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 안도현의 시작법詩作法
안도현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시'의 매력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유려한 말솜씨로 듣는 사람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재미있게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이 있는 반면, 평소에 말이 없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길지도 않은 한마디를 탁 던지는데 그것이 오랫 동안 잊혀질 것 같지 않은, 마음을 울리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시란 그런 것 아닐까?

내가 최초로 외우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자신있게 외우고 있는 시는 김소월의 진달래꽃이다. 중학교1학년 국어 시간. 중학생이라는 것이 아직 익숙하지도 않은 새학년 봄, 국어 선생님은 우리 반 아이들 중에 어떻게 이 유명한 시를 알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냐며 흥분하시고 다음 시간까지 조사해서 다 외워오라고 하셨다. 그러시며 잠깐 읊어주신 그 시의 몇 구절이 그때 마음에 콕 들어온 것이다. 이후로 지금까지 좋은 시 찾아 읽고 노트에 베껴 놓고 또 누군가에게 적어보내기도 하고, 기쁠 때보다는 슬플 때 많은 위로와 격려를 받으며 시를 내 친구 삼고 있다.

언젠가 저자가 학생들을 대상으로 시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TV에서 잠깐 본 적이 있는데, '귀뚜라미'하면 바로 귀뚤귀뚤, '바람'하면 바로 '살랑살랑'을 떠올려서는 시를 쓸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의 생각과 경험, 성찰, 나만이 볼 수 있는 방식, 이런게 들어가지 않으면 시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보통 '싯구', '시어'라고 하는, 평소에 잘 안쓰더라도 멋이 풍겨나는 말들, 그리고 리듬, 운율이 갖춰지면 시가 되는 줄 알고 있던 나는 그날 또 모르던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말한다. 사랑에 대해서 쓰려면 '사랑'이라는 말을 시에다 쓰지 말아야 하고, 제목으로도 쓰지 말아야 한다고, 사랑이라는 말을 아예 잊어버려야 한다고. (81쪽)  다른 사람이 규정지어 놓은 범위에서 벗어나 내가 새로 한 세상을 구축해나가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시란 '자유 세계'의 산물이구나.

감정을 쏟아붓지 말고 감정을 묘사하라는 제목의 글에서 저자는 감정을 묘사하는데 저지르기 쉬운 게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첫째는 과장이다. 혼자 외로운 척, 나만 아름다운 것을 다 본 척하지 말고, 모든 것을 낭만으로 색칠하지 말라는 것이다. 둘째는 감상(感傷)이다. 이 세상 모든 슬픔을 혼자 짊어진 척하지 말고 눈물 흘릴 일 하나 없는데 질질 짜지 말라고. 세째는 현학이다. 무엇이든 다 아는 척, 유식한 척 하니 말고 기이한 시어를 주워와 자랑하지 말라고 한다. 느끼하다고. (43쪽)

한줄을 쓰기 전에 백줄을 읽어라, 재능을 믿지 말고 자신의 열정을 믿어라, 익숙하고 편한 것들과는 결별하라, 부처와 예수와 부모와 아내를 죽여라 (선입견과 편견에서 벗어나라는 말), 묘사는 관찰로부터, 체험을 재구성하라 (체험을 그대로 옮겨놓는게 아니라), 관념적인 한자어를 척결하라, 형용사를 멀리하고 동사를 가까이 하라, 제목은 시쓰기의 처음이자 마지막, 없는 것을 발명하지 말고 있는 것을 발견하라, 퇴고를 끊임없이 즐겨라, 개념적인 언어를 해체하라 등, 이 책 속의 소제목들이 곧 이 책의 요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는 또하나의 즐거움은 인용된 시에서 온다.

