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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야, 밖에도 좀 나가 놀고 그라지, 하루 종일 방에만 있나? 깝깝하지도 않나?”

할머니가 방문을 열어보셨을 때 나는 지난 어린이날 아버지께서 사주신 동화책을 읽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어른들은 왜 책을 읽고 있으면 갑갑할 거라고 생각 했는지.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마음껏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 들어 좋았다. 아니 나를 잊을 수 있어서 좋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행복한 사람의 이야기를 읽으면 나도 그 사람이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불행한 사람의 이야기를 읽으면 어린 마음에도 이렇게 불쌍한 사람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에는 행복한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갔던 것 같다.

실제로 지금 눈에 보이는 세상보다 책 속에서 내 맘대로 골라 만나는 세상들에서 더 행복을 느꼈던 나를 두고 집안 어른들은 나가 노는 것보다 책을 더 좋아하는 아이로 여기셨다. 아버지는 그것이 나름 기특했는지 내가 사달라고 하는 책들은 대부분 다 사주셨던 것 같다. 아버지가 나에게 뭔가 해주는 것을 확인해보고 싶을 땐,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 땐 책을 사달라고 하면 되었다.

책을 읽지 않을 때 하는 일은 그림을 그리는 일이었다. 종이와 연필만 보이면 나는 뭔가를 그리곤 했다. 앞에 보이는 물건을 따라 그리기도 하고, 동그라미와 네모를 이리 저리 비껴 낙서 같은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내 손이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느라 다른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어서 좋았다.

엄마가 안 계신 집. 경주에서 올라오신 외할머니와 이모들이 번갈아가며 나와 강진이를 비롯해 온갖 집안 뒤치다꺼리를 해주셨다. 엄마가 생각나 훌쩍거린 기억은 없다. 혹시 그런 모습을 보고 나를 가여워 할까봐 참았다. 나는 남들이 생각하는 겨우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딱 한번 울었던 기억이 있긴 하다.

그날 나는 할머니를 따라 시장엘 갔다 오는 길이었다. 할머니는 사야할 것을 잊어버리고 안산게 있다며 얼른 다녀올테니 나보고 그 자리에서 꼼짝 말고 있으라고 하셨다. 나는 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그 자리에서 그야말로 꼼짝도 안 하고 서서 할머니를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렸는데도 할머니는 오지 않았다.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흘끔흘끔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두리번거리며 할머니가 이제나 오실까 저제나 오실까 기다리면서도 나는 거기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날이 어둑해져갔다. 모르는 사람들은 계속 내 옆을 지나쳐 가고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나도 왜 눈물이 났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때 처음 ‘나는 혼자’라는 것을 느꼈던 것 같다. 눈물이 나기 시작하면서 고개가 점점 아래로 떨어졌고 눈물이 신발 등으로 뚝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있는데 누가 내 어깨를 툭 쳤다. 고개를 드니 뛰어 오셨는지 가쁜 숨을 쉬고 계신 할머니였다.

“아이고, 이누마. 여태 여기 이러고 서있었나. 고기 사고 그집 아지매랑 한참 수다떨다가 이자뿌꼬 그냥 집으로 갔다 아이가. 퍼뜩 생각나서 너 없어졌을깨미 을매나 맴 졸이며 담박질 해서 왔는지 모른데이. 아이쿠, 이눔 이거, 꼼짝 안코 여기서 기다렸구마. 어디 가서 앉아있기라도 하지 그랬나. 다리 안 아프나?”

할머니는 내가 눈물을 찔끔이고 있는 걸 보시고는 나를 끌어안고 토닥이셨다.

“이눔 이거 우야노. 사내 자슥이 이리 여릿해서 우야노.”

그땐 시장 바닥이었으니까, 나를 알아보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눈물이 나왔을 것이다. 아는 사람이 옆에 있었다면 나는 울지 않았을 것이다.

다음 해, 나는 5학년이 되었고 집을 떠났다. 아버지의 결정에 따라 강진이와 함께 서울의 좋은 학군 초등학교로 전학을 했기 때문이다. 그해 가을 아버지는 이웃 아는 분의 소개로 재혼을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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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3-08-26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이야기는 사람들한테 아름다움을 베풀어요.
할머니하고 아이 사이에 아름다운 끈이 이어졌겠지요.

hnine 2013-08-26 14:13   좋아요 0 | URL
연작이어요. 조금씩 써놓았던 이야기인데 여기에 풀어놓고 이제 잊어버리려고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순오기 2013-08-28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저 덩달아 '싸아~' 합니다~~~~~~
글쓰기를 즐기는 님의 모습에도 입꼬리가 올라갑니다~ ^^
좋은 책 추천 고맙습니다!!

hnine 2013-08-28 09:06   좋아요 0 | URL
어려운 책 보다는 이해가 쉬운 책 위주로 고르려고 했는데 도움이 되신다면 제가 영광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