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견뎌내기 - 힘든 시절에 벗에게 보내는 편지
헤르만 헤세 지음, 유혜자 옮김 / 이레 / 2004년 10월
평점 :
절판


겉표지도 벗겨지고 없는, 낡고 자그마한 책이 도서관 서고의 다른 책들 사이에 꽂혀있는 것이 내 눈에 띠었다.

H Hesse라고 흘림체로 쓰여진 위에 제목은 Das Leben Bestehen. 우리말 제목은 <삶을 견뎌내기>라고 되어 있었다.

바쁘다는 것은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기쁨에 대적하는 가장 위험한 적이다. (9쪽)

이 책의 첫 문장이다. 한 페이지를 넘겨보니 또 눈에 들어오는 문장이 있다.

쾌락은 점점 더 많아졌지만 즐거움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도시에서 벌어지는 축제에 참가하거나 놀이공원에라도 찾아간 사람은 몸은 뜨거운 열기로 달아오르고, 눈은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뻑뻑해져 연신 얼굴을 찡그려야만 하고, 지저분한 기억만 머릿속에 간직하게 된다. (10쪽)

소통수단은 갈수록 첨단을 달리지만 사람들이 느끼는 소외감은 더 커져간다는 말이 연상되는 구절이었다.

헤세라는 사람.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라는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은지는 아주 오래 전이지만 읽으면서의 그 충격만은 지금도 기억한다. 이후로 읽은 <데미안>, <지와 사랑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역시 읽고 금방 잊혀지지 않는 작품들로 지금까지 남아있는데 그의 에세이는 이번이 처음인지 기억을 더듬어보았더니 <한밤 중의 한 시간>이라는 책을 읽을 것도 같고 제목만 눈에 익은 것도 같고.

자기계발서 제목 같은 이 책은 그가 여러 매체에 발표한 시와 산문들의 모음집이다. 그에게 삶은 견뎌내야할 긴 여정이었음은, 그가 열 다섯 살에 이미 자살 시도를 했었다는 것, 수도원에 입학했으나 거기서 도망쳐 나왔다는 이력 등을 떠올려볼때 의외는 아니다. 끊임없이 행복을 추구하는 삶, 진정한 삶의 즐거움에 대해 생각하며 살아왔을 그가, 삶에 대해 하는 어떤 얘기에도 귀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고통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길이 고통의 세계를 가장 빨리 통과할 수 있게 만드는 지름길이라는 생각을 고수해왔다. 다시 말해 나는 고통과 그보다 높은 힘에 나 자신을 내맡겼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도 그와 같은 힘에 맡겼다. (126쪽)

고통을 겪고 있는 동안보다 어쩌면 그 고통 앞에서, 고통을 애써 외면하며 피해갈 방법을 찾는 동안이 고통 자체보다 더 인간을 지치게 만들 수 있다는데 공감한다.

133쪽에,

과감하고 맹목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고 단호하게 뛰어들어 호두껍질 안에 숨어 있는 혼돈을 창조해내려 한다.

이것은 곧 예술 활동에 대한 그 나름대로의 정의가 아닐까 하여 밑줄. 혼돈에서 질서를 찾아가는 것이 과학이라면 숨어 있는 혼돈을 창조한다는 말이 멋지다.

예술가의 종착지이자 목적지는 이제 더 이상 예술이나 작품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잊고 단념하는 것, 영혼의 평온함과 성스러운 존재를 위하여 콤플렉스와 고뇌에 사로잡힌 편협한 자아를 희생하는 것이다. 개인을 초월하는 자아, 즉 세상과 시간에 더 이상 사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정신적인 상태에서 세상의 혼돈이 음악으로 바뀌는 성인으로 발전하는 것이 예술가의 목표일 것이다. (135쪽)

자기 자신을 잊을때, 그래서 개인을 초월할 때, 세상과 시간에 사적으로 반응하지 않을 때, 예술 뿐 아니라 그 어떤 가치있는 목표가 이루어지는 때는 그것에서 초월할 때라는 말은 얼마나 모순이면서 동시에 고개 끄덕이게 하는지.

자칫 어둡고 무겁고 회이적일 것 같은 그의 글 속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도 발견한다.

다가올 행복에 대한 거짓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오늘을 영원히 내일에게 제물로 바친다. (219쪽)

그가 말하는 견뎌내는 삶이란, 오늘을 사는 즐거움을 무시하는 삶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닐까 생각이 들게 하는 부분이다. 눈은 '내일'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고정시키고, 우리는 영원히 '오늘'을 살지 못하고 있지 않는지.

