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7
시도니가브리엘 콜레트 지음, 송기정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내 경우, 영화만 하더라도 프랑스 영화에는 쉽게 빠지기 어려웠다. 매우 원초적인 것을 건드리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가 하면 아주 심오한 내면을 다루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와는 다른 식으로 감성을 풀어내고 표현하고 해석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워낙 지배적이어서 다른 소감이 차지할 여지를 별로 남기지 않았다. 거기다가 작가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시도니가브리엘 콜레트.

1873년에 태어나 1954년까지 살았던 프랑스의 여자작가로서, 세번의 결혼과 두번의 이혼, 동성애, 근친상간적인 사랑 등, 사람들의 시선을 받기에 충분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이런 삶을 살았던 작가의 경험이 바탕이 되었다고 하는 이 책에서 작가의 목소리는 그런 순탄지 않은 경험보다는 어머니에 대한 회상에서 더 두드러지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머니를 통한 유년기로의 회귀는 근원에 대한 작가의 강박적인 추구를 나타낸다. 콜레트는 어머니와 하나로 용해되어 원초적 나르시시즘에 이르고자 끊임없이 유년기로의 역행을 추구한다. 동트기 전의 새벽시간은 근원을 탐구했던 콜레트에게 있어서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새벽은 자신의 원형이자 모델인 어머니가 부여한 선물이다. (194쪽, 작품해설 중에서 인용)

 

'여명'은 새롭게 생명력이 움트는 시간, 어둠에서 밝음으로 넘어가는, 사실은 밝은 태양보다 더 힘이 꿈틀거리는 시간이다. 자신의 모델이기도 했던 어머니, 자신의 근원지인 어머니. 이 두가지가 나 개인적으로 이 소설의 키워드가 아닐까 생각하며 읽었다. 평범하지 않은 여러 가지 경험을 하고 돌아와 작가의 머리속을 채운 생각은 결국 자기 근원에 대한 것이었다.

 

새벽 동이 터오고, 바람은 잦아들었다. 어제 내린 비로 인해 어둠 속에서도 새로운 향기가 느껴진다. 아니면 내게만 세상이 새롭게 보이는 것일까? 나만 이 세상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까? ...... 매일매일 새로 태어나고 매일매일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일은 가능하다. (중략) 새벽이 온다. 그 어떤 악마도 새벽이 가까이 오는 것을, 새벽의 창백함을, 새벽 푸른빛의 미끄러짐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174쪽)

 

나 자신, 새벽이 아니었다면 하루를 버틸 에너지를 어디서 얻었을까 싶을 때가 있다. 비록 몇 시간 후면 그 에너지가 바닥이 나버릴지언정, 하지만 그 뒤에 또 하나의 새벽이 오고 있다는 것은 위안이고 희망이다.

 

연하의 남자 비알은 콜레뜨를 좋아하지만 비알을 좋아하는 엘렌의 마음을 알고 있는 콜레뜨는 비알의 연심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가 꼭 중간의 엘렌때문은 아니다. 비알의 고백과 그의 존재가 콜레뜨의 마음을 흔들지 않는다는데 있었다. 최소한 콜레뜨로부터는 그 어떤 욕망도 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콜레뜨는, 어쩌면 실제 작가 자신도,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서, 남자의 나이가 두려워서, 자신의 욕망을 억지로 누를 타입은 아니다. 두번의 이혼으로 이제 시선은 에로스적 사랑이 아닌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쪽으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 이제는 내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것을 시작하고 싶어. 알겠어, 비알? 열여섯 살 이후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것과 무관하게 살고 싶고, 사랑이란 것과 무관하게 죽고 싶어. 그건 참 멋진 일이야...... 당신은 잘 몰라. 당신에게는 아직 시간이 많으니까. (...) 이해해주겠지?

 

 이제 삼십 년 동안 지겹도록 나를 괴롭혔던 그놈의 사랑 때문에 죽고 사는 것이 아니라, 슬프면 그냥 슬프고 기쁘면 그냥 기쁘고 그렇게 살려고 해. 근사한 일이지. 너무 근사해." (136쪽)

 

밤에 시작한 콜레뜨와 비알의 대화가 끝날 즈음, 밤은 끝나고 새벽이 오고 있었다. 새로운 시작이다.

