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빨간 열매를 주웠습니다 - 황경택의 자연관찰 드로잉
황경택 글.그림 / 가지출판사 / 201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오늘은 빨간 열매를 주웠습니다."

제목을 보니 <오늘> 이 아니라 <오늘은> 이라고 했다. 저자에게 이 일은 어쩌다 일어난 일이 아니라 자주 해오는 일상이라는 뜻이다.

 

 

 

 

 

 

 

 

 

그리기는 곧 관찰. 잘 그리려면, 아니 제대로 그리려면 우선 제대로 관찰을 해야한다. 글을 잘 쓰기 위해 필사를 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까?

 

이 책이 단순히 꽃과 잎, 열매, 씨앗 등을 잘 그려낸 그림책이 아니라 과학책이라고 부르고 싶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산딸나무 열매를 나도 본 적 있지만, 산딸나무 열매가 이렇게 생겼구나 하면서 클로즈업 하여 사진 찍는데 까지가 내가 한 전부. 그에 비해 저자의 관찰 정도를 보라. 5-7각형들의 조합이고 자세히 보면 6각형 조각이 제일 많다고까지 써있다.

저자의 호기심은 이렇게 산딸나무 열매의 외형을 관찰하고 그려놓은 것에 그치지 않는다.

 

 

산딸나무 열매를 까서 그 속의 씨앗을 꺼내어 관찰. 갯수를 세고 그림을 그리고 씨앗의 형태로 보아 씨앗이 여물어 가는 과정중 어느 단계쯤 있는지 추측도 해보았다.

식물학자 Linne의 노트도 그렇고 예전의 많은 과학자들의 노트가 이렇게 드로잉으로 꽉 차 있지 않던가.

 

이것은 호두나무의 열매와 씨앗.

우리가 먹는 호두는 열매가 아니라 씨앗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아래 그림 옆에 조그맣게 씨앗의 방향을 그려놓은 것을 보면서 웃음도 나오고 감탄도 했다. 누가 시켜서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저자는 그저 궁금했던 것이다.

 

예전에 미국에서 우리 나라 밤과 똑같이 생긴 열매가 떨어져있는 것을 보았다.

"밤이다!"

한국에서만 보던 밤을 발견하고 반가운 나머지 남편과 나는 이건 분명히 밤이라고 믿고 여기 사람들은 이거 어떻게 먹는지 모를거라며 주워다가 집에 와서 밤 삶듯이 보글보글 삶았다. 삶은 그 열매를 입에 넣자 마자 그 떫디 떫은 맛에 퇴퇴 다 뱉어버린 경험이 있다. 생긴건 밤이랑 똑같은 그 열매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칠엽수를 '말밤나무'라고도 부르는 이유가 이 열매에 있다.

말이 좋아한다고도 하며, 말의 건강이 좋지 않을 때 이 열매에 들어있는 타닌 성분이 치료제로 쓰인다고도 한다.

익으면 정말 밤처럼 탐스럽게 생겨서 사람들이 밤인 줄 알고 먹었다가 탈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284쪽)

 

이 책에 나온 설명이다. 칠엽수였나? 그때 그 열매가 말이다. 그림을 보니 정말 밤이랑 똑같이 생겼다.

 

저자가 자신의 인터넷 아이디로 쓸만큼 좋아하는 나무라는 개암나무. 개암이라는 단어를 어릴 때 동화책에서 처음 접했다고 하는데 나 역시 그래서 반가왔다. 깨무는 소리가 어찌나 큰지 도깨비까지 놀라서 도망을 갔다는 그 동화. 그 개암이 바로 저자가 알고 있는 '깨금나무' 열매라는 것을 서른 넘어서야 알고 충격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나중에 더 놀란 일은 이 개암나무 열매가 바로 향으로 유명한 헤이즐넛 커피의 그 '헤이즐넛'이라는 사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어느덧 명상에 잠기며 그 대상과 만나게 된다. 그러면 자연물들이 왜그런 형태를 갖게 되었는지 이해하게 되고, 몰랐던 사실도 알게 된다. 우리는 자연이다. 자연의 일부이다.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고, 주변의 자연을 그리면서 가까워지고 이해하게 된다면 그것만큼 좋은 그리기가 어디에 있겠는가?

지금 당장 밖으로 나가서 자연을 보고 그려라.

진정한 나 자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339쪽)

 

그의 노트들.

 

자연과찰 드로잉에 관한 몇가지 요령을 책 뒷부분에 부록처럼 실었다.

 

 

채색없이 입체감을 표현하기 위해선 명암을 넣는데, 그 명암 그리기에 대한 요령이다.

 

정물화는 그림자가 있어야 완성되기에 자연물을 그리면서 그림자를 그려넣는 것도 잊지 말라고 한다. 그림을 그린 후에는 꼭 메모를 하라는 당부도 덧붙였는데 그래야 비로소 관찰 그림이 되기 때문이다. 그가 이 책에서 보여주었듯이.

 

이 책에서 제일 핵심적인 구절로 다음을 꼽겠다. 평소 내 생각도 그러했기 때문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림은 곧 관찰이다.

눈으로만 보고는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사실들을 그림을 그리면서 낱낱이 알게 된다.

그림은 내 머리와 가슴을 통하지 않고는 단 한 점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298쪽)

 

처음엔 신기해서 책장이 막 넘어가다가 책 중간 쯤 이르러 비슷비슷한 열매, 씨앗 그림이 계속 되니까 자칫 지루해지려던 참이었다. 그러다 자세한 관찰의 수준에 감탄하기 시작하면서 다시 흥미가 붙어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에는 처음 보다 더 자연관찰과 드로잉에 관심 정도가 커져있었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매력적인 인간형에 끌리기보다 겉으로 평범해보이는 자연쪽으로 마음이 기울어가는 걸 느낀다.

그러니 이런 책들이 더욱 마음에 들어올 수 밖에.

 

 

* 315쪽 그림 설명중

"잘라보니 자방이 만들어져 있고 씨앗이 생기려고 한다"라는 문장

☞ (내 의견) 자방은 원래부터 식물의 생식기관으로 존재하고 있던 것이므로,

"자방이 만들어져있고" 라고 하기 보다는 "자방이 더욱 발달하여 두터워져있고" 라고 해야 정확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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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a 2015-11-01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로운 책이네요. 저도 요즘 식물 세밀화에 대한 책을 짬짬이 들여다보고 있어요. 그려보고는 싶은데 핑계가 앞서서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어요.

hnine 2015-11-01 19:29   좋아요 0 | URL
길 가다 떨어져있는 나뭇잎이라도 주워서 일단 집으로 들고 오래요. 책상 위에 놓고 그리라는군요.
봄 가을로 녹색연합에서 드로잉 수업을 하신다는데 기회가 되면 가봐도 좋을 것 같아요.

상미 2015-11-03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 책 흥미롭다~~

hnine 2015-11-03 12:27   좋아요 0 | URL
식물이나 드로잉에 평소에 관심이 있는 사람한테는 눈이 번쩍 뜨일 수도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