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일리치의 죽음 펭귄클래식 28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은정 옮김, 앤서니 브릭스 서문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네가 바라는게 뭐지? 대체 네가 바라는 게 뭐냐고?"

그가 반복해서 자신에게 물었다.

"바라는 것? 더 이상 고통을 겪지 않는 것 그리고 사는 것." 이라는 자신의 대답이 돌아왔다.

"사는 것이라고? 어떻게 사는 것을 말하는데?" 영혼의 목소리가 물었다.

"그래, 사는 것, 예전에 살던 것처럼 행복하고 기쁘게."

"예전에 어떻게 살았는데? 네가 행복하고 기쁘게 살았다고?" 목소리가 다시 물었다. 그는 행복했던 지난 삶에서 최고로 좋았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마음속에 그려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자신의 지난 삶에서 가장 좋았던 그 모든 순간들이 이제는 그 당시에 만족스럽게 여겼던 것과는 완전히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아주 어린 시절을 제외한 인생의 다른 모든 순간들이 그랬다. 그 시절, 어렸을 적에는 그것이 다시 돌아온다면 그것만 가지고도 살 수 있을 것 같은 정말로 행복한 무엇인가가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절 그 행복을 느꼈던 사람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혹시 내가 잘못 산 것은 아닐까?' 그는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을 하면서 살았을 뿐인데 어떻게 잘못 살 수가 있지?' (129-130쪽)

 

육체의 고통은 심해져가고 죽음이 점점 다가옴을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반 일리치가 영혼의 소리와 대화하는 부분이다.

톨스토이가 거의 60세가 되어 쓴 이 작품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제목에서와 같이 죽음을 전제로 하고 시작한다. 시작하는 첫 페이지에서부터 다음과 같은 기정 사실의 문장을 만나게 된다.

"여러분. 이반 일리치가 사망했다는군요."

그리고 끝날 때까지 특별히 다른 서사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읽는 내내 긴장을 늦추지 않게 된다. 그 어떤 인간에게도 죽음만큼 심각한 문제는 없기 때문이다.

남을 해친 일도 없고 그 당시 당연히 해야할 일들을 하면서 살았는데도 그 순간을 되돌이켜 생각할때 행복하지 않다면 그 삶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우리도 언젠가 죽음을 앞에 두고 이반 일리치와 비슷한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보게 될텐데, 그 장면은 바로 이 소설의 이 장면과 비슷하지 않겠는가? 순수하게 행복을 느끼는 순간은 아주 어린 시절, 특별히 내일을 계획하고 더 나은 무엇이 되기 위해 애쓰지 않을 때를 지나면 좀처럼 다시 맞기 힘드는 것인지. 설사 그 이후에 기쁘고 행복한 순간을 맞더라도 죽음 앞에선 그게 진정 행복한 순간, 되돌리고 싶은 순간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이 책에는 두편의 짧은 글이 더 실려있다. 공통점은 모두 "죽음"을 주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죽음>에서는 제목과 같이 두 사람의 죽음과 한 그루 나무의 죽음을 내용으로 한다. 죽음 하면 사람이나 동물의 죽음만 떠올리는 독자들이라면 다 읽고 제목이 왜 세죽음인지 놓칠 수도 있다. 또 한편의 짧은 글 <습격>은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처벌받지 않는 현장, 전쟁터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이다. 지금도 지구 어느 편에서는 계속되고 있는 전쟁. 실로 인류가 존재하는 한 전쟁은 계속되는가보다. 인류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

 

지난 연말 톨스토이의 <크로이체르 소나타>를 읽으면서, 함축된 묘사보다 설명적 문장들로 이루어져있는게 썩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문학으로서의 소설이 아니라 무슨 자기개발서 같은 느낌도 살짝 느껴질정도로 톨스토이는 그 주제를 혹시 독자가 놓칠까봐 마음이 놓이지 않았는지, 아니면 어떤 주제 전달이 그 작품을 쓰는 유일한 목적이라는 듯이 너무 드러내놓고 강조하는 것이 독자로서 썩 기분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자기개발서는 좀 심했고, 자기성찰서라고 바꿔부른다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 같다. 분명한 주제, 분명한 전달 방식. 이 작품에서도 여전하고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 아닌 것은 여전하다 할지라도 톨스토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단점을 넘어서고 남는 거장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그의 깊은 사유의 흔적이 구절 구절마다 느껴졌기 때문이다. 자기가 인생을 통해 경험하고 또 고뇌하고 풀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소모하며 느낀 것들을 남기기 위해서 그에게 작품속 서사는 그저 수단일 뿐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게 이제 톨스토이는 러시아의 유명한 작가, 그 이상의 의미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영화 <아마데우스>를 고등학교 3학년 말 겨울방학에 보고난 후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느낌을 한마디로 정리 못하고 있는데 아마 이 작품 <이반 일리치의 죽음>도 그렇게 되지 않을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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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5-01-24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은 소설인데,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 책을 꺼내 보았답니다.(그러니 책은 읽어서 뭐하나, 이러면서요.)
저는 <이문열 세계명작산책> 두 번째 권으로 읽었네요.

톨스토이는 소설가로선 그렇죠? 인생론을 쓰는 작가로 딱 알맞는 것 같단 생각이 들어요.
이반 일리치의 죽음, 님 덕분에 다시 펼쳐 봐야겠어요. ^^

hnine 2015-01-24 16:25   좋아요 0 | URL
pek님, 다시 읽어보시면 혹시 느낌이 다를지도 모르겠어요. 전 얼마전에 읽은 <크로이체르 소나타>는 별점을 세개로 끝냈는데 보시다시피 이 책은 다섯개를 주었어요. 작품 차이라기보다 이제 톨스토이에 대 조금 더 이해해가는 과정이고, 단점이 장점보다 더 먼저, 쉽게 눈에 들어왔기 때문일거예요.
톨스토이 자신이 무척 험난하고 굴곡 많은 인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인생론>도 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에게 있어 소설도 어쩌면 다른 형식의 인생론일지도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