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 구독하고 있는 어린이 문학 잡지가 있는데 구석구석 다 읽지는 않는다. 그때 그때 눈에 들어오는 부분만 골라 읽는 편인데 우연히 '김종렬'이라는 작가의 동화를 읽게 되었다. <언젠가 일어날지도 모르는>이라는 제목의 글이었는데 눈이 번쩍 뜨였다. 다른 건 둘째 치고 일단 어디서 읽어본 듯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에서였다. '죽은 다음의 세계' 라는, 동화의 소재로 선뜻 건드리기 쉽지 않은 이야기를 마무리까지 깔끔하게, 독자의 호기심을 놓치지 않고 갔다.

1997년 '문학동네 겨울호'에 단편 소설 <지뢰 찾기 콤플렉스>가 당선되어 작가의 길로 들어섰으며, 2002년 <날아라, 비둘기>로 황금도깨비상을 받았다. 지은 책으로는 <길모퉁이 행운돼지>, <내 동생은 못 말려>, <강아지 나폴레옹>, <노란 두더지>, <아홉 개의 바둑돌>, <해바라기 마을의 거대바위>, <연두와 푸른 결계> 등이 있다.

함께 실린 작가소개글이다. 작가에 작품을 더 읽어보고 싶어 바로 세권의 책을 한꺼번에 구입했다. 그리고 단숨에 읽었다.

 

<노란 두더지>

★★★★☆

요즘은 좀 뜸한 것 같은데 한동안 두더지 잡는 게임이 유행했었다. 스트레스 해소용임을 쉽게 알 수 있는 그 기기 앞에서 아이나 어른이나 힘껏 망치를 두드려대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요즘 아이와 부모가 대립적인 입장을 보이는 가장 큰 항목 중의 하나일 '컴퓨터 게임'. 엄마는 게임 중독이라고 아이에게 경고 주기를 멈추지 않고, 친구보다 더 높은 점수를 얻고 싶은 것 뿐인데 자기가 진짜 게임 중독인지 아이는 알 수가 없다. 그러다가 자기도 모르게 컴퓨터에서 알게 된 이상한 게임. 바로 자기가 노란 두더지가 되어 싫어하는 사람들을 초록 두더지, 분홍 두더지 등으로 설정하여 그들에게 보복하는 게임이다. 그런데 그게 과연 컴퓨터 상에서의 게임이었을까?

아이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소재와 주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중독'이라는 것에 대해 아이들로 하여금 생각해보게 하는 기회를 줄 것 같다. 게임을 통해 아이가 평소 자기도 모르게 마음 속에 가지고 있던 미움의 감정과 스트레스를 확인하는데 그 대상에 엄마도 들어간다는 설정이 재미 요소이고, 게임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과정이 잘 나타나 있다. 작가는 아마도 게임에 대해 일가견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길모퉁이 행운돼지>

★★★★★

이 책까지 읽고 나니까 이 작가의 경향이 조금 파악이 된다. 주로 무엇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말하고 싶어하는지를. 많은 동화들이 그러하듯이 이 작품 역시 굳이 어린이만을 대상으로 한다기보다 어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작품이기도 하다. 물질적으로 좀 더 많이 가진 것이 좀 더 행복을 보장하는 양 착각하고 사는 시대, 그래서 한번 사는 인생의 많은 시간을 그 물질 주의에 노예가 되어, 자기가 그렇게 살고 있는지 조차 모르고 사는 우리들 앞에 나타난 '행운 돼지'는 과연 '행운'을 가져다주는 돼지였을까? 이런 의심을 어른들은 아무도 하지 않는다. 이 책의 주인공인 아이만이 이상하게 생각할 뿐이다. 우리어른들이 아이라고 무시할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이다. 상징과 의미가 뛰어난 작품이다.

 

<해바라기 마을의 거대바위>

★★★★★

이 책은 일곱 편의 단편 모음으로 이루어져있다.  일곱 편 모두 시대에 뒤쳐지지 않는, '현장성'이 아주 잘 드러나는 소재라고 할 수 있다.

