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의 공동체 - 신형철 산문 2006~2009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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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때 일이다. 나와 같은 과 친구하나가 다른 학교 학생들과의 연합써클 첫 모임 (불교학생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에 다녀오더니 말했다.

"머리가 좋은 애들은 있지, 보통 사람들은 느낌에서 끝나는 것을 정확하게 말로 표현해낸단 말야."

난 이 책을 읽으며 왜 이십 오년 전, 친구의 그 말이 떠올랐을까.

감탄, 깨우침의 기쁨, 한숨, 공감하는 어떤 문장은 밑줄로도 성이 안차 통채 외워버리고 싶었다. 가령 이런 문장이 그랬다.

문학은 절망의 형식이다. 우리의 나약하고 어설픈 절망을 위해 문학은 있다. 그리고 희망은 그 한없는 절망의 끝에나 겨우 있을 것이다. (98쪽)

 

삶을 아는 사람은 희망 없이 삶을 사랑하는 사람뿐이다. (102쪽)

 

오십을 눈 앞에 두고 지금까지 살아오며 알게 된 것이란 고작 삶은 절망이고 허무하다는 사실이라는 것에 며칠 더 허무하고 절망스럽던 차에 읽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시인이 뮤즈에게 바치는 세금은 시간이라고 (25쪽) 그가 쓴 것 처럼 그의 이 대체불가능한 언어의 구사는 그냥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같은 세금을 바친다고 누구나 같은 혜택을 누린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에게는 우선 문학에 대한 어쩔 수 없는, 희망없이도, 쉽게 절망하지도 않은 사랑이 있었다. 자부도 체념도 없이, 읽고 쓰는 일은 내 삶의 거의 전부라고 하지 않는가.

제목을 '느낌의 공동체'라 붙였다. 어느 책에 따르면 인간의 세가지 권능은 사유, 의지, 느낌이다. (...) 어쩌면 사유와 의지는 느낌의 합리화이거나 체계화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 좋은 작품은 내게 와서 내가 결코 되찾을 수 없을 것을 앗아가거나 끝내 돌려줄 수 없을 것을 놓고 갔다. 그 희미한 사태를 문장으로 옮겨보려 했고 이를 독자들과 나누고자 했다.

느낌은 희미하지만 근본적인 것이고 근본적인 만큼 공유하기 어렵다. 잠을 자려고 하는 시인과 소설가들 앞에서 내가 춤을 추기도 했을 것이고, 내가 춤을 출 때 독자들이 잠을 자기도 했을 것이다. 때로 우리는 한 배를 타게 되지만 그 배가 하늘로 날아오를지 벼랑으로 떨어질지 대부분 알지 못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그런 줄을 알면서도 그 어떤 공동체를 향해 노를 젓는 일이다. (12쪽)

느낌과 정확한 문장 사이에 있는 것은 다름아닌 '사유'였다.

 

문학이 희망을 줄 수도 있을까. 문학은 절망적인 세계 앞에서 사력을 다해 절망할 수 있을 뿐이지 않은가. (97쪽)

허수경의 시에 대해 말한 부분이다. 사력을 다해 절망하는 것이, 어설픈 희망으로, 주입된 선입관을 바탕으로 모든 생각과 느낌의 결론을 지으려고 하는 것보다 낫다. 최소한 나는 나 자신의 생각에 충실했으므로.

비가 오고 있다

여보

움직이는 비애를 알고 있느냐 (김수영 <비>)

움직이는 비애라는 말을 이제 비가 올때마다 떠올릴 것이다.

 

저자가 인용한 다음 글은 "왜 시를 쓰냐"는 질문에 대한 김중식 시인의 답이하고 한다.

한때 내게 시는 '끝까지 가는 것'이었다 그것만 '진짜'였고 나머지는 다 '가짜'였다. 지금은 이렇게 말하겠다. 시는 적당적당(的當適當)히 가는 것이다. 끝까지 갔다가, 또는 끝까지 가려다 무서워서 되돌아 나오는 비겁의 자리가 시의 마음자리다. 시는 어쩔 줄 모르는 삶의 흔들리는 언어다. 시는 흔들리는 삶의 어쩔 줄 모르는 언어다. (167쪽)

'시'의 자리에 '인생'을 바꿔넣어보려다 멈칫했다. 과연, 나는 끝까지 가본 적이 있던가. 그러니까 이런 말은 끝까지 사력을 다해 가보려 한 자만 할 수 있는 말이겠구나 싶어서.

