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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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서재에서 회자되던 소설 중 하나 스토너.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결국은 읽게 될 것 같은 느낌에 찜 해 놓고 기다리던 중 마침내 인연이 닿았다.

국내에 알려진 게 최근으로 알고 있는데 자그마치 1965년 작이란다. 번역되기 까지 이렇게 오래 걸렸나 싶어 알아보았더니 미국에서부터 사람들 주목을 받는데 오래 걸렸더라. 1994년 결국 작가 존 윌리엄스가 세상을 떠나고 그로부터도 10여년이 지난 2006, 뉴욕 리뷰 오브 북스 판으로 다시 한번 출간됨으로써 전기를 맞게 된 것. 그럼 2006년 다시 출간되게 된 데는 어떤 배경이 있었기에 더 오래 묻힐 수도 있었을 책의 운명이 바뀌게 된 것인지 궁금해진다.

스토너라는 인물은 분명히 허구의 인물이라고 작가가 밝혔다는 것은 그만큼 책 속의 인물이 마치 작가가 잘 알고 있는 인물이거나 나아가 본인의 얘기가 많이 들어있는 것 같다는 느낌일 준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책 속의 스토너는 작가인 존 윌리엄스보다 더 일찍인 1891년에 태어나 1956년에 세상을 떠났다고 나온다.

직업이 교수이든, 농부이든, 상인이든, 한 사람의 일생은 모두 같기도 하고 모두 다르기도 하다. 똑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지만 태어나고 늙고 죽는다는, 그 틀을 벗어나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 순서를 거꾸로 산다든지 하는 획기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으니까. 비슷한 일로 기뻐하고 비슷한 일로 슬퍼하고 노여워하니까.

스토너의 일생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 풍족하지 않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대학 교육을 받고 대학 교수까지 지내며 살다 갔으면 성공한 인생 아닌가 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반면, 자신의 목표나 꿈이 먼저,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노력의 순서가 아니라 늘 상황이 먼저 마련해놓거나 누구에겐가 제안을 받은 후 순종적으로, 그러나 충실하게 밟아가는 삶은 어딘지 전체적으로 볼 때 밋밋하고 평이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하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스토너의 성격을 알 수 있게 하는 문장을 30쪽에서 처음 만났다. 스토너가 대학생일때 슬론 교수와 주고받는 대화이다.

그럼 지금은 어떤 계획을 갖고 있나?”

스토너는 침묵했다. 이것은 그가 생각해본 적도 없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던 문제였다. 마침내 그가 약간 분개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모르겠습니다.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또 다음 대목, 부인인 이디스가 아버지 장례식을 위해 집을 떠나있는 동안 집에는 스토너와 딸 그레이스만 남아 있다.

처음 며칠 동안은 집이 텅 빈 것 같아서 묘하게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뜻밖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그 텅 빈 것 같은 느낌에 익숙해져서 점점 즐기기 시작했다. 일주일도 안 돼서 그는 자신이 몇 년 만에 최고로 행복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든 반드시 돌아오게 돼 있는 이디스를 생각할 때면, 이제 더 이상 자신에게 숨길 필요가 없는 조용한 후회가 느껴졌다 (156).

드디어 후회의 시작인가? 스토너답게 조용히.

이름처럼 돌 같고 바위 같기만 한 남편에게서 이디스가 만족을 느낄리가 없다. 안치던 피아노에 매달리는가 하면 연극 연습에 몰두하기도 하고, 사람들을 집에 초대해서 모임을 갖기도 하다가, 스토너에게 찾아온 학생들이 있는 서재에 자리잡고 앉아 자기 얘기들 떠들기도 한다. 그런 아내의 행동에 스토너의 반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디스의 심리를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알기 때문에 오히려 묵인한다.

