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 <이미 뜨거운 것들>

 

다른 책은 한번 다 읽고 또 읽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시집은 그렇지 않다. 한번 쭉 읽어보는 것은 맛보기일뿐, 멀리 두지 않고 생각날때마다, 손이 갈때마다 펴서 읽고 또 읽는다.

 

지금까지 최영미의 책은 에세이든 시집이든 다 구입하여 읽어오고 있는지라 이 시집도 나온 것을 알자 바로 구입부터 했다.

 

 그녀때문에 알게 된 화가 Rothko. 이 시집의 표지를 보니 그 화가의 작품 '검정 위의 빨강' 혹은 '빨강 위의 검정'이 떠오른다. 그녀의 첫 시집 제목이 아직까지 표지에 저렇게 따라다니는구나. 그게 벌써 몇년 전인데.

 

새삼 그녀의 시들이 설명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 자체가 긴 편이 아니고 연과 줄도 짧지만 읽을 때의 느낌이 산문 같기 때문인가보다.

 

이전 시집의 제목이 <돼지에게>인데, 여기엔  <돼지의 죽음>이라는 제목의 시가 실려있다. 읽어보니 전작에 이어지는 것으로 생각된다. '돼지'가 누구를 의미하냐고 한참 말들이 많았었지.

 

 

 

 

 

 

추상 (秋想)

 

 

 

 

나쁜 자식,

위선자,

벗겨도 살점 하나 묻어나지 않을 껍데기들.

 

 

그들을 싸잡아 욕한 뒤에

단풍을 보았다

 

 

울긋불긋 물든

그들은 하나의 색이

아니었다.

한꺼번에 물들지도 않았다

 

 

진실은 순색(純色)이 아니다

 

 

 

그럴까? 진실은 순색이 아닐까?

 

 

그녀 시에 대해 말할때 사회에 대한 풍자와 비판을 많이 언급하지만 내 생각에는 그보다는 인간에 대한 기대, 위선에 대한 실망, 고립과 고독, 지난 날 열정에 대한 회상, 아쉬움 등도 그 못지 않게 진하게 느껴진다고 말하고 싶다. 읽는 사람 마음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오해

 

 

 

 

술보다 술 마시는 분위기를 좋아했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내 시가 쉽다고

 

 

 

노란 시월이 밀려온다고, 빗대어 쓰면

몰라도 뜻을 묻지 않고

 

 

 

출퇴근하는 지하철을

밥벌레들이 기어들어가는 순대에 비유하면

직장인들을 모욕했다며 분개하고

 

 

 

나도 모르는 말들을 주절주절 갖다 붙이면

그들은 내 시가 심오하다고......

 

 

 

이전의 시집을 읽을 때와 같은 깊이로 마음 속에 담박에 박히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이 시집을 아직 다 읽지 않았다. 첫 페이지지부터 마지막 페이지, 해설까지 다 읽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아직 다 읽은 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송찬호 <저녁별>

 

 동시집 출간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근래 문학동네에서도 동시집 시리즈를 출간하고 있으며 이 책도 그중 하나이다.

시로 등단한 송찬호 시인의 첫 동시집인데, 첫 동시집이라지만 마치 동시를 오래 써온 것 같은 시들이 아주 알차게 담겨있다. 동화를 쓰는 동안엔 동화의 세계에 흠뻑 빠지기 위해 일부러 소설도 읽지 않는다는 어떤 동화작가의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렇게 어른과 아이 마음을 넘나들며 잘 쓸 수 있는 사람도 있나보다. 좋겠다.