 

그가 소개한 쉼보르스카의 시 <사진첩>중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슬픔이 웃음이 되어 터져 나올때까지 하루하루 무심하게 세월은 흐르고,

그렇게 위안을 얻은 그들은 결국 감기에 걸려 죽었다.

'번역된 랭보의 시를 읽고 절망해서 외국 시와는 절교한 분들께 이 시집을 권한다(170쪽)'는 문장으로 쉼보르스카의 시를 소개하는 저자의 재치. 식상함이란 없다.

안현미 시인의 시를 소개하는 글의 제목으로 쓴 '감전의 능력'이라는 표현은 얼마나 정확하고 독특한가.

감정을 투정부리듯 늘어놓는 것이 시가 아닌 건 맞겠지만 그렇다고 시는 곧 체험이라고 단정해도 될까? 그러나 아니지, 중요한 건 체험의 부피가 아니라 전압이지, 무엇이건 더 강렬하게 체험할 수 있는 능력 즉 감전의 능력, 그래서 생겨나는 언어, 그 언어에 흐르는 전류, 이건 나이와 아무 상관없어. (206쪽)

 

소설을 쓰고 싶어하는 후배들에게 주제넘지만 충고할때 "설명하려 하지 말고 상황을 만들어라." 라는 말과 함께 덧붙인다고 한다. "카버를 읽어라." <대성당>을 쓴 레이먼드 카버를 말하는 것이다.

소설 읽는 일을 '고독과 소통하는 일'이라고 한 것은 정홍수의 문학 평론집 <소설의 고독>을 소개하는 글에서였다.

소설을 즐겨 읽는 나에게 가끔 소설을 읽지 말고 다른 책, 즉 지식에 보탬이 되는 책을 읽는 것이 낫지 않냐던 남편에게 나는 소설은 인생의 폭을 넓혀준다고 대꾸한게 다 였는데.

나희덕의 시는 내가 특별히 즐겨 읽는 시가 아니었음에도 392쪽에 인용된 <섶섬이 보이는 방>은 한번만 읽고 넘어가게 하지 않는다. 시 전문이 길어 여기에 옮겨놓기는 생략하겠지만.

제일 좋아하는 여행지는 그곳의 여관방이라는 저자. 여행하며 구경하는 것보다 방에 앉아 책을 읽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뜻이다. 어느분의 서재에서 이미 신형철 팬층이 형성되고 있다는 글을 본 적 있는데, 팬이라는 말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말대로 그의 책은 내게 와서 끝내 돌려줄 수 없는 것을 놓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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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4-03-24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읽고는 너무 좋아 <몰락의 에티카>까지 준비해놓고 있는데요, 두 권 다 읽어본 사람들이 <몰락의 에티카>가 더 좋다고들 하더라고요. 아니, 이것보다 더 좋은건 대체 어떤걸까 싶어 준비해둔지 오래인데 아직도 <몰락의 에티카>를 읽지 않고 있어요. 나인님도 이제 몰락의 에티카를 준비해두실 건가요?
:)

hnine 2014-03-24 14:03   좋아요 0 | URL
아, 다락방님. 솔직히 위에 쓴 것 보다 몇배 더 푸욱~ 빠졌어요. 제 딴에는 절제하며 쓴다고 쓴거랍니다 ^^ 리뷰 올리고 다른 분들 리뷰를 막 둘러보고 오는 참인데, 리뷰마저도 감동적인 것들이 많네요.
<몰락의 에티카> 지금 읽고 있는 중인데, 아직 100여 쪽 밖에 못 읽었지만 <느낌의 공동체>보다 좀 더 평론의 느낌이 나요. <느낌의 공동체>는 저자가 극구 '산문집'이라고 한 반면 <몰락의 에티카>는 책 표지에 당당히 신형철 평론집이라고 되어 있는 걸로 봐도요. 한 작가의 작품에 대해 좀 더 집요하게 파고 들어 마치 해부도를 그리듯이 써놓았어요.
'문학은 몰락 이후의 첫번째 표정이다'라는 문장은 '음악은 언어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되는 제2의 언어'라는 문장 다음으로 제 맘에 드는 문장이네요.
다락방님도 <몰락의 에티카> 읽으실거지요? 그쵸? ^^

다락방 2014-03-24 15:37   좋아요 0 | URL
물론이죠! 읽을겁니다. 시기가 언제이냐, 그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ㅎㅎ

2014-03-24 14: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24 15: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24 1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24 2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25 14: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26 05: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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