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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인간.비 오는 날 외 ㅣ 한국 문학을 읽는다 4
손창섭 지음 / 푸른생각 / 2013년 4월
평점 :
품절
알량한 내 기억이지만 '손창섭'이라는 이름을 중고등학교, 대학 국어 교재에서도 들어본 것 같지 않다. 평양 출신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일본으로 귀화한것으로 잘못 알려져있었기 때문일까? 최근에 어쩌다 이 작가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전쟁을 겪고 난 인간과 잉여인간이 되어버린 젊은이들의 내면과 배후를 주로 그린, 우리나라 1950년대를 대표하는 신세대 작가'라는 작품소개글을 읽고 나니 그의 작품 어느 것이라도 한권 골라 읽어보고 싶어졌다. 2차대전 후 일본에서 전후 문학의 특징을 보이는 소설들이 한동안 쏟아져 나온 것 처럼 이 작가도 그런 분위기를 보여줄까 궁금하기도 했다.
이 책에는 모두 다섯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잉여인간>, <비 오는 날>, <생활적>, <미해결의 장>, <혈서>. 제목에서 부터 개인, 또는 사회의 불안, 우울, 상실이 느껴진다. 왜 아니겠는가. 평양에서 그가 태어난 해가 1922년. 만주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하여 다시 고향인 평양 부근에 와서 교사 생활을 하였고, 그러다가 1948년 당국의 조사에 위협을 느끼고 월남. 이때부터 소설 습작을 시작했다고 한다. 1949년에 첫작품을 발표하였고 이 책에 실린 다섯 작품은 모두 1950년대에 발표한 것들이다.
<잉여인간>
잉여인간. 남아도는 사람. 잉여인간이 범죄자도 아닌데 요즘도 유행어로 쓰일만큼 부정적이고 쓸모없는 인간의 모습을 의미하는 단어로 치우치는 이유를 모르겠다. 다른 사람의 눈엔 잉여로 보일지라도 잠시 지나가는 시기일 수도 있을텐데. 꼭 직업의 유무가 기준이 아닌 것이, 이 작품에 나오는 치과의사 서만기 조차 직업이 없는 다른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무기력해보이기때문이다. 잉여 인간은 사회적 산물인가. 작가가 주인공들을 통해 그리려는 것도 개인적인 차원에서보다 전쟁 후 의욕을 상실한 사회의 모습이었는지 모른다. 개인의 의지를 넘어서 어쩔 수 없게 만드는 사회적 차원의 눈에 안보이는 거대한 손을.
<비 오는 날>
비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린다. 피할 수단이 없으면 맞을 수 밖에 없다. 리어카 행상인 원구와 대학 영문과를 나왔으나 집에서 쫓겨날 처지가 되어서도 마땅한 직업이 없는 동욱, 한쪽 다리가 불구인 채 초상화 그려주는 일로 오빠까지 먹여 살리는 동욱의 여동생 동옥. 도움을 받고 싶은 사람이나 도움을 주고 싶은 사람이나, 마음만 그럴 뿐이지 방법은 없고 무기력만 더해간다. 비가 새어 물탕이 되어버린 방, 그마저 집주인에게 사기를 당하여 원구가 남매를 다시 찾아갔을때 그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생활적>
여기에도 행복한 사람은 단 한사람도 나오지 않는다. 반공포로 수용소에서 출소한 동주는 살아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함을 느끼는 젊은이. 남편을 여수반란사건때 잃은 일본여자 춘자와 함께 기거하며 그녀가 공장에서 벌어오는 수입에 의지하여 살지만, 결국 춘자도 옆방 사내 봉수와 손발이 맞아 새로운 장사를 시작한 후 또다시 버림받은 처지가 됨을 느낀다. 봉수의 의붓딸 순이가 봉수의 제대로된 돌봄을 받지 못하고 쓸쓸히 죽어간 것을 발견하고 이 시대에 확실한 미래란 결국 죽음뿐이라고 생각한다.
<미해결의 장>
해결이 아니라 미해결이다. 무의미. 무상. 미국 유학에서 장밋빛 미래를 찾으려고 하는 한 집안의 장남은 정작 미국 유학이 아닌 엉뚱한 문제에만 관심을 갖고 그런 장남은 온 가족의 비난을 받는다. 몸을 팔아 가족의 생계를 대는 여대생, 구제품 수선을 하여 미국 유학에 눈이 먼 가족들을 먹여 살리는 엄마, 재봉질을 하여 생계를 돕는 여동생. 특이하게 작가의 작품 속 여자들은 현실을 딛고 살아나가려 안간힘을 쓴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안간힘이든간에. 뒤의 작품 해설에도 나오지만 이상의 <날개>를 연상시킨다. 대신 날개의 주인공과 달리 손창섭 작품 속 주인공들은 공상과 비현실적이나마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주장'만 한다. 그래서 영원히 미해결이다.
<혈서>
1955년 현대문학 신인상 수상작이다. 작품 속에 실제로 '혈서'라는 제목의 시가 나온다. 국문과 대학생 규홍이 투고하려고 쓴 시인데, 한방에 기거하는 준석은 그런 규홍을 보고 여자나 쓰는 시 나부랭이나 쓴다며 규홍을 비난하며 논쟁을 벌이려고 한다. 결국 준석의 비난의 화살은 우유부단한 달수에게 꽂히게 되어 일을 저지르고 만다.
작가 자신이 어느 한 곳에 오래 정착을 못하고 여기 저기 옮겨 다니며 살았고, 아내의 수입에 의존하여 살기도 했으며 사람들을 기피하는 증상 등, 사회에 적응을 잘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말년엔 지병인 폐질환이 악화 되어 일본에서 생을 마쳤다.
병들고 우울한 사회는 이렇게 문학 작품 속에서 사진 보듯이 나타난다.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는 어떻게 그려지고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