 

 

 

 

 

 

 

저녁별

 

 

 

서쪽 하늘에

저녁 일찍

별 하나 떴다

 

 

 

깜깜한 저녁이

어떻게 오나 보려고

집집마다 불이

어떻게 켜지나 보려고

 

 

 

자기가 저녁별인지도 모르고

저녁이 어떻게 오려나 보려고

 

 

동시라면 그저 쉬운 소재, 쉬운 말로 쓴, 단순한 시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렇지 않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노래하는 것만으로 시가 되지 않는다. 시인의 새로운 '발견'에서 비롯되어야, 상투적이지 않은, 시다운 시가 탄생하는 것이다. 이 시집 뒤에 해설을 쓴 이 안 시인은 이것을 이 시집에서 가장 빼어난 시로 뽑았다. (참고로, 이 안 시인의 해설도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해설도 동시처럼 아기자기, 재미나게 썼다. 특히 시 <호박벌>에 대한 해석은 슬쯕 송찬호 시인에 대한 관심을 이 안 시인으로 돌리게까지 만든다.)

 

 

제비꽃

 

 

 

 

 

 

보랏빛 제비꽃한테 놀러 갔다

꽃이 나비보다도 작아

쪼그리고 앉아 바라만 보았다

 

 

 

한참 바라보고 있으니까

제비꽃이 하품을 해서

심심해진 나도 그냥 집에 돌아왔다

 

 

연꽃

 

 

 

 

우리 동네 연못

활짝 핀 연쫓 아래

둥근 연잎에

개구리가

앉아 있다

 

 

 

개구리가

연꽃을

들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시는 시인의 상상만으로 지어낼 수 있는 시가 아니다. 시인은 아마 이런 광경을 한참 들여다 보았으리라. 그리고 개구리가 연꽃을 들고 있는 것 처럼 보이는 순간이 왔을 것이다. 시인의 발견이다.

책머리에서 그는 전부터 동시를 쓰고 싶었지만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가 그즈음 나온 어떤 좋은 동시집을 보고 자극을 받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를 움직이게 한 그 동시집은 무엇일까? 그것도 궁금해진다.

 

김미희 <외계인에게 로션을 발라주다>

 

'청소년시집'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책이다. 과연 청소년, 그리고 부모가 읽어서 공감할 내용들이 많다. 빗댐과 사회 풍자가 보인다.

 

 

 

 

 

 

 

 

 

 

 

 

신기술

 

 

 

 

새로 지어진 학교 건물

창문을 닫자

어찌나 방음이 잘되는지

새들

노랫소리를 멈췄다

푸르른 날갯짓도 멈췄다

 

 

 

우리 인간들은 이렇게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소외시키고 있는 중이다.

 

 

쉬는 시간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동윤이는 알까기

유리는 엎드려 자기

강우는공책 가득 그림 그리기

지수는 음악 들으며 몸 흔들기

모두 모두 즐겁다

자기주도학습이 시작된다

창의력이 맘껏 발휘되는 시간이다

 

 

수업시간이 아니라 쉬는 시간에 비로소 학습이 시작된다니, 누구를 위한 수업이란 말이냐고 한숨이라도 쉬어야 할까. 획일화되고 개인이 꿈이 반영되지 않은 교육 현실에 대한 빗댐이다.

 

 

다 다른 색깔의 시. 세상을 보는 다양한 눈.

 

오늘 아침엔 예전에 읽었던 유영금의 <봄날 불지르다>라는 시집을 다시 읽었다.

그건 또 다른 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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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3-05-10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소엔 시집은 거의 읽지 않는 편인데요, 이 페이퍼에 몇 편 함께 올려주셔서 잘 읽었습니다. 이전엔 처음 보는 책, 처음 듣는 이름이었겠지만, 다음엔 어디서 한 번쯤 들어본 것처럼 기억나면 좋겠네요.(그렇더라도 겨우 이름 정도일테죠.^^)

좋은 하루 되세요.

hnine 2013-05-10 19:38   좋아요 0 | URL
서니데이님도 시와 친해질 기회가 앞으로 올지도 몰라요. 일부러 시집을 사서 읽지 않아도 어느 순간 어디에선가 마음에 콕 박히는 시를 딱 마주치게 되는거지요. 사랑에 빠질 때 처럼요 ^^

박세웅 2013-06-12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밥벌레들이 기어들어가는 순대... 최영미 시인의 시였군요^^

hnine 2013-06-12 18:08   좋아요 0 | URL
세웅님, 최영미 시인의 시 좋아하시는군요. 저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