책의 뒷부분에 가면 '유쾌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유쾌함이란 장난이나 자만심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서, 인간의 가장 고귀한 인식이자 사랑이며 모든 현실을 긍정하고 모든 나락과 심연의 가장자리에서 깨어 있는 것이다. (...) 그리고 유쾌함은 아름다움의 비결이며 모든 예술의 본질적인 실체다. (...) 시인이나 음악가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그의 어둠이나 고통 혹은 근심이 아니다. 그들은 순수한 빛, 즉 영원한 유쾌함 가운데 한 방울을 우리에게 나누어준다. 모든 민족과 언어가 신화나 우주 진화론 또는 종교에서 세계의 깊이를 재려고 아무리 애써봐도 그들이 도달할 수 있는 최후의 그리고 최고의 경지는 바로 그 유쾌함이다. (226쪽)

결코 유쾌한 책이 아닌 이 책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라니. '정말로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은 우리 시대와 정신의 범위 내에서는 전혀 불가능하다고 절대적으로 믿는다'는 그는, '가치있는 삶'이 무엇인가 고뇌하며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잡으려 자신을 소진시키지 말고, 그것을 뛰어넘을 때 오는 유쾌함을 목적으로 하라고 말하고 있지 않나?


리뷰를 쓰기 전에 ★★★☆☆ 으로 별점을 주었다가, 다 쓰고 나서 ★★★★☆로 고친다. 이 책에 담긴 그의 모든 생각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기에 별점 세개 했던 것을, 리뷰를 쓰다보니 좀 더 한발짝 그의 세계에 다가간 것 같아서이다.

'견뎌낸다'는 것의 의미를 부정적으로 볼 것이 아니다. 목표에 대한 긍정, 인정.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견뎌내게 하는 동기가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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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1-01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거웁자고 읽는 책이고
즐겁게 누릴 삶이겠지요

hnine 2013-01-02 06:56   좋아요 0 | URL
새해에도 즐겁게 삶 누리시기 바랍니다.

하늘바람 2013-01-01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항상 님이 먼저 챙겨주셨는데 제가 지난해 감사도 잘 못드리고 해가 바뀌었네요
저도 올핸 정신 차리고 나누고 갚으며 여유있게 살고 싶어요
님 올핸 조금 덜 외롭고 덜 춥고 덜 쓸쓸하고 덜 마음 아프고 덜 힘들어서
더 따뜻하고 더 행복하고 더 푸근한 해 되시길 바랍니다

hnine 2013-01-02 07:00   좋아요 0 | URL
제가 챙겨드리기는요 뭘.
좋은 일 있었던 2012년이었지요? ^^
조바심 내지 말고 뭉근히, 꾸준하게, 그렇게 삶을 꾸려나갈 때라고 제 스스로 다짐하곤 합니다.
태은이 가지시고 서재에서 태어날 아기를 위해 한마디씩 써주고, 그럴 때가 있었는데 어느 새 저렇게 예쁘게 크고 있고, 동생까지 봤으니...제가 키운것도 아니면서 그냥 흐뭇하네요. 알라딘을 통해 좋은 분들 알게 된 것도 별로 친구 없는 제게는 감사할 일이고요.

2013-01-01 15: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02 07: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블루데이지 2013-01-02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오늘 아침부터 투덜투덜 뾰루퉁해져있었는데 hnine님 서재에 와서 글을 쭈욱 읽어내려가니
부끄러워졌어요! 예전엔 안그랬는데 왜 갈수록 '욱'하며 한숨을 토해내는지...
이런 저를 노골적으로 발견하고는 움찔했답니다.
긍정인정유쾌함동기견뎌냄삶 이런 문장들이 뭉쳐져 오래 맘에 머물듯 싶어요!
아! 수레바퀴아래서 다시 읽고싶어졌어요! 머리랑 가슴이랑 동시에 맞물리지않으려 요란히 울리던....그 책!
hnine 님 시동 잘걸고 2013년 출발하셨죠?? 안전운전하셔요^♥♥

hnine 2013-01-02 17:02   좋아요 0 | URL
블루데이지님이 투덜거릴 일이라면 마땅히 그럴 일이었겠지요. '투덜' 하면 또 저 아니겠습니까? ㅋㅋ
어제는 친정에 다녀오고 (전 시댁이 따로 안계신 이유로), 오늘은 시어머님 기일아라서 지금 음식 준비한다고 부산떨고 있답니다.
'출발'이라는 말이 새롭게 눈에 들어오네요. 예전에 박명수가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자주 하던 그 억양으로 저도 외쳐봅니다, "출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