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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천천히 태어난다 - 우리 시대 명장 11인의 뜨거운 인생
김서령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김서령. 저자 소개에는 칼럼니스트라고 나와 있는데 내가 인터뷰 작가로 알고 있는 몇 안되는 사람 중 한 사람이다. 최상의 텍스트는 '사람'이라는 그녀의 말은 당연하다. 그러지 않고서 인물 인터뷰 글을 그렇게 오래, 잘 쓰기란 불가능했을테니까.
이 책엔 열 한명의 인터뷰 글이 실려있는데 내가 알기로 벌써 이중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 소설가 최인호와 사진작가 최민식. 이 외에 소리꾼 장사익, 시골의사 박경철, 한국화가 박대성, 가나아트 회장 이호재, 목수 이정섭, 건축가 김석철, 광주요대표 조태권, 자곡가 강석희, 서예가 김양동 등이 인터뷰 대상이 된 사람들이다. 사진작가 최민식을 만나서 쓴 글은 그의 사진 만큼이나 가슴을 울렸다. 그가 대단한 독서가에 클래식 음악 전문가였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책과 음악. 모두 혼자서 즐기는 취미이다. 상당히 귀한 책들도 많이 가지고 있었다는데, 죽으면 모두 부산대에 기증할거라고 했다니까 지금쯤 모두 부산대 도서관에 자리를 옮겨 있을까.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그를 사진의 세계로 발 들여놓게 했다는 스타이건의 <인간 가족>, 어떤 책인지 궁금해진다. 1967년 영국의 대표전 사진 연감에 그의 사진이 실릴 정도가 되었지만 국내에서의 대접은 달라진 게 없었다는 것, 사진 찍을 자유는 있었지만 발표할 자유는 없었던 시절, 해외에서 상을 줘도 여권이 안 나와 참석할 수가 없었고, 서양 신부짐의 호의로 어렵게 출판된 사진집이 판매 금지로 묶여버렸다니, 부디 지금은 그 상황이 좀 달라져있기를 바랄 뿐이다. 계룡산 자락의 스승에게 주역을 배우러 찾아갔었다는 시골의사 박경철은 알면 알수록 예전에 알고 있던 것을 모두 깨는 것 같은 사람이다. '천재의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라는 인터뷰 제목의 '천재'라는 단어가 종이 위에서 도드라져 보였다. 건축가 김석철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불릴 정도의 인물인지 나는 그쪽 분야에 문외한이라 잘 모르겠지만 저자가 만난 그의 모습은 매우 당당하고 자신감있어보였다. 작곡가 강석희는 저자와 처음 만난 자리에서 음악보다는 그림과 시와 건축에 관한 얘기를 종횡무진 풀어냈다고 하는데 영향을 받은 책이라고 하는 것 중에 샤르뎅의 책이 있지 않은가. 내가 읽으면서 이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책은 처음이라며 어렵게 끝까지 읽은 책인 것을. 작곡은 보이지도 않고 의미도 없는 소리들을 모아 질서를 부여하고 형태를 만들어내는 작업이라니, 그가 그림과 건축에 몰두하는 것이 의외는 아니다. 작곡은 신비한 영역이 아니라 논리적이고 수학적이며 기계적이기까지 하다는 그의 말의 어렴풋하지만 이해할수 있을 것 같다. 작곡가로서의 그의 탁월한 능력이 제일이었겠지만 윤이상, 김수근 등, 이미 한 분야에서 거물급 인물들과의 인연도 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여기 실린 인물 중에서 소설가 최인호가 일찍부터 재능을 인정받아 문단에 데뷔했다는 점에서 나머지 사람들과, 그리고 책의 제목과 좀 맞지 않는 것 같은데 그를 제외하고 이 책에 실린 인물들의 공통점이라면 누가 뭐라하든 자기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다는 것. 누가 인정해주거나 말거나, 돈벌이가 안되어도 뜻을 굽히지 않고, 누가 인정해주지 않아도 포기하지 않고. 그게 꼭 인내심으로만 가능한 것일까? 물론 인내심도 중요하겠지만 나는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그만큼 그 일에 대한 애정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욕심과 거짓과 눈치의 겹을 벗겨 내야 보이는 그것, 자기가 사랑하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