물 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김종삼 시인의 <묵화(墨畵> 라는 시 전문이다. 여섯 줄 짧은 시, 그리고 쉼표로 맺고 있지만 더 길지 않아도 충분하지 않은가? 저자의 설명에 의하면 쉼표로 맺음으로써 할머니와 소의 상처와 그 둘 사이의 적막이 오래 지속되리라는 것을 암시한다고 한다. (89쪽) 저 제목은 또 얼마나 은근히 시의 느낌을 더해주는지.

시인은 어떻게 시를 쓰게 되었고 시인이 되었을까. 다음은 이 책에 인용된 이덕무 시인의 시집 서문이다.

스무 살 가을밤이었다. 어느 낯선 간이역 대합실에서 깜박 잠이 들었는데 새벽녘, 어떤 서늘한 손 하나가 내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왔다. 순간 섬뜩했으나,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때 내가 가진 거라곤 날선 칼 한 자루와 맑은 눈물과 제목 없는 책 따위의 무량한 허기뿐이었으므로.

그리고, 이른 아침 호주머니 속에선 뜻밖에 오천 원권 지폐 한 장이 나왔는데, 그게 여비가 되어 그만 놓칠 뻔 한 청춘의 막차표를 끊었고, 그게 밑천이 되어 지금껏 잘 먹고 잘 산다.

그때 다녀가셨던 그 어른의 주소를 알 길이 없어......, 그간의 행적을 묶어 소지하듯 태워 올린다. (74쪽)

 

시 역시 일단 쓰기 시작하면 그 쓰는 과정은 자기의 감각과 사유가 자유로이 이루어지기까지 한바탕 격투를 치루는 것이라면서, 이 싸움의 과정은 몰입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했다. 역시 몰입은 글쓰기에서도 중요한 바탕이면서 기술이기 때문에 시는 온전하게 몰입할 때 온다고 (27쪽).

 

시를 좋아하고 많이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가끔 끄적거려보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많이 공감할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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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3-05-09 0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가 말하는 내용처럼 글을 쓰면 시가 아니라 다른 글이라도 좋을 것같습니다. 쉽지 않아서 문제겠죠. 그렇지만 앞으로는 그렇게 쓰고 싶어요.
아침이라 간단히 쓸게요. 잘 읽고 갑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hnine 2013-05-09 17:48   좋아요 0 | URL
보통 시인은 타고난다는 말들을 하는데 그만큼 감성이 뛰어나고 예리한 통찰력을 가졌기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이 책에서 저자는 '타고난 시인이란 없다, 끊임없이 노력할 뿐이다' 라고 했더군요. 그런데 타고나는게 아주 없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타고난 것만 가지고는 안되고 그 위에 더 노력을 해야하는 것이겠지요.
이 책에 인용된 시들도 참 좋더군요.
여긴 지금 비가 부슬부슬 옵니다. 가방이 무거워 우산을 안가지고 나갔다가 비를 좀 맞고 들어왔답니다 ^^

Jeanne_Hebuterne 2013-05-10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점점 더 페이퍼나 리뷰를 쓰기가 어려워지고 있어요. 욕심이 많아지고 의욕이 앞서곤 해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꼭 급체한 것 마냥 균형을 맞추기가 어려웠는데, hinine님의 이 글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갑니다. 다음에 페이퍼나 리뷰, 또는 모든 글을 쓸 때 이 글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고마워요. 이런 좋은 글을 써주셔서.

hnine 2013-05-10 19:47   좋아요 0 | URL
무슨 일을 할 때 욕심과 의욕이 안 생겨도 문제이지만, 너무 앞서가지 않게 하는 것도 필요할 것 같아요. 그건 더 고도의 테크닉이 필요한 단계인 것 같고요.
책이든, 옷이든, 화장품이든, 저는 공간을 차지하는 뭔가 자꾸 쌓여가는 것이 싫어서 읽고 난 책도 바로 중고책으로 처리해버리는게 다반사인데, 이 책은 당분간 좀 가지고 있으려고요.
횡설수설 글을 읽어주셨으니 제가 고맙지요.

2013-05-17 0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17 1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