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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을 위한 우산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5
빌헬름 게나치노 지음, 박교진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평점 :
200쪽이 채 안되는 분량이지만 111쪽에서 다음 문장을 만나기 전까지 책장은 잘 넘어가지 않았다.
그 사람이 말도 안 되는 이런저런 요구를 할 것이라고 예감하면서도 그 사람을 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더이상 들지 않는다면, 그게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111쪽까지 읽어내려오도록 딱히 공감이 가는 대목이 없었다는 뜻이다.
연애에 대해 이상형으로 생각하는 상대나 시기 등을 묻는 질문은 그야말로 질문을 위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계획대로 만나지는게 아닐 뿐 아니라 계획대로 진행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결혼이라면 혹시 모른다. 이런 사람은 피하고 싶다는 생각도 하나마나.
바로 뒷 장에 이어서 나오는 문장은,
현재의 사랑을 통해 그 이전에 갖고 있던 사랑에 대한 견해가 모두 쓸모없는 것으로 느껴진다면, 그때 그 사람은 사랑을 하고 있는 겁니다. (112쪽)
그때까지 확실하게 파악이 되지 않던 소설 속 남자에 대해 겨우 실마리를 잡은 느낌이랄까.
이런 소설들이 있다. 사건 중심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닌 소설. 그래서 소설 속 인물에 공감하는 정도에 따라 누구에게는 좋았을 수 있지만 누구에게는 좋지 않았다고 여겨질 수 있는 그런 소설말이다.
중학교 겨울방학때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읽을 때의 느낌 비슷하기도 하고, 대학교 1학년 국어 교재속에서 읽은 이상의 '권태'의 느낌도 일었지만 같지는 않았다. 마흔 여섯살, 가족없이 혼자 사는 남자. 적극적이지도 않고 낙천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자기만의 세계를 사랑하는 것도 아닌, 이런 남자는 필히 가족과 함께 살 일이다. 젊었을 때 사귀었던 여자들을 떠올리고, 후회하고, 자책하고, 허무해하고, 모든 삶은 진부하다며 관목덤불에 비유했다가 자갈더미에 비유했다가, 자기는 미쳐가는 중이라고 여기게 되는 그런 날들. 제목에서처럼 비오는 날도 자기의 삶을 비유한 말 중의 하나이다.
이 관목덤불같고 자갈더미 같은 남자가 어느 날은 지나가는 젊은이들을 보며 생각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젊다는 사실을 다섯 가지 형태로 표현한다고 (참고로 이 소설이 출간된 것은 2001년). 첫째, 그들의 몸을 한시도 가만히 두지 못하고 흔들어대는 것, 둘째, 그들의 손에 들려있는 물건들 (콜라, 팝콘, 만화책, CD), 세째, 그들의 옷차림새를 통해서, 넷째, 그들의 귀에 꽂혀 있는 이상한 마개와 연결되어 목 주위로 늘어져 있는 줄을 통해 표현되는 그들의 음악을 통해서, 다섯째, 그들의 은어를 통해서. 그리고 바로 이어서 '하이퍼리얼리티'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건 무슨 뜻인지? 위에 말한 젊은이들에 대한 것과 무슨 관련성이 있는 말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삶에 대한 회의와 우울을 경쾌하게 그려낸다'는 평에 대해서는 '경쾌하게'라는 말에 동의를 못하겠고, '삶에 대한 깊은 이해가 녹아 있고 반어적이며 탁월한 언어의 기교를 보여준다'는 평에 대해서는 '언어의 기교'라는 점에 동의한다. 번역이라는 과정을 거쳐나왔음에도 드러나는 언어의 기교 -기교라는 말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는 보통 사람은 한줄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을 한장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읽는 내내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책이 끝나갈 무렵, 유명한 사진작가의 꿈을 안고 이리 저리 뛰던 옛날 동료 남자가 길에서 전단지를 돌리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 남자는 그의 실패한 삶에 눈물을 흘리다가 나중엔 자기 자신때문에 운다. 이 남자는 쉽게 이 책에 대한 감상을 정리하지 못하게 하는구나.
밑줄친 문장 중 이런 것도 있었다.
어쨌든 저는사람들이 아무 죄도 짓지 않고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사이 어느새 쌓여가는 그런 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113쪽)
내키지 않지만 일 때문에 가게 된 마을 축제 현장에서 현실인지 환상인지 모를 소년의 모습을 보면서 책은 끝이 나는데 그 소년은 남자가 모르는 소년일 수도 있고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축제가 끝나고 흔적만 남은 풍경은 그가 바라보는 그의 현재 삶의 모습일지도.
아무리 봐도 어디가 유머러스하다는 것인지 참. 내가 보기엔 우리나라 작가 이상의 '권태'. 독일판인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