그는 이디스의 새로운 행동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활동은 그에게 아주 조금 성가실 뿐이었고, 그녀가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조금 필사적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는 했다. 사실 그녀가 이렇게 새로운 삶의 방향을 찾게 된 책임은 그에게 있었다. 그녀가 그와 함께하는 결혼생활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게 해주지 못했으니까. 따라서 그녀가 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곳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아 그가 따라갈 수 없는 길을 가는 것은 옳은 일이었다 (167).

마지막 몇 페이지에 걸친, 죽어가는 스토너의 묘사는 너무 사실적이고 뛰어나서, 그동안 혹시 작가는 의도적이었으나 독자는 놓쳤을지 모르는 스토너라는 인물에 대한 것을 여기서 맘껏 느껴보시라 하는 피날레 같았다. 죽음의 피날레라니.

한 사람의 일생은 하나의 세계,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

이 책이 뒤늦게나마 사람들에게 사랑받은 이유는 주인공의 일생 하나만을 놓고 볼때는 굴곡도 있고 이야깃 거리도 되지만, 이 세상 살다가는 모든 인생들 중 하나라고 볼때는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의 확인, 그런 굴곡과 사연과 경험들을 우리 모두, 먼저 살다간 모두, 끌어안고 있다는 데서 오는 동질감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그의 일생이 특별히 더 쓸쓸할 것도 없다. 사람의 일생이 원래 쓸쓸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던 사람에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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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6-06-12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으셨군요. 저는 살까 말까 고민하다가 놓쳤습니다. 여러 리뷰를 읽는 걸로 대신했지요.

일생의 쓸쓸함... 저는 장례식장에 갔다오면 좀 마음이 가라앉더군요. 허망함 같은 게 느껴져요.


hnine 2016-06-13 06:29   좋아요 0 | URL
저도 그렇게 보관함에 담아놓고만 있었는데 우연찮게 인연이 닿았네요.
일생의 쓸쓸함. 전 이제 그냥 받아들여요. 전 그게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하더라고요. 이 책을 읽으니 얼마전에 읽은 아모스 오즈의 <나의 미카엘>도 생각이 나고, 프리츠 오르트만의 <곰스크로 가는 기차> 생각도 났답니다. 그러고보니 이 세 작품 속 인물의 직업이 모두 비슷하다는 공통점이 있네요.

몬스터 2016-06-13 0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반나절 꼬박 읽고 며칠 동안 마음이 쓸쓸했던 책이었습니다. 슬펐어요. 사람의 인생이 원래 쓸쓸하다는 말씀 ,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많은 것에 부정적인 반응을 먼저하는 사람이거든요. ( 으...싫은 제 모습입니다만 ㅎㅎ ) , 그래서 가끔 지나치게 밝은 사람들을 보면 , 어찌 저리 삶이 즐거울까 싶을 때가 종종 있어요. 가면을 쓰고 사는 건 아닐까 의심하는 (ㅎㅎㅎ )

나의 죽음은 나의 세계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지만 , 타인의 죽음은 내 삶에서 한 조각 떨어져 나가는 것 다름 아니니.. 한 사람의 인생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라는 말씀 , 맞는 말씀이세요.

아...이래도 저래도 주말이 끝나가는 건 싫습니다. ㅎㅎㅎ

hnine 2016-06-13 06:40   좋아요 0 | URL
몬스터님도 읽으셨군요. 쓸쓸하고 슬픈 느낌, 사실 저도 그랬어요. 다 읽은 후 이건 스토너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삶에 공통적인 본질이라고, 그러니 특별히 슬퍼하지 말자고, 슬픔을 잠재우기 위해 내린 일종의 처방전인 셈이지요. 저도 어두운 면을 먼저 보고 부정적인 생각과 반응을 먼저 하는 성격, 그걸 또 부정적으로 보았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제 성격을 부정적으로 보는 건 안하기로 해버렸어요.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성격에도 나름 강점이 있다는 걸 발견하기도 했고, 또 나를 내가 맘에 안들어 한다는 건 아무래도 너무한 것 같다는 자기 연민이 발동하기도 했고요.
주말 끝나가지만 다음 주말이 금방 또 돌아오니 우리 웃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