있다는 것은 곧 죽음이 아닌가. 어쩌면 정연이 그토록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싶어 애쓰는 것은 그래서일 것.

 

가위와 풀: 정유미 실장이 팔걸이의자를 가져오는 순간, 나는 나무보트에 매달린 끈을 가위로 똑 끊었다. 스스로 끊는 것외에는 방법을 몰랐다. (199) 문장이 웬지 섬찟하다. 스스로 끊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오지 않는가. 제목 가위와 풀에서 풀은 제대로 등장하여 역할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생각. 아쉬운 점이기도 하다.

 

크훌: 크훌은 인간의 웃음소리, 아니 탄식의 소리. 작중화자가 말하는 대상 '당신'은 하느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신. 현실적인 내용 연결고리가 그나마 탄탄해서 가독성 있고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제목의 개성과 의미, 상징도 살아있다. 너무 다 가질려고 한 것 잘못했습니다 라고 주인공이 탄식하며 우는 장면이 기억에 한동안 남을 것 같다.

 

아무래도 아쉬워 책 뒤의 해설까지 읽어제낀다. 첫마디가 이렇다.

'강영숙은 큰 몸을 지닌 작가다. 그가 쓴 소설들은 단순히 등장인물 몇 사람의 기억이나 경험 혹은 단면에 머무르지 않고 이들이 거주하는 세계에 대한 상념을 한데 끌어들인다 (228)'

강영숙에 대한 해설의 이 말이 맞다면 이 소설집은 그녀의 이런 역량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평론가의 이 말을 아주 부정하고 싶지는 않은 걸 보면 아직 작가에 대한 내 기대는 살아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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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6-09-17 14: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직 접하지 않은 작가입니다. 단편은 호흡이 짧고, 머리를 써야 해서 쉽지 않네요.ㅎㅎ
비 오는 토요일, 편안한 연휴 보내시나요?

hnine 2016-09-17 15:44   좋아요 0 | URL
호흡이 짧고, 그래서 머리를 써야하고. 단편의 특징을 세실님께서 콕 집어 말씀해주셨네요. 그래서 코드가 잘 맞지 않거나, 아니면 집중해서 작품 속에 빠져 읽지 않으면 놓치고 마는 것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럴때의 허무감이란 ㅠㅠ
기대가 커서 실망도 어쩔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이 작가에 대한 애정은 아직 건재합니다.
여기도 비가 여름 장마때처럼 오네요~

수이 2016-09-17 16: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기대했던 만큼은 아니라서 좀 아쉬움을 많이 느꼈어요. 그래도 나인님 말씀처럼 실망한 그만큼 기대도 애정도 계속 갖고 가려구요. 강영숙의 다음 작품집.

hnine 2016-09-17 17:53   좋아요 0 | URL
제가 야나님 페이퍼 덕분에 이 책이 출간된걸 알게 되어 반가움의 댓글을 남겼었지요.
그래도 크훌이나 검은웅덩이 같은 글은 공감이 되었어요. 크훌은 단숨에 읽히기도 했고요. 작가와 독자의 적절한 거리 유지, 적절한 코드를 잡아가는 것도 쉽지 않은 것 같지요. 너무 멀어도 안되고 너무 가까와도 좀 그렇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