번역서이기 때문에 그 느낌이 감소되어 전달되었음이 분명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섬세한 표현들이 문장 여기 저기서 빛나고 있었다. 특히 새벽에 대한 묘사는 색채와 시각, 촉각, 청각 등 감각을 넘나들며 아름답다.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가 그 예이다. 새벽을 방황하는 친구로 표현하면서 자기가 그 과정에 참여하자 숲이 되고 물보라가 되고 별똥별이 되고 오아시스가 된다는, 그런 표현을 누구나 할 수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지금 하늘나라에서, 역시 새벽에 집착했던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새로이 태어나는 쾌락을 누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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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데이지 2012-12-19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각을 넘나드는 표현.....hnine님 같은 책이겠네요^^^

hnine 2012-12-19 11:53   좋아요 0 | URL
감각을 넘나드는 표현이라고 하니 미사여구가 돋보이는 그런 책 같이 들리기도 하는데 그건 아니고요, 뭐라 해야하나, 소설은 아니지만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을 읽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어요.
잠깐 나갔다 왔는데 날씨가 꽤 쌀쌀하네요. 이제 저는 투표하러 가러고요. 일찌감치 다녀오셨다지요? ^^

oren 2012-12-19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의 이력이나 소설 속 이야기들도 흥미롭고, 열여섯 살 이후 처음으로 '사랑이란 것과 무관하게' 살고 싶고 죽고 싶다는 얘기도 참 인상적이네요. '쾌락의 쑤석거림으로부터 자유로운 노년'을 노쇠기에 접어든 소포클레스가 '거칠고 포악한 주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것처럼' 기뻐했고, 키케로가 '온갖 욕망에 대한 복무 기간이 끝나 마음이 자기 자신과 함께 살 수 있게 된' 즐거움을 이야기한 대목도 떠오릅니다. '사람이 원하지 않는 것은 사람을 괴롭힐 수가 없다'던 쇼펜하우어의 글도 떠오르고요.
* * *
사람들은 흔히 청년기를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로 여기고 노년기는 비애의 시기로 생각한다. 만일 행복을 격동과 감동으로만 본다면 그 말이 맞을지 모른다. 하지만 청년기에는 바로 그 격동과 감동 때문에 기쁨보다 고통에 더 많이 시달린다.

그러나 노년기에는 그러한 격렬한 감동이 가라앉고, 청년기에 그토록 감격적으로 받아들인 일들도 명상적인 색채를 띠며 다가온다. 노년기에는 인식이 자유롭기 때문이다.

인식 그 자체에는 고통이 없다. 물론 감동이나 감격 그 자체가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노년기가 되어 향락을 누릴 기회가 거의 없다고 해서 슬퍼할 필요는 없다. 향락이나 고통은 같은 성질의 형태로, 향락은 소극적이고 고통은 적극적이라는 차이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이해하면 소극적인 향락에 대해 집착할 이유가 없게 된다.

모든 향락은 욕망을 달래는 데 지나지 않아 욕망이 소멸하면 향락도 사라진다. 마치 식사 뒤에 식욕이 없어지거나, 깊은 잠에서 깨어나면 더 이상 졸음이 오지 않는 이치와 같아 향락의 기회가 없다고 탄식할 이유는 없다.
- 쇼펜하우어

hnine 2012-12-19 20:27   좋아요 0 | URL
쇼펜하우어가 이렇게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말도 했군요 ^^ 이론적으로는 정말 그래야하는데 현실이 과연 그런가 생각하면 역시 좀 의기소침해지는건 사실이예요. 노년에 이르러서도 욕망의 지배를 받으며 사는 모습은 정말 피하고 싶은데 이 대목에선 또 정열과 욕망의 기준이 헛갈리기도 합니다.
위의 소설은 작가의 거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해요. 이력이 좀 평범하지 않은 작가이지요.

프레이야 2012-12-19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인님, 제가 그어둔 밑줄과 같아서 더 반가워요. ^^

hnine 2012-12-19 20:29   좋아요 0 | URL
다음 페이지가 궁금해지는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소설은 아니었지만 이 세상엔 그런 소설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준 작품이었어요.
삼십년동안 사랑으로 괴롭힘당하지 않은 사람의 노년은 다른 결론일까요?