<엄마 몰래 탈출하기>에서는 학원가라, 공부하라는 엄마의 잔소리로부터 아이가 탈출하는 곳은 어디였을까 하는 이야기이다. 엄마의 잔소리 중 한 꼭지인 컴퓨터 게임 속이었는데 컴퓨터 게임 좀 그만하라는 엄마의 잔소리가 다름 아닌 그 컴퓨터 속으로 아이를 더 몰아간다는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독서 은행> 이 작품 역시 재미가 아닌 논술 시험 때문에 체크 리스트 보며 읽어야 하는 요즘 아이들의 세태를 꼬집은 이야기이다.

<그 도시의 밖> 어른들도 그렇지만 아이들 역시 하고 싶은 것 보다 해야하는, 주어진 일이 더 많은 일상을 살아가다 보면 현실에서 뛰쳐나가고 싶어한다. 아직 구체적인 방법을 모르고 힘이 없을 뿐. 그래서 더 간절할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에서 그런 간절함은 도시 밖으로 향하는 버스의 등장으로 나타난다.

<해바라기 마을의 거대 바위>은 자연의 훼손, 인간 위주의 인공물의 범람, 무절제한 개발에 대한 경고성을 띈 이야기이다. 어느 날 한 초등학교 운동장에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바위. 이 바위들은 저절로 움직여 갈 뿐 아니라 바윗돌을 멈추려고 앞을 가로막을 때마다 점점 더 켜져간다. 이 거대바위의 정체는 무엇일까.

<아빠가 가져온 나무상자>는 아이들에게는 좀 이해가 어렵지 않을까 싶은 작품이다. 꿈이 이루어지려면 우선 꿈이 있어야 한다. 순수한 마음을 잃어가고 대신 그 자리에 불안과 의심이 자리잡고 있는 어른들중에 아직 '꿈'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우연히 길에 떨어진 개암나무 열매를 주움으로써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손에 넣게 된 아빠. 하지만 아빠가 꿈을 이루기 전에 아빠는 이루고 싶은 꿈이 있었을까? 우리도 혹시 살면서 이렇게 우리 앞에 주어진 기회를 그냥 헛되이 보내고 있지는 않은지. 음, 역시 아이들에게는 좀 어려울 것 같은 이야기이다.

<모두 다, 웃는 가면> 자기의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기 보다는 포장시켜 말하고 포장시켜 몸짓 해야하는, '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가 중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아예 모두 다 웃는 가면을 쓰고 살아갈 것을 공공연하게 강요받는 시대에 대한 이야기이다. 짧은 이야기 속에서도 마지막의 반전이 뛰어난 작품이다.

앞에 읽은 책 <길모퉁이 행운돼지>가 인간의 욕심과 물질 주의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이 작품 <모래 계단>은 환경과 오염 문제, 무절제에 대한 이야기이다. 황사 끝에 여기 저기 생겨난 거대한 모래 계단은 어디로 이어지는 것이고 모래 계단이 허물어진 후 그 결과는 어떻게 인간에게 다시 돌아오는지. 이 이야기 역시 인간의 재앙은 자업자득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작가는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를 억지로 지어낸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 이야기를 만들어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근래 읽은 어린이책 중에 제일 높이 평가하고 싶은 작품이고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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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3-02-03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길모퉁이 행운돼지, 오래 전 읽었어요.
섬뜩한 경고였지요.
이게 김종렬이라는 분이 썼군요. 작가이름은 기억 못하고 있었어요.
나인님의 눈에 번쩍 뜨였다니 분명 유망한 분이신 것 같아요.^^
언젠가 일어날지도 모르는!

hnine 2013-02-03 18:06   좋아요 0 | URL
맞아요, '섬뜩'하다는 표현이요. 저도 그랬어요. 아이들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경고 메시지로 와닿더라고요.
어떤 글은 제가 읽기에도 좀 어려웠어요. 저 위에 <해바라기마을의 거대바위>에 나오는 "아빠가 가져온 나무상자"요. 성인문학으로 문단에 데뷔한 작가라서 서사가 일단 돋보이더군요. 제가 구독한다는 잡지는 "어린이와 문학"인데 1월호에 실린 <언젠가 일어날지도 모르는> 이 작품도 읽고나서 금방 책장을 덮을 수가 없었답니다.

안녕미미앤 2013-02-22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린이 문학잡지 정기구독하시는구나.. 갑자기 급부러움이..^^;;

hnine 2013-02-23 12:48   좋아요 0 | URL
사실 저는 어린이 문학 잡지보다는 어린이책 읽는 것이 더 재미있어요. 배우는 것